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주연 압도하는 40대 개성파 조연들

유해진, 이문식, 이한위, 김병옥, 김윤석, 이병준…

  • 장세진 자유기고가 sec1984@hanmail.net

    입력2007-04-11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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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칠맛 연기로 ‘흥행 안전판’
    • 연기력 부족한 젊은 주연 보완재
    • A급 조연, 다작으로 주연 수입 능가
    • 조연 3대 패밀리 대학로파·자생파·TV파
    • 주연 빛나게 해야 스스로 빛나는 숙명
    주연 압도하는 40대 개성파 조연들
    “병신 육갑한다더니 내가 완전 그 짝이네. 멋 모르고 저놈한테 홀려 왕을 조롱하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 ‘왕의 남자’에서 장생, 공길과 어울린 육갑(유해진 분) 일행이 왕을 풍자하다 치도곤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육갑이가 걸쭉한 입담을 쏟아내는 장면이다. 장생과 공길의 애틋한 사랑이 관객의 감정선을 적셨다면 육갑의 살아 날뛰는 입담은 웃음보를 건드렸다. 풍자와 신명나는 어깨춤이 펼쳐진 ‘왕의 남자’라는 멍석에서 육갑은 칠득, 팔복과 더불어 광대의 소임을 다하며 1000만이 넘는 한국인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들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육갑을 맡은 유해진은 이 작품으로 제43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하잘것없는 단역으로 출발한 충무로 청년의 우직한 영화 사랑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그는 최신작 ‘타짜’에서도 예의 입담을 과시했는데, 끊임없이 주절대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관객의 눈귀를 사로잡을 만큼 감칠맛이 났다. 많은 영화팬이 ‘고광렬 역을 맡은 유해진의 연기가 너무나 좋아 다시 봤다’는 감상평을 올릴 만큼 그는 영화에 맛깔스럽게 버무려졌다.

    유해진은 정우성과 동급?

    충무로는 지금 조연 전성시대다. 영화팬도 연기 잘하는 조연에게 주연 못지않은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조연이 이런 시선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해진은 조연시대를 개척해 주연으로 올라선 키워드 같은 존재다.



    유해진에게 도회적인 이미지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멜로 연기를 기대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해진은 살아남았다. 메가패스 CF에서 정우성과 스피드스케이팅 대결을 펼치다가 졌지만 결국은 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를 CF에서 만나는 의외성은 정우성을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맛을 안겨준다. 유해진은 CF에서조차 정우성의 조연이다. 그러나 누구도 유해진을 조연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이제 정우성과 겨뤄도 아우라가 주눅 들지 않는 발광체가 되었다. 그만큼 갈고닦인 조연은 더 이상 주연의 병풍 노릇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유해진의 데뷔작은 최민수·강수연 주연의 ‘블랙잭’(1997)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에서 그는 ‘덤프트럭 기사 2’를 맡았다. 최민수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 속에서 곤죽이 되도록 터지는 재수 없는 청년이었다. 그때 그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면 모를까,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저 그런 단역이었다. 그런데 그는 꾸준히 그런 단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캐릭터에 맞게 연기해냈다.

    그가 주로 하는 대사는 ‘씨×× 같이’ 따위의 욕이거나 ‘주둥이를 쪼사불라’처럼 살벌한 협박이지만 결코 미움의 언어가 아니다. 유해진의 언어는 다른 의미와 느낌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웃음이라는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문 같다. 그가 아니고는 획득할 수 없는 세계다. 다른 누군가의 표정이나 음성으로는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인물이 살아나지 않는다.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조연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고, 관객의 가슴에 ‘배우’라는 인식 하나로 주연까지 꿰찼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뒤져가며 어떻게 캐릭터를 소화했는지 거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이제 분석도 필요 없고, 현상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매력적인 배우로 성장했다. 조연과 주연의 경계를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는 이제 배우 유해진이다. 물론 그는 조연일 때 더 아름답다. 하긴 이것도 편견일지 모르지만.

    이름값만으로 100만~200만 관객 동원이 가능하다던 이른바 ‘충무로 티켓파워’는 사라졌다는 것이 요즘 한국 영화판의 정설이다. 그럼에도 충무로는 주연 배우를 융숭하게 모신다. 모시기는 늘 융숭하다. 문제는 넙죽 엎드려 모신 주연이 이름값만큼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언급되는 주연 배우의 연기력 부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한위 “20년 번 돈, 1년에 다 벌었다”

    찍어야 할 영화는 많고 주연은 늘 부족한 상태라 연기력을 논하기보다는 이름값으로 우선 영화라는 논에 물(주연)을 댄 업보다. 그렇다고 스타 없는 영화를 시도할 만큼 제작자들이 배짱이 두둑한 것도 아니다. ‘마파도’를 비롯한 몇몇 영화가 스타 없이 흥행에 성공했다지만 요행일 뿐이다. 스타 캐스팅은 영화계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 대안으로, 연기력이 처지는 주연의 ‘보완재’로 연기력 뛰어난 조연을 찾기에 이르렀다. 영화계의 이런 현상은 10년 사이에 하나의 조류로 자리잡았다. 조연의 비중에 눈을 돌리게 한 계기는 영화 ‘넘버3’(1997)였다. 한석규와 최민식의 화려한 투톱이 스크린을 장악했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조연 송강호, 박상면, 박광정, 안석환의 개성 강한 연기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넘버3’ 이후 개성 강한 조연을 찾는 영화계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거나 연극판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거나 브라운관에서 검증된 연기파를 발굴했고, 그들은 이 현장 저 현장을 누비며 화려한 조연시대를 열었다.

    이러다보니 영화계도 위상에 맞게 대접할 필요를 느끼고 A급 조연 배우의 개런티를 1억~1억5000만원으로 크게 올렸다. 대우와 위상이 달라지자 A급으로 분류된 조연의 폭도 넓어졌다. 1년에 한두 편 영화에 출연하는 주연에 비해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A급 조연은 주연을 능가하는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최근 1~2년 사이 영화계 조연으로 입지를 굳힌 탤런트 이한위씨도 이런 경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그는 2006년 한 해에만 ‘미녀는 괴로워’를 비롯해 ‘거룩한 계보’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원탁의 천사’ ‘예의 없는 것들’ ‘한반도’ 등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씨는 사석에서 “20년간 연기생활 하면서 번 돈을 지난 1년 동안 다 벌었다”고 할 만큼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쓸 만한(?) 조연이 영화계에서 제대로 대접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름 있는 조연은 웬만한 주연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배우는 개인 매니저를 고용해 스케줄을 관리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관리하는 부대비용이 적게 드니 당연히 수입은 많아지고 지출은 줄어든다. CF 개런티도 지명도 높은 스타에 비해 적지만 오롯이 자기 몫이 되므로 훨씬 짭짤하다.”

    수입도 차츰 좋아지고 있다지만 조연의 세계에서도 주연의 경우처럼 일부만이 귀하신 몸이다. 그것은 제작여건과 관계가 깊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의 말.

    “영화 현장에서 조연을 캐스팅할 때 절대적인 배우는 없다. 어느 배역이든 상황에 따라 1, 2, 3순위를 정해놓고 캐스팅을 한다. 좋은 배우를 많이 쓰고 싶지만 제작비 사정상 여의치 않다. 원톱이나 투톱 주연으로 만들 경우 1억5000만원, 1억원, 7000만원대의 조연 1명씩을 쓰거나 두 명만 쓰는 게 관례다. 대부분의 현장에서 이 룰을 지킨다. 물론 주연 지명도가 높지 않아 출연료 지출에 여유가 있을 경우엔 인기 있는 조연을 더 캐스팅할 수도 있다.”

    조연의 미덕, 개성과 연기력

    그렇다면 영화 관계자가 조연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조연은 무조건 연기를 잘해야 한다. 젊은 주연이 연기력이 부족하면 제작현장의 감독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그런데 조연까지 연기에 문제가 있다면 현장은 말 그대로 통제불능이 된다. 감독은 조연급 연기자만은 스스로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 결국 제몫을 하는 조연은 감독에게 안전판이다. 여기에 어린 주연에게 연기 지도까지 해줄 수 있는 조연이라면 금상첨화다.

    그렇다 해도 현장에서 조연은 조연일 뿐이다. 연기 경력이 아무리 앞서는 대선배일지라도 현장은 주연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 룰은 희한하게도 잘 지켜진다는 것이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다. 조연에게는 영화에서도 현장에서도 적절한 선을 지키는 절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연기만 잘한다고 조연을 선택할 수는 없다. 캐릭터에 맞는 개성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개성은 관객을 희로애락으로 이끌 수 있을 만큼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왜 조연이 사랑받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주연 압도하는 40대 개성파 조연들

    성인관객 680만명을 부른 영화 ‘타짜’에서 ‘아귀’역으로 관객의 뇌리에 박힌 김윤석.

    “모범적인 주인공은 흔히 판에 박힌 관념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반면에, 악당은 오히려 화려하고 다채로운 인물군(群)을 구성한다. 그리고 개성은 인물 만들기의 생명이기 때문에 조연을 맡은 들러리 등장인물(들)이 때로는 주인공이나 상대역의 배경 및 보조 역할을 담당해 줄거리를 전개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희극적인 막간(comic relief)에서 작은 닭대가리 주인공이 되어 뱀꼬리 주연급보다 훨씬 두드러져 보이기도 한다.”

    요즘 조연을 두고 ‘주연보다 빛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다반사다. 그만큼 조연을 맡은 배우가 발군의 연기력을 과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연기력만으로 돋보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안정효가 정의한 대로 조연에게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 시선이 가고 정이 느껴지고 잔상이 어리는 인물이려면 개성이 강해야 한다. 최근 본 영화의 조연들을 떠올려보라.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이런 개성을 부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말투다. 대표적인 게 사투리인데, 유해진과 이문식은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짝귀’를 연기한 부산남자 김윤석의 남도 사투리도 귀에 앵앵거린다. 음험한 암흑가 보스로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 역에 연극무대 출신이 주로 기용되는 것은 체계적인 발성연습을 통해 낮은 저음이나 캐릭터에 맞는 발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소리도 배우의 중요한 관건이다.

    겉돌던 이문식, 1년 새 출연료 100배

    영화계에 수혈되는 조연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연기파 배우의 영원한 젖줄인 연극무대 출신이 첫째다. 연극공연장이 밀집한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대학로파’로 불린다. 둘째로 영화판에서 단역이나 비중이 낮은 조연으로 시작해 주조연급으로 성장한 ‘자생파’가 있다. 셋째는 안방극장에서 활동하며 연기력을 쌓은 중견 탤런트다. 이름 붙이자면 ‘TV파’다. 이 세 부류는 모두 조연이라는 영역에서 한국영화에 기여하고 있지만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나 제작현장에서 취하는 행동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대학로파의 특징은 다작(多作)을 하되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오달수, 오광록, 김윤석, 기주봉, 손병호, 김병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뒤늦게 연극무대에서 영화계로 뛰어들면서 한국 영화계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 ‘순풍산부인과’ 작가를 거쳐 영화 ‘마음이’의 시나리오를 쓴 신동익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마음이’를 쓸 때 염두에 둔 배우가 있었다. 감독이 책(영화판에서는 시나리오를 흔히 ‘책’이라 부른다)을 보냈는데, 배우가 자기와 맞지 않다고 출연을 고사했다. 몇 번 설득했지만 의지가 확고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로에서 영화로 건너온 배우는 초반에는 작품을 별로 가리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작품과 자신의 캐릭터가 맞는지를 따진다.”

    충무로의 젖줄 노릇을 하는 대학로 연극인은 배타적인 영화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면 현장에서 겉돌게 돼 자신을 영화계로 불러들인 감독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친소관계는 서로 밀어주고 도움을 받는 사이로 발전한다. 박찬욱 감독, 김지운 감독 등이 특히 대학로파와 친한 감독이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견딘 자생파로는 유해진, 이범수, 이문식, 강성진, 김수로, 성지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잡초의식’이 강하다. 영화가 좋아 무작정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이름 없는 단역에서 출발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어지간한 바람엔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들이다. 영화판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은 현장에서 영화의 코드에 능동적이고 기민하게 대처한다.

    ‘마파도’ ‘구타유발자’ 등에서 주연으로 입지를 넓힌 이문식은 정말 매력적인 조연 배우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영화계에 뛰어든 그의 데뷔작은 ‘선물’이다. 그는 ‘선물’에서 단 세 번 얼굴을 내비친다. 이후 ‘공공의 적’에서 좀도둑 역할 등으로 비중이 커지면서 1년 사이 출연료가 100배나 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도 처음엔 현장에서 겉도는 배우였다. 연극판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연극무대 경력도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선물’의 단역을 맡은 것도 오기환 감독의 친구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작은 키에 응축된 끼로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영화사 오죤필름의 김상오 대표는 그의 데뷔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감독의 친구라며 현장에 나타난 이문식씨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혼자 지냈다. 외모도 튀지 않았던 터라 별반 기대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연기를 시작하자 스태프들이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몇 신(scene)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그때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1년 사이 개런티가 가장 많이 오른 배우가 되었다. 지금은 주연으로 3억~4억원을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1990년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한 이범수는 무명의 단역 시절을 거쳐 지난해 ‘대한민국영화대상’과 ‘춘사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짝패’)을 거머쥘 정도로 성장했다. ‘투캅스’에서 전투경찰로 단 한 장면 출연했던 김수로도 지난해 출연한 ‘흡혈형사 나도열’을 계기로 주연급 반열에 올랐다.

    직업정신 강한 ‘TV파’

    TV파들은 무대에서 연기력을 갈고닦은 대학로파와 달리 실전 연기 경험이 풍부하다. 이한위, 신구, 주현, 변희봉, 나문희, 김수미 같은 중견 탤런트들이 대표적인 TV파다. TV파 배우는 처음 촬영 현장에 오면 카메라의 위치나 동선(動線)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카메라워크로 다져진 이들이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 분위기에 적응하는 시간이 더 걸린다.

    TV와 영화는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다르다.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자신의 분량만 찍고 뿔뿔이 흩어지는 드라마 촬영과 달리 영화는 스태프와 연기자가 촬영 현장을 함께 지키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분위기가 강한 TV 촬영에 익숙한 만큼 가족적인 분위기의 영화 현장이 처음엔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영화 현장의 분위기에 푹 젖어드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맛을 본 TV파가 영화에 투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TV 드라마에서는 중견이지만 실제 출연료는 많지 않은 그들에게 적잖은 영화 개런티는 매력적이다. TV와 달리 중견에 대한 예의도 깍듯한 터라 쉽사리 영화 촬영 현장을 떠나지 못한다. 좀더 인간적인 현장에 마음이 끌린다. 트렌디 드라마의 범람으로 중견 탤런트가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도 이들을 영화판으로 돌려세우는 이유다.

    대학로파와 달리 TV파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작품을 선택한다. 이미 상업적인 배우로 들어선 터라 작품성보다는 스케줄만 맞으면 출연을 결정한다. 물론 모든 TV파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연기는 직업의 한 형태라는 자의식이 강하다. 대학로파와 가장 다른 점이다.

    개성 넘치는 연기로 TV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중견 탤런트 A씨가 몇 년 전 처음 영화를 찍을 때 일이다. 투톱의 한 축을 맡은 그는 첫 촬영날 시나리오의 대사조차 외우지 않고 현장에 나타났다. 드라마 촬영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영화 촬영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A씨는 수십년 연기 경력을 뒤로한 채 현장에서 영화문법을 익히는 데 한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악순환은 영화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됐고, 중도에 A씨가 촬영을 거부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게 촬영을 마쳤다. 그러나 영화촬영이 끝났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게 아니었다.

    영화홍보를 위해 무대인사를 요청한 제작진에게 A씨는 초청료를 달라고 억지를 부렸고, 주연배우였기에 제작사는 약간의 비용을 지급했다. 허점투성이 영화였지만 결과는 예상을 깨고 흥행에 성공했다. 무대인사에서 관객의 뜨거운 환호를 받은 A씨는 고무돼 그 뒤로는 초청료 없이 무대인사에 적극 참여했다. 영화와 불화를 거듭하던 A씨는 끝내 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제 충무로가 주목하는 몇몇 조연 배우를 살펴보자.

    김병옥(46)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어디까지 악독해지고 비겁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본 같다. 김병옥은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경호원 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팬에게 얼굴을 알렸다. 절대적인 무술 실력을 갖춘 차가운 남자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고정된 캐릭터를 구축한 상태는 아니었다.

    악역 전문, 손병호 대 김병옥

    그런 그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얘기를 듣는 비열한 전도사의 외피를 걸쳐 입더니, ‘짝패’에서 어수룩한 청년회장으로 비굴하고 이기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해바라기’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살인을 사주하는 시의원 조판석을 연기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죄를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던가”라며 태연하게 상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장면은 관객에게 치를 떨게 했다. ‘잔혹한 출근’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로 변해 가난한 사람의 고혈을 빨아대는 인물로 진화했다.

    김병옥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자신을 인간의 가장 어두운 단계로 끌어내린다. 누가 이토록 소름 끼치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악역을 너끈히 소화하는 역량 덕에 그는 2006년 무려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비중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의 존재가치는 확실히 빛났다.

    극단 목화 단원으로 출발해 23년간 연극판에서 활동해온 중견 연기자인 그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까지 함께 작업하며 ‘박찬욱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김병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어둡고 음습한 악역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새로 들어가는 세 작품이 모두 공포영화 혹은 호러 장르인데, 강인한 성격에 악한의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다. 그는 지난 2월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잘나가는 조연들 세계에서 매니지먼트 계약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김병옥에 앞서 이미 스크린에서 악역 전문 조연으로 자리를 굳힌 배우는 손병호(45)다. 김병옥과 같은 극단 목화 출신인 그는 영화 ‘파이란’에서 삼류깡패 보스 용식을 맡아 최민식을 압도하는 연기력을 보여줘 주목받았다.

    잔인하면서도 오만하고 그러면서 비굴한 삼류 보스 캐릭터를 맞춤양복처럼 소화해낸 그는 ‘오아시스’에서 주연인 문소리의 비정한 오빠로 출연해 “나 나쁜놈이다!”라고 외쳤고, ‘효자동 이발소’에서는 경호실장 역으로 출연해 송강호에게 리얼하게 ‘조인트’를 매기며,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오만함을 드러냈다. ‘야수’의 보스 유강진 역은 그의 악역 연기에 있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형사와 검사를 농락하면서 절제된 잔인함을 보인 암흑가 보스 유강진은 손병호가 아니라면 어색했을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는 욕을 주워섬기거나 잔인한 칼질을 하는 악역이 아니다. 내면의 감춰진 악마적 본성을 슬쩍슬쩍 드러내는 악인이다. 손병호가 아니고는 보여줄 수 없는 흐릿한, 그러나 조소를 담은 썩소(썩은 미소)나 누구에게도 압도되지 않는 눈빛, 크지 않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기(氣)는 차라리 악의 승화처럼 보인다.

    “아무리 악한이라도 저이에겐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정당성을 주고 싶은 쪽이다. 삶을 해석하는 차이, 인간을 이해하는 차이가 인물을 바꾸고 연기를 바꾼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고 ‘정당성’을 얻으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악역 연기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극무대를 동경한다. 대학로 출신 대부분이 품고 있는 회귀본능이다.

    2006년 충무로의 발견, ‘타짜’ 김윤석

    아침 드라마 ‘있을 때 잘해!’로 김윤석은 아줌마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그리고 680만명이 본 ‘타짜’와 67만명이 든 ‘천하장사 마돈나’로 영화배우로 인정받았다.

    배우 김윤석을 말할 때 먼저 ‘송강호의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면 머지않아 송강호가 ‘김윤석의 친구’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연우무대와 극단76에서 길고 긴 혹한의 시기를 보낸 대학로 친구다. 인간적인 정은 물론이고 서로 연기까지 인정하는 친한 친구. 그러나 두 사람은 10년의 편차를 두고 스타가 됐다. 왜 그리 늦었냐고 물으면 김윤석은 “영화 쪽에서 써주지 않아서”라고 담백한 대답을 날린다.

    그의 첫 출연작은 ‘베사메무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단역이었다. 그나마 얼굴을 알린 것은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에서 천호진과 함께 형사로 출연하면서다. 그후 ‘시실리 2km’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파랑주의보’에 연속 출연했지만 그저 그런 조연에 불과했다. 드라마 ‘부활’을 통해 확실한 신고식을 했지만 영화에서는 여전히 미완의 조연이던 그가 2006년 드디어 일을 냈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그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가드 올려!”를 수시로 외치며 아들 동구를 녹다운시켜버리는 구제불능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관객은 고작 67만으로 저조했지만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된 웰메이드 작품이다. 김윤석은 그 영화를 통해 연기 잘하는 것이 어떤 건지를 보여줬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비해 10배나 장사를 잘한 ‘타짜’에서도 그는 강렬했다. 출연하는 장면은 후반부 몇 신에 불과하지만, 악의 총집합체 같은 ‘아귀’ 역으로 김윤석이라는 이름을 관객의 뇌리에 음각해놓았다. “복수는 무슨 복수…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아닌데, 회칼로 배를 쑤시든 망치로 대가리를 쪼개든 고깃값 번다 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뱉어낼 때는 정말 ‘이보다 더 악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멜로 연기를 기다리는 김윤석은 고정화된 개성을 거부한다. 봉구 아버지나 아귀 같은 배역은 다시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한번 해본 연기는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다는 고집 때문이다. 1년에 몇 편씩 출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조연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계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한다. 조연이라는 역할보다는 연기자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의 자세라고 할까.

    의리파 이병준

    이병준이라는 이름은 아직 낯설다. 드라마와 영화 몇 편에 출연했지만 아직 그 이름을 알리기에는 배역의 비중이나 흥행 성적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최근작 ‘복면달호’의 나태송이 그나마 이름보다 더 알려졌다. 차태현과 트로트 대결을 펼치는 나태송(나훈아+태진아+송대관의 첫 자를 딴 이름)은 개성이 철철 넘치는 인물이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진다고 하는데, ‘복면달호’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배우 인생이 달라졌다. 관객이 많이 들어서인지 확실히 알아보는 팬도 많고, 음식점 같은 곳에 가면 수군거리는 통에 영 거북하다. 물론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다.”

    이병준은 백제예술대학 뮤지컬학과 교수다. 1년에 몇 편씩 뮤지컬에 출연하는 무대 위의 배우이며, 국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기도 하다. 성악을 전공한 뒤 1987년 세종문화회관 서울시 뮤지컬단 소속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의 첫 출연 영화는 박종원 감독의 1995년작 ‘영원한 제국’의 무관내시 역이었다. 대사 한 마디 없는 출연이었지만 그는 오래도록 그날을 기억한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에도 출연했지만 영화 크레디트에 이름 한 줄 올린 것이 고작인 단역 배우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원신연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구타유발자들’에서 비중 있는 배역을 맡은 것이다. 나이 어린 제자를 어떻게 해보려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이며 폭력의 공포를 경험하는 음대 교수 영선이라는 캐릭터.

    “‘구타유발자들’은 내게 영화의 길을 열어준 작품이다. 내가 곰으로 출연한 뮤지컬 ‘정글북’을 본 원신연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내왔기에 앞뒤 안 재고 출연을 결정했다. ‘구타유발자들’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관계자들 사이에 이병준이라는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한석규, 이문식, 오달수 등 쟁쟁한 배우와 연기한 것도 내겐 더 없는 행운이었다.”

    그에겐 은인이나 다름없는 원신연 감독에게 그는 언제까지든 의리를 지키고 싶어한다. ‘구타유발자들’ 덕분에 그는 ‘복면달호’의 나태송으로 환생했고, 영화는 죽어도 배우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복면달호’를 촬영하며 소속사(세도나)에 몸담았다. 홀로 매니지먼트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역할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어려움도 해소하고 이런저런 도움을 받다보면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복면달호’가 성공하면서 러브콜이 잦아져 소속사 역할이 커졌다.

    “이제 영화 두 편 했다. 내가 떴다고 할 수도 없고, 특급 조연도 아니다. 영화로 인정을 받아 더 나은 배우로 성장하는 것은 지금부터다. 바빠지면서 7년 동안 일한 EBS를 떠났다. 트로트 가수의 꿈도 이루기 위해 음반을 준비 중이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 무슨 트로트 가수냐 하는데, 트로트는 정말 좋은 음악이다. 또한 나의 영원한 고향인 뮤지컬 무대를 지키기 위해 1년에 최소 한 편 이상의 뮤지컬에 출연할 생각이다.”

    “우리 아빠는 아무거나 다 해”

    그는 몹시 의욕적이다. 스스로 ‘쌈마이’ 기질이 있다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끼’가 있다는 얘기다. 그를 출세시킨 ‘복면달호’의 제작자 이경규와는 자주 안부전화를 하는 사이다. 나태송 캐스팅 과정에서 ‘구타유발자’를 본 이경규가 이병준을 직접 지목하면서 맺은 인연이다. 영화를 찍은 뒤에 안 사실이지만, 이경규의 딸과 이병준의 딸이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라는 점도 둘 사이를 가깝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하루는 이경규 대표의 딸 예림이가 내 딸에게 ‘니네 아빠는 뭐하니?’ 하고 물었는데, 내 딸이 ‘우리 아빠는 아무거나 다 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마음은 딸의 말처럼 어떤 작품이든 다 하고 싶다. 물론 배역을 맡으면 캐릭터를 분석하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끊임없이 탐구할 것이다. 조연은 그런 존재여야 하니까.”

    무엇이든 다 하겠다지만 그는 이미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출연제의가 들어온 작품만도 6, 7편이다. 살인마이거나 느끼한 조폭 두목 등으로 캐릭터의 유형이 고만고만하다.

    ‘구타유발자들’에서 겉모습은 조폭 같고, 속은 나약하고, 풍기는 분위기는 느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속사가 생겨 출연도 맘대로 할 수는 없다. 이젠 출연료나 배역에 따라 작품을 골라야 한다. 그것이 지명도 높아진 조연이 겪는 과정이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개런티가 좀 많아졌다고,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폼 잡는다면 배우가 아니다. 언제나 첫 출연 때처럼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연구해 어떤 역을 맡겨도 믿을 수 있는 배우라고 인정받고 싶다. 조연은 주인공을 빛낼 때 빛나는 존재다. 나는 조연인 것이 좋고 바쁜 스케줄 속에 뛰어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 아무리 바빠도 즐기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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