2006년 3월호

극과 극의 두 남자, 조괄과 굴원의 처연한 비극

변화를 읽는 눈, 천군만마가 그 안에 있다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6-03-14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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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궁지에 몰려 절망상태에 이르면 새로운 변화를 갈망한다.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며 세상이 달라지기를 기원한다. ‘주역’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하지만 궁해도 변치 않고 옛 방식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철학은 이런 사람에겐 멸망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전국시대 말엽에 사라져간 6국의 운명이 그러했다.
    극과 극의 두 남자, 조괄과 굴원의 처연한 비극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걸친 500여 년의 천하대란 시기. 중원의 백성들은 그칠 줄 모르는 전란과 혹독한 학정(虐政)으로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를 운명이었다. 그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나을 바 없었다. 춘추시대 290여 년간 무려 483차례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국시대 들어서는 병력 투입 규모가 더욱 커졌다. 한번에 10만명 넘게 참전하는 경우도 흔했다. 유명한 ‘장평의 싸움(長平之役)’에서는 항복한 조(趙)나라 군사 40만명이 진(秦)나라 군사들에게 생매장됐다는 기록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사람들은 더 이상의 살육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외족의 침략을 막아내려면 통일은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였다.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평화적 환경이 조성돼야만 무거운 세금이 줄어들고 징용과 징병 부담도 가벼워질 것이라 믿었다. 내정의 부패와 부조리에 맞서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과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개혁 시도 또한 통일 여론을 은근히 부추겼다.

    전국시대 말엽 진(秦)을 제외한 6국에는 ‘가문타령’만 하면서 특권 세습에 안주하려는 기생(寄生)적 권위주의 집단과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고난의 생활을 영위하던 노예계층이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부패로 말미암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예계층은 근로의욕을 상실했으며 군대의 사기도 형편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달랐다. 노예라 할지라도 황무지를 개간해 생산력을 늘렸거나 싸움터에서 공을 세우면 즉각 신분이 승격됐다. 그중에는 귀족에 가까운 영전을 보장받거나 장교 또는 관리로 등용되는 이도 있었으며 징용 면제와 같은 특전이 내려지기도 했다. 진나라에서 전 국민적으로 ‘자각적 적극성’이 팽배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전국시대 말엽 각국의 상황은 달랐지만 이래저래 팽창한 통일 여론은 대항할 수 없는 천하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맹자(孟子)도 그런 기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그는 ‘피 보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통일의 주인공 되기를 바란다(不嗜殺人者能一之…, 孟子, 梁惠王 上篇)’는 견해를 밝혔다. 종국에 통일의 업적을 달성한 진나라는 개혁을 거치면서 강한 국가가 됐으나 인자한 나라는 아니었다. 반면 진을 제외한 6국의 왕조와 특권층은 개혁에는 관심도 없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기득권 유지와 세력 확대에만 매달렸다.



    그후 통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자 진의 각개격파 전략이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진을 제외한 6국 중 5개국이 연합·단결했거나, 혹은 초(楚) 한 나라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렸어도 전세의 귀추를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 전국 7웅(七雄)의 병력을 대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진(秦) : 정규보병 100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위(魏) : 정규보병 30만~36만, 후근부대 10만, 전차 600량, 기마병 6000.조(趙) : 정규보병 수십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한(韓) : 정규보병 약 30만.제(齊) : 정규보병 수십만 내지 대략 100만.초(楚) : 정규보병 100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연(燕) : 정규보병 수십만, 전차 700량, 기마병 6000.(楊寬, 戰國史 p.440, 中國歷代軍事戰略 上篇 p.104)

    난세의 궁지에 몰려 절망스럽고 답답했던 보통사람들은 현 상태를 탈피할 변화, 즉 돌파구를 절실히 원했다. 그들은 그것이 곧 통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일 자체를 열망했을 뿐 정작 그것이 ‘어떤 통일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만약 통일이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지 않고, 천하대란 대신 태평성세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모처럼의 통일이 새로운 난세의 시작이라면?’ 이러한 고민은 하지 못했다. 결국 진의 천하통일은 불과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와 조(趙)나라 간에 그 유명한 ‘장평(長平, 지금의 산시성 소재)의 싸움’이 벌어졌다. 단일 전역(戰域)에 투입된 병력의 동원수로 보아 전국시대 최대의 격전이었다. 대승한 진군은 여세를 몰아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더니, 기원전 256년에는 항복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주(周) 왕조를 멸망시켰다. 실속 없이 정통성이니 종주권이니 주장하던 보수(保守)의 아성이 결국 무너져내린 것이다. 전국시대는 말 그대로 실력의 시대였다.

    통일의 전주곡, ‘장평(長平)의 싸움’

    당시 일부 군사개혁을 거친 조나라는 군사 동원력은 상당했으나, 외교에서 갈팡질팡하면서 국제적 신용을 잃고 고립을 자초했다. 더욱이 군주인 효성(孝成)왕은 자존심만 강한 ‘세대교체론자’로서, 이는 결국 진과의 싸움에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영토분규 중이던 상당(上堂)으로 침입해 그 일대를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조왕도 주저하지 않고 20만 대군을 파견했는데, 전군의 대장은 유능하고 용감한 노장군 염파(廉頗)였다. 현지에 도착해 진나라 군대와 몇 차례 승패를 겨뤘으나 그 전과가 신통치 않자 염파 장군은 전선의 세력판도와 국내외 정세를 고려해 새로운 전략을 세우기에 이른다. 공격이 여의치 않으니, 방어 위주의 진지 구축으로 시간을 끌면서 판도와 정세가 변하기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오면 반공에 나선다는 책략이었다. 대치국면은 3년이나 지속됐고, 승패를 가름할 결전은 없었다. 답답해진 진왕이 유능한 승상인 범수(范)를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범수가 말했다.

    “적장 염파의 정세판단은 옳습니다. 우리 진군이 강하여 당장은 공격할 수 없으나 진군은 먼 길을 왔으니 지구전에 불리하고, 사정 변경이란 것도 있으니 진군이 피로가 누적돼 퇴각할 때를 기다려 공세를 취하자는 속셈이지요. 적장이지만 나름으로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러니 염파를 제거하기 위한 이간책을 써야겠습니다.”

    진왕은 바로 막대한 금은과 재물을 뿌려 조 왕조의 권신들을 매수하고, 그들로 하여금 유언(流言)을 퍼뜨리게 했다.

    “염파 장군은 늙어서 겁이 많아졌고 진군에 투항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진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는, 조나라가 최근 작고한 조사(趙奢) 장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새 대장으로 임명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젊고 유능하며 용기가 탁월합니다.”

    조왕은 조작된 ‘여론’에 금방 현혹돼 사령관 교체에 대한 유혹을 느끼게 됐다. 조사 장군은 침착하면서도 임기응변에 능한 명장이었다. 그러나 아들 조괄은 비록 소년시절부터 병서를 즐겨 읽고 군사문제에 정통했으나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이 부족한데다 탁상공론(즉 紙上談兵)만 즐겨하는 게 문제였다. 이를 눈치챈 조사 장군은 생전에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조괄의 작전 지휘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한번은 조괄의 모친이 그 까닭을 묻자 조사가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이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 사안이니 엄숙하고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도 조괄은 안이하게 군사를 말하고 있다. 앞으로 조나라가 그를 기용치 않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나, 만약 등용한다면 그가 조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조왕은 잘못된 여론만을 믿고 조괄을 등용했다. 조왕은 그의 화려한 언변에 감탄한 나머지 20만 신병을 추가로 보강해주고, 진군의 격퇴를 명했다. “즉각 전선에 나가 염파 장군을 대체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괄의 모친은 황급히 조왕에게 상서(上書)하고, “조괄을 장군으로 임용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조괄의 성질이 장군으로서 군심을 얻었던 그 부친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친은 조정에서 상여(賞與)를 주시면 모두 부하들과 사병들에게 나눠줬고, 임명된 직후부터는 온갖 정성을 군사에만 쏟으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조괄은 등용되자마자 위세만 부리고 부하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왕이 “나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변경할 수 없다”고 회답하자 조괄의 모친은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를 연좌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왕은 이에 순순히 동의했다.

    성공한 CEO는 비관주의자?

    ‘사기(史記)’에 나타난 조괄의 결점은 여기까지이지만 이후 그는 실전 경험이 녹아들지 않은 탁상공론을 펴고, 임기응변력 부족,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오만방자함, 이기주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현대 경영학의 잣대로 보면 조괄은 식견보다도 ‘성격’이 문제되는 CEO였던 셈이다.

    미국과 일본의 CEO관(觀)에는 이미 상식이 된 통념이 하나 있다. ‘성공한 경영자’와 ‘실패한 경영자’에 대한 면접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공한 CEO는 거의 모두 비관주의자였다고 한다. 실패할 가능성을 미리 따져 이리저리 대비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성공하는 CEO라는 것. 반면 ‘실패한 CEO’는 거의 모두 낙관주의자였다고 한다. 모험심과 투기성이 강해야 사업에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 식으로 성공의 가능성만 낙관하는 스타일이다. ‘이것저것 재기만 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며 일단 돌진하고 보자는 성격이다.

    그래서 CEO의 기획실에서는 이른바 ‘복수 변화요인(multifactor)’ 추적을 중시한다. 유동적인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선 환경조건의 변화 요인을 계속 추적, 기록하면서 잠정적으로 작성해놓은 전략과 계획을 빈번하게 재검토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발사태 대응전략(contingency plan)’의 작성도 중요하다. 불확실성의 다원화 시대에는 경영전략도 과거처럼 한 가지 방안만 책정해 고수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비하는 우발사태 대응전략을 마련해 유연하고도 신속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소개하는 고대 조나라의 조괄은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낙관주의자인데다 경솔한 세대교체론자였다. ‘성급한 일반화’를 즐기고 ‘경솔한 간단화’에 능한 성격적 문제아였다.

    파격 人事가 불러온 재앙

    여하튼 조괄은 새로 보강된 20만 신병 부대를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전선으로 향했는데, 이로써 그는 모두 40만~45만 대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었다. 같은 시각 이런 정보를 접한 진왕은 크게 고무돼 유능한 백전노장 백기(白起)를 새로 전선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병력도 보강해줬다. 하지만 사령관 교체 사실을 극비에 부쳐 발표하지 않았다.

    반면 조괄은 전선에 도착하자 그의 신조인 세대교체론에 따라 우선 지휘관 인사 교체부터 단행했다. ‘새 시대는 새 인재를 필요로 한다. 구세대는 늙어서 용기와 기획력이 없으니 새 시대에 일할 자격이 없다’는 투였다. 그의 세대교체론 핵심은 연령의 차이를 절대시한 배타주의. 이는 노·장·청을 막론하고 동시대인, 동국인(同國人)이 더 중요함을 몰각(沒學)한 경솔한 발상이었다.

    그의 파격적인 인사조치는 당장 두 가지 치명적 폐해를 초래했다. 우선 적정(敵情)은 물론, 아군의 실정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전선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적진의 새 사령관이 백기로 바뀐 사실을 알고 보고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군심(軍心)이 흩어졌다. 납득할 수 없는 풋내기가 지휘관이 되자 군사들은 더는 일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괄은 인사 단행을 명분 삼아 부대 배치를 변경하고 자주 출격했다.

    다른 한편, 진군의 대장 백기는 조나라 장수 조괄의 약점을 검토한 끝에 새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새 작전의 핵심은 거만한 적장의 판단착오를 유도하는 것. 진군이 마치 전투에 패배해 퇴각하는 것처럼 보여 적군을 진군의 주력 진지 앞까지 깊이 유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조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동시에 그 보급선을 끊고 분할 포위해 철저히 섬멸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백기는 진군 기병대를 아군의 좌우측 끝에 배치했다가 퇴로를 차단하는 한편, 다른 기병부대로 하여금 조군의 중앙으로 돌진케 해 적군을 둘로 갈라놓았다. 더욱이 백기는 가짜 작전 명령서를 적군 진지에 흘려 조군의 판단착오를 유발하기도 했다.

    “40만 모두 산 채 묻으라!”

    결국 계략에 말려든 조군의 주력부대는 무모하게 적진으로 진격했고, 진군 주력진지 앞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해 진군의 기병대는 조군의 보급로 겸 퇴로를 끊었다. 전선 양쪽으로부터 압박해오는 진군의 포위망은 조군에게 위협을 가중시켰다. 궁지에 몰린 조괄은 인접한 제나라와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제왕은 손쉬워 보이던 양곡 차관마저 거절했다.

    보급로와 양곡 배급이 끊긴 지 46일. 조군 진영에서는 굶주린 병사들 간에 식인(食人) 사태가 발생했다. 조괄이 금지령을 내렸으나 소용이 없었고 군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극한 상황에 빠져든 조괄은 조군을 네 개 단위로 개편해 진군의 포위망에 돌파구를 뚫고자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조괄 자신이 근위대와 함께 진두에 서서 돌진했으나, 비 오듯 퍼붓는 진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졸지에 총사령관까지 잃은 조군은 각 부대가 제멋대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40만 대군이 샅샅이 흩어져버렸다.

    극과 극의 두 남자, 조괄과 굴원의 처연한 비극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으로 난세를 비관해 자살한 굴원(오른쪽)과 그의 자살로부터 유래된 단오절(음력 5월5일) 머리감는 행사.

    진군 대장 백기는 갑자기 고민에 빠졌다. ‘조나라 사람은 신용이 없고, 조나라 군대는 변심이 특징이니, 관대하게 송환하면 후환이 걱정된다. 분명 더한 혼란이 빚어질 것이다…차라리 항복한 40만을 모두 생매장하는 게 옳다….’ 백기의 이런 생각은 곧장 말로 바뀌었고, 잔인한 명령은 즉각 집행됐다. 종군한 어린이 240명만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 성인 장병 전부가 생매장되고 만 것.

    진군의 이러한 처사는 후대에 장평의 싸움이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지 않고 ‘대학살의 역사’로 남게 된 불씨가 되었다. 진은 그같이 잔인한 방식으로 통일을 성취했으나, 그 때문에 곧이어 신속히 멸망했다.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천하통일은 한참 후인 한(漢) 왕조에 의해서 이뤄졌다.

    통일 희비 예감한 선지자의 고뇌

    통일 전야의 망국적 부조리, 폭력과 기만으로 도래할 통일, 그리고 천하대란의 재연에 대한 우려…. 이러한 절망적인 내일을 예측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전국시대 말엽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 기원전 340~278)은 나그네로 방랑길에 올라 통일 이전에 자살했다. 그 길 밖에는 자신의 절망과 고민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노중련(魯仲連)이라는 고대 지성인도 있었다. 사심 없는 경세(經世)의 언론활동으로 최선을 다하다 진의 6국 정복을 보자 통일 후에 은거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 아무도 모른다.

    조정의 부조리에 실망한 애국적 시인이나 양심적 선지자들은 유랑과 도피, 방랑과 은거로 생을 마쳤다. 다만 시인의 비애는 절망적인 국가의 장래에 대한 문제제기를 남겼으며, 한편으론 영혼의 일깨움으로 살아남았다. 우리에게 단오(端午)의 유래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굴원의 비극적 생애도 그러했다.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일이다. 국익의 타산에 능란하다고 자부하던 회왕은 국가간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의에 대해서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는 종전부터 우호친선 관계에 있던 제나라를 멀리하고, 국가이익 계산에 따라 새로이 진나라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다 제왕이 간곡한 친서를 보내오자 이에 감동한 나머지 일시나마 다시 뜻을 바꾸는 등 제 마음대로였다.

    그후 진의 소왕(昭王)이 즉위해 초의 회왕에게 푸짐한 선물을 보내면서, 천하절색인 여자도 제공하겠으니 황극에서 회맹(會盟)하자고 했다. 유혹과 호기심에 이끌려 회왕이 회견장에 나갔더니 약속했던 대로 미인이 제공됐고, 더불어 진의 영토도 일부 할양받았다. 그러자 분노한 제나라 왕이 한(韓)·위(魏)군과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회왕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진나라로 간 태자가 도망쳐 돌아오자 이번에는 진나라가 공격해왔다. 위급해진 회왕은 이번에는 그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면서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진왕이 초왕에게 친서를 보내 “최근의 불신을 씻고 역사가 오랜 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관(武關)에서 회맹하고 싶다”고 했다. 회왕은 이를 두고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으나 ‘진을 믿을 수 없다’ ‘진의 노여움을 사서는 불리하다’는 등 격론만 무성했다. 결국 회왕은 “원래 나는 대국적인 국가이익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외교에서는 정상회담이 중요하고, 절차와 체면이 상호 존중돼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회맹장으로 나가기를 결심했다.

    시인의 절망

    자고로 유치한 영웅주의의 자고자대는 망조의 극치다. 일부 신생국의 여·야 지도자가 테러 정권을 상대로 ‘언제 어디서나 정상회담’을 응낙하고, ‘조정력을 발휘’하여 떨어진 인기를 만회해 보겠다고 하는 허망하고도 가련한 모험적 발상을 하지만 이는 결국 망조를 부를 수밖에 없다. 아닌게아니라 초나라의 회왕이 회담장에 나가보니 진왕은 나오지 않았고, 그 대신 사령관이 ‘모시러 왔다’며 사실상 회왕을 체포해 진의 수도로 압송했다. 회왕은 진나라에서 연금상태로 억류된 채 속국왕 취급을 받았다.

    한편 국왕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초나라에서는 진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는 여론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는 승산이 없었고, 회왕의 신변안전 문제도 있고 해서 이럭저럭 시일만 보내는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제왕에게 애원해 그곳에 인질로 가있던 태자를 돌려받아 즉위시켰으니 그가 바로 경양(頃襄)왕이다. 회왕 자신은 진을 탈출하려다 다시 체포된 뒤 신병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그 무렵 제나라와의 친선 외교를 주창하며 초나라 조정에서 법령 등 공문서 작정에 종사하던 굴원은 개인적으로는 신의와 성실성을 인정받아온 신하였다. 하지만 그는 질투심 많은 소인배들의 참언(讒言)만을 믿은 회왕에게 항상 버림받았다. 무관 사건 때에는 극구 만류론을 개진했으나 회왕은 이를 무시했다. 굴원은 부당하게 소외당할 때마다 시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그는 국왕의 반성을 바라면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다정다감한 애국시인이었을 뿐,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경양왕 즉위 후에도 거듭된 참언으로 피해를 보고 좌천당하자 결국 굴원은 조정에서 사퇴했다. 왕가 출신이면서도 방황의 여로에 올라 장강변을 맴도는 나그네 신세가 된 것이다. ‘초사(楚辭)’라는 시집의 핵심을 이루는 작품 ‘이소(離騷)’도 바로 이때 나왔다. 초췌한 몰골로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목적지 없이 강변을 거닐던 굴원은 소리 높여 읊었다.

    “세상은 혼탁하여 아는 이 없구나. 마음의 대화도 들어주지 못하니 어이 하리. 돌아가야지…희망도 두려움도 없거니 죽음이라도 찾아가야지….”

    그러고는 돌덩이를 모아 안고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멱라(汨羅)강 깊은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때가 음력으로 5월5일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날이 오면 굴원의 자살을 슬퍼하며 강물에 배를 띄우고 영혼이나마 달래보고자 음식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그후 단오절 행사는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펴졌다. 오늘날에도 단오절에는 호남성 멱라 강변의 굴원기념관에 수만명의 인파가 구름같이 모여 비애의 애국시인을 기린다.

    그리고 2300년 후

    굴원의 고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진이 초를 우롱하다 정복했듯, 100년 전 구한말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 왕조를 멸시·우롱하다 강제병합했다. 혈맹관계이던 중국이 발 벗고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오늘날 형세는 퍽 달라졌다.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잠자는 사자’는 거듭된 자극으로 다시 눈을 뜨고 있고, 해양세력 또한 그 위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중간에 있는 나라는 어떠한가. 하나가 둘로 갈라져 통일의 기회를 거듭 놓치더니, 한편은 개인 우상화와 권력세습, 인권유린을 일삼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기회주의와 과거의 정보정치 및 기득권 집착이 만연하고 있다. 앞으로도 외세의 이익에 의해 어떻게 이용당할지 속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극과 극의 두 남자, 조괄과 굴원의 처연한 비극
    朴東雲
    ● 1921년 평북 신의주 출생
    ●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 한국일보 논설위원, 샘터사 편집위원 역임
    ● 現 북한연구소 이사
    ● 저서 : ‘통치술’ ‘민족사상론’‘정치병법’ 등


    그러나 세계사의 추세로 보아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단일한 세계시장이 지구적으로 형성되면서, 개방된 시장경제가 계속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기아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도 그 추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결국은 인권 옹호 기조의 민주주의 정착이 요청되게 마련이다. 소련의 붕괴와 새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동구의 변혁과 개방의 확대가 과거의 온갖 장벽을 넘어선 인류의 진로를 가리킨다.

    우리는 더는 100년 전 ‘은자의 왕국(The Hermit Kingdom)’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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