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죽여라” “살려라”… 장안을 달군 시골아낙 재판 소동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04-11 1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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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함경도 시골마을의 한 아낙이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의 결과는 사형. 그러나 재판정에 나온 피고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사람들은 재판장에게 투서를 날리며 무죄를 호소한다. 진술 번복으로 재개된 2심 공판을 둘러싼 종로 일대의 대혼잡, 오로지 미인이기에 집중됐던 각계각층의 뜨거운 관심. 과연 그는 남편을 죽였을까.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동아일보’ 1925년 10월23일자에 실린 재판 당시의 김정필. 큰 사진은 ‘삼천리’ 1930년 5월호에 실린 ‘법정에 선 독살미인 김정필‘ 기사.

    1924년 10월10일, 종로 거리에는 늦가을 새벽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었다. 새벽잠을 설친 사람들은 말 못할 비밀이나 간직한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에 가는 것도, 회사나 공장으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 종로에 출현한 군중은 마법에 걸린 듯 일제히 경성복심법원 정문을 통과해 굳게 닫힌 제7호 법정 앞에 줄지어 늘어섰다.

    개정을 한 시간 앞둔 8시30분, 법원 청사 앞에는 이미 500~600명의 군중이 운집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제7호 법정이 수용할 수 있는 방청객은 고작 60여 명. 열에 아홉은 몇 시간씩 기다린 보람도 없이 씁쓸히 발길을 돌려야 할 처지였다. 사람에 치여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자 법원 마당에 모인 군중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여보시오. 나는 조반도 거르고 7시부터 줄을 섰다오.”

    “예끼 이 사람, 겨우 7시에 온 걸 가지고 웬 생색이우. 나는 5시에 나왔다오.”

    “나는 상점문도 걸어 잠그고 왔소.”



    “끼여 죽겠소. 그만 미시오.”

    장안을 뒤집어놓은 촌색시

    개정 시각이 가까워오자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법원 부근에만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서른 명씩, 마흔 명씩 떼 지어 몰려온 군중은 제지하는 순사들을 밀치고 제7호 법정 앞 입장 대기행렬에 더덕더덕 엉겨 붙었다.

    밀어라 당겨라 비벼라 들어가자 애걔걔 죽겠네 여보 가만있소 소리를 지르며 엉겼다 무너지고 무너졌다 들러붙어 이리밀리고 저리 밀리기를 약 한 시간 반. 그 중에 가관이라 할지 무어라 할지 복판에 끼인 사람 중에는 불시로 키가 자라서 우뚝우뚝 솟아오른다. 나오려니 헤치고 나갈 수 없어 야단. 숨이 막혀 야단. 가슴이 결려 야단. 옷고름이 떨어졌네. 모자가 도망갔네. 발등을 밟네. 허방에 빠졌네. 별별 현상 갖은 일이 다 일어났다. (‘본부독살 미인공판 방청객 수기’, ‘동아일보’ 1924년 10월20일자)


    꼭두새벽부터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인파는,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경성복심법원 재개 공판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었다. 쥐약으로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스무 살 촌색시 김정필이 그처럼 거대한 인파를 한 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그날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명은 3·1운동 이후 종로에 운집한 최대의 인파였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경관 수십 명이 출동하여 법원 정문과 법정 문 앞에 몇 사람씩 파수를 세우고 장내 장외에 모여든 수천의 군중을 해산시키기에 노력했다. 장내에 쇄도했던 군중은 두어 시간의 사투 끝에 어느 정도 해산시켰으나 장외 즉 종로 일대에 쇄도했던 군중은 좀처럼 해산이 되지 않았다. 경관에게 쫓겨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오후 두 시까지 의연히 재판소문을 바라보며 모여 있었다. 법정 앞 담에는 수십 명의 기생이 매달려서 춘삼월에 고운 꽃이 핀 산 언덕과 흡사했다. (‘종로 일대 인산인해’, ‘조선일보’ 1924년 10월11일자)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경성복심법원. 1928년 서소문 신축청사(현 서울시립박물관)로 이전한 이후에는 종로경찰서로 사용되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인파를 제지하느라 공판은 예정보다 1시간20분이나 지연된 10시50분에야 개정됐다. 입장이 허가된 6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2000여 명은 공판이 시작된 이후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법원 주위를 배회했다. 차도까지 뒤덮은 인파로 인해 종로거리는 하루 종일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 인파에 막혀 법원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김정필 공판’을 제외한 모든 민형사 재판이 취소되는 사태까지 연출됐다. 시내 각 신문사는 장문의 보도기사를 싣는 것으로도 모자라 앞 다투어 방청객 수기를 게재했다.

    ‘김정필 공판’이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일보’에 실린 방청객의 수기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명천 태생으로 본부(本夫)를 독살했다는 김정필은 뜻밖에 온 도시의 인기를 끌었나니 절세미인이란 방자(芳姿·꽃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접하려고 몰려드는 군중은 그야말로 천으로 헤아리고 만으로 헤아렸으되 방청석이 좁은 까닭으로 헛되이 뒤통수를 치며 돌아선 이가 많았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을 목도한 것을 기회 삼아 글로나마 그녀의 모양을 그리는 것도 헛일이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바이다.

    간수에 끌려 그녀는 가만가만히 들어온다. 끓는 듯한 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건만 원수 같은 용수 때문에 그녀의 화용(花容)을 알아볼 수 없다. 그녀는 키가 헌칠했다. 나는 눈을 밑으로 향해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모든 미(美)를 다 담은 듯 어여쁘고 맵시 있는 발이었다. 포동포동하게 살진 발등은 생글생글 웃는 듯했다.

    이 발로 말미암아 얼마만큼 황홀했을 적에 피고인석에 앉은 그녀는 용수를 벗었다. 첫째의 경이(驚異)는 살결이 흰 것이었다. 참으로 희다. 희다 못해서 금강석같이 눈부시다. 감옥에서 햇빛을 못 본 탓으로 음기의 작용이 없지 않았을 것이로되 대관절 이 세상을 뛰어넘은 흰빛이다. 천국의 백색이 아니면 분명히 지옥의 백색이다.

    이렇듯이 흰 바탕으로 된 그녀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얼굴형이 조금 길고 이마가 조금 좁은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맞게 오뚝한 코는 참으로 귀골이고 이지적이었다. 비록 여위고 말랐을망정 귀밑에서 턱으로 보드랍게 가냘프게 스친 곡선! 입신(入神)의 화필로도 이 선만은 긋지 못하리라. 그렇다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림같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은 아니다. 어딘지 날카롭다. 그중에도 큼직한 그 눈! 어쩌면 저렇듯 청결 무구하랴. 어쩌면 저렇듯 복잡다단하랴. 어찌 보면 단순한 빛이요. 어찌 보면 오색이 영롱하다. (‘김정필의 초상’, ‘시대일보’ 1924년 10월13일자)


    함경도 두메마을에서 발생한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이 종로의 교통을 마비시킬 만큼 장안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얼마나 미인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호기심 반, 미인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 없다는 동정심 반으로 사람들은 재판이 열리는 종로로 꾸역꾸역 몰려든 것이었다.

    요절한 신랑

    김정필은 1905년 함경북도 명천군 궁벽한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 김경열의 오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여자는 공부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습까지 남아 있어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일본어는 물론 한글조차 읽고 쓸 수 없는 평범한 구여성이었다.

    1924년 김정필이 스무 살이 되자 부친은 혼기가 꽉 찬 맏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신랑감을 물색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김정필은 소문난 미인이어서 신랑감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김경열은 오촌당숙이 중매해준 김호철에게 맏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사람도 똑똑하고 집안에 재산도 있다 하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924년 4월27일, 김정필은 세 살 연하의 김호철과 혼례를 치렀다. 구식혼례다 보니 신부 김정필은 물론 장인 김경열조차 혼인식 당일에야 신랑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호철의 첫인상은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핼쑥한 것이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혼례를 치른 김정필은 친정에서 80리 떨어진 김호철의 집으로 가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그 직후 김정필은 10여 일 동안 시댁 일가 친척집을 돌며 혼인인사를 드렸다.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1924년 10월10일 김정필 공판을 방청하기 위해 경성복심법원 앞에 모여든 이들은 3·1운동 이후 종로에 운집한 최대의 인파였다. ‘조선일보’ 1924년 10월11일자.

    시집간 지 보름 남짓 지난 5월9일, 김정필은 시어머니가 흰 약으로 쥐를 잡는 것을 보았다. 시집가기 전 김정필은 집에 쥐가 많아 골머리를 앓았다. 눈이 번쩍 뜨인 김정필은 동네청년에게 흰 약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청년은 흰 약이 ‘랏도링(황린·黃燐)’이란 쥐약인데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무서운 독약이라 알려주었다. 이튿날 김정필은 읍내에 가는 시댁 칠촌아주머니에게 부탁해 랏도링 30전어치를 사다가 헝겊으로 싸두었다.

    결혼한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인 5월23일, 김호철은 심한 구토를 하며 앓아 누었다. 5월29일,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들 병세에 차도가 없자 모친 최씨는 도대체 무얼 먹고 그 지경이 됐느냐고 물어보았다. 김호철은 그때서야 아내가 준 주먹밥과 엿을 먹은 후부터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모친 최씨는 며느리가 아들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주재소에 고발했다.

    사건을 접수한 주재소 순사는 김정필을 체포하는 한편, 의사 최승하를 불러 죽어가는 김호철을 진찰하게 했다. 최승하가 진찰해보니 김호철의 피부는 누렇게 변색되었고 입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토사물과 대변에서도 입에서와 똑같은 악취가 났다. 황린 성분이 든 독약을 마셨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세였다. 독약을 마신 지 4, 5일은 지난 것처럼 보였다.

    독 기운이 이미 온몸에 퍼질 대로 퍼진 상태여서 의사로서도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었다. 김호철은 심한 통증에 시달리다 이튿날인 오후 4시에 사망했다. 결혼한 지 겨우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사망 직후 부검해보니 입과 코에서 암갈색 진물이 흘러내렸고, 창자와 간장은 적갈색으로 변색된 상태였다. 부검을 담당한 최승하는 ‘황린에 의한 독살’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정필은 명천경찰서에 유치돼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수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를 내밀자 김정필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김정필의 숨겨진 과거와 범행 동기도 속속들이 밝혀졌다.

    김정필은 금년 4월에 지명동에 사는 김호철에게 시집을 갔는데 원래 품행이 단정치 못하여 시집오기 전 자기와 십이촌 되는 같은 마을 김옥산과 수삼차 정을 통한 일까지 있었다. 항상 자기 남편 김호철이 얼굴이 곱지 못하고 무식하며 성질이 우둔한 것을 크게 비관하여 일종의 번민을 느껴 오던 중 남편을 없애고 다른 이상적 남편과 살아보려고 주야로 생각했다. 금년 5월9일 우연히 동리 청년들의 이야기하는 소리 중에 랏도링이라는 쥐 잡는 약이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는 독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서운 생각을 품고 그 이튿날 동리 사람을 시켜 그 약을 사두었다.

    23일 주먹밥과 엿에다 그 랏도링을 섞어 놓고 남편을 정답게 불러가지고 하는 말이 “그대가 항상 앓고 있는 위병과 임질을 고치려면 이 약을 먹으라. 이 약은 나의 오촌이 먹고 신기하게 나은 것이니 안심하고 먹어도 좋은 것이라” 하여 주먹밥을 먹였는데 그것을 먹은 남편이 구역질을 하며 토하자 다시 엿을 먹으라 하여 그 엿까지 먹여 드디어 금년 5월 30일에 사망케 하였다. (‘본부독살미인 사형불복’ ‘동아일보’ 1924년 7월17일자)


    김정필의 자백으로 수사는 탄력을 받았다. 경찰 조사, 검찰 조사, 예심을 거쳐 1심 판결에 이르기까지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청진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 김정필은 6월26일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함경북도 명천에서 벌어진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은 조용히 종결될 것만 같았다.

    고조되는 관심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김정필은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1924년 7월, 사건은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다. 사건은 그때야 비로소 신문지상에 보도됐다. ‘동아일보’ 1924년 7월17일자에 보도된 한 단짜리 기사는 뜻밖에도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방년 스물의 꽃 같은 미인이 자기 남편을 독살하고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이 작일에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다”는 기사 도입부의 한 문장 때문이었다. 김정필이 1심 재판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 상태였기에 2심에서 재판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절세미인의 목숨이 걸린 항소심 공판은 개정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요시다 재판장에게 김정필의 무고함을 항변한 방청객의 투서. ‘동아일보’ 1924년 9월8일자.

    공판은 8월15일 오전 10시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에서 개정했다. 삼복더위가 한창이었음에도 방청석은 미인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방청객들로 가득 찼다. 요시다(吉田) 재판장은 주소, 성명, 직업, 연령을 차례로 묻고 곧바로 피고인 신문에 들어갔다.

    “피고인은 결혼 전 이웃에 사는 십이촌 김옥산과 수삼차 통정한 사실이 있는가?”

    “김옥산과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나 강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초췌한 얼굴의 김정필이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힘없이 답했다.

    “피고인은 남편 김호철이가 일자무식이요 성질이 어리석고 얼굴이 못생긴 것을 싫어해 남편과 한 차례도 부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지?”

    “제 남편이 무식하기는 했지만 사람은 좋았습니다. 결혼한 지 닷새 만에 남편의 국부에서 고름이 났습니다. 그전까지 다섯 번 정도 부부관계를 가졌습니다.”

    “피고인은 금년 5월23일에 랏도링이라는 쥐 잡는 약을 엿과 밥에 섞어 먹여 남편을 죽인 일이 있지?”

    “쥐 잡는 약을 사서 헝겊에 싸두기는 했지만, 남편에게 먹인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김정필은 1심에서의 공술을 번복하고 범죄 사실을 부인했다. 의외의 답변에 당황한 재판장이 되물었다.

    “피고인은 경찰, 검찰, 예심은 물론 1심에서까지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느냐?”

    “경찰서에서 순사가 때리면서 없는 일이라도 그렇게 말하라고 하기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평소 임질과 위병을 앓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남편이 병으로 죽은 것을 애매하게 내가 죽인 것이라고 경찰에 고발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김정필은 눈물을 흘리며 거듭 결백을 항변했다.

    피고인 신문이 끝난 후 검사의 논고가 이어졌다. 후쿠다(福田) 검사는 피고인이 비록 범행을 부인했지만 범행을 입증할 확실한 물적 증거와 증언이 있고, 피고인 스스로가 경찰 조사에서 1심 재판까지 일관되게 범죄 사실을 인정했으므로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며 1심과 같이 사형을 구형했다. 관선 변호인 모리이(森井) 변호사는 피고인이 아직 젊고 계도의 여지가 있으니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의례적인 말로 변론을 마쳤다. 요시다 재판장은 일주일 후인 8월22일 판결하겠다며 폐정을 선언했다.

    투서한 동기

    간단히 끝날 것 같았던 2심 재판은 김정필의 부인으로 한층 흥미를 끌었다. 재판정에서 공개된 김정필의 미모는 대중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판결을 하루 앞둔 8월21일 오전에는 요시다 재판장과 모리이 변호사 앞으로 일본어로 씌어진 장문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한 방청인’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투서였다.

    저는 지난 15일 오전 복심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린 김정필의 공판 방청객으로 피고인의 답변을 경청했습니다. 당시 법정에서 느낀 그녀의 인상 때문인지 공술할 때의 그녀를 둘러싼 몽롱한 분위기 때문인지 집에 돌아와 지금까지 상상과 추측으로 밤낮없이 고민했습니다. 법률적 판별력이 부족한 저이지만 언제까지든지 의문에 싸여 지내느니보다는 차라리 이를 현명하신 귀하께 상세히 알림으로써 나의 마음에 위로를 삼고자 합니다… (‘방청자의 투서’, ‘동아일보’ 1924년 9월8일자)


    그러나 구구절절 김정필의 무고함을 항변한 투서의 내용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김정필의 법정진술을 어떻게든 끼워 맞춰보려고 애쓴 것일 뿐 논리적인 구석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제3자가 피고의 미모에 취해 재판부와 변호인에게 투서를 보낼 만큼 김정필의 재판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출소 후에도 김정필에 대한 관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삼천리’ 1935년 7월호의 ‘12년 만에 출옥한 김정필, 그는 다시 결혼하려는가’.

    8월22일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선고공판이 예정된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 앞에는 오전 8시부터 방청객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에는 방청객 숫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 종로경찰서에서 출동한 경관 6, 7명은 법정으로 밀려드는 방청객을 제지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김정필은 용수를 쓰고 467호 명패를 단 푸른 옷을 입고 다른 사건의 남자 피고인 10여 명과 함께 입장해 피고인석에 앉았다. 법정을 꽉 메운 60여 명 방청객의 시선은 김정필에게 집중되었다. 김정필이 용수를 벗자 방청석 곳곳에서는 탄식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천하일색이다!”

    오전 10시 요시다 재판장이 두 명의 배석 판사와 함께 입장했다. 다른 사건 두 건에 대한 판결이 있은 후 김정필의 차례가 돌아왔다. 판결을 앞둔 법정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김정필 본부 독살 사건은 더 조사할 필요가 있어 판결을 무기 연기한다.”

    김정필은 재판장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통역관의 설명을 들은 후 “저는 애매하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애원하며 자리에 앉았다. 선고 연기로 재판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정필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들끓는 동정여론

    선고 연기 이후 독살 미인 김정필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경찰 수사에 강압이 있었고 피고인에게 적대적인 시부모측 인물만 증인으로 채택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관선 변호인의 불성실한 변론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일본인 관선 변호인에게 사건을 맡길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자 대구 출신의 이인(李仁)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자청했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게 되는 이인은 당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지 1년밖에 안 된 혈기왕성한 소장 변호사였다. 이 변호사는 재판부에 공판 재개를 신청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이번 사건은 실로 중대한 사회 문제로 도저히 소홀히 처치할 문제가 아닙니다. 조선의 강제결혼이 낳은 이 비극을 우리는 도저히 방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공판 재개를 신청하고 증인신청을 하며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여 애매한 사람을 구하고자 합니다. 지난 23일에도 경성형무소에 가서 김정필이를 만나보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애매한 것을 말합디다.” (‘독살 미인 공판 재개 신청’, ‘동아일보’ 1924년 8월26일자)


    요시다 재판장은 이 변호사의 공판재개 신청을 받아들였다.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재개공판은 10월10일 오전 9시30분 개정하기로 결정됐다. 김정필의 친정아버지 김경열, 죽기 전 김호철을 진단한 의사 최승하, 김호철의 모친 최씨와 형 김영철 네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공판 일자가 다가오자 재판부와 언론사에는 투서가 답지했다. 심우섭이라고 실명을 밝힌 투서자는 자기는 8월15일 공판을 방청한 사람인데 통역관의 통역이 서툴러 피고인의 진술을 재판장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으니 이 점을 참작해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당부했다. 통역관의 부실한 통역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요시다 재판장은 조선 법조인을 대표하는 김병로 변호사를 경성복심법원 접견실로 불러 당부했다.

    “나도 조선말을 조금 알아서 피고인의 진술을 못 알아들을 리 없소. 통역관의 자질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거든 부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라고 말해주시오.”

    김정필을 동정하는 투서만 답지한 것이 아니었다. 공판을 열흘가량 앞두고 요시다 재판장 앞으로 60여 명이 연서한 진정서가 들어왔다.

    진정서에 연서한 60여 명은 모두 김정필의 시집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다. 진정서의 내용인즉 김정필은 본부를 독살한 천하의 독부로 그 죄가 가히 사형에 처해 마땅하니 재판장은 엄중히 처벌하여 달라는 것과 방청인들은 그 독부를 매우 동정하는 모양 같으나 결코 동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시다 재판장은 이러한 진정서는 수리할 수 없다 하여 이를 수리치 않았다. 진정서를 제출한 이면에는 어떠한 흑막이 있는지도 모르리라더라. (‘60명 연서 진정’, ‘동아일보’ 1924년 10월3일자)


    아니나다를까 명천 주민의 진정서가 들어온 다음날 요시다 재판장 앞으로 또 한 장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김정필이 사는 동리의 사정을 썩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투서자는 ‘명천 주민의 진정서는 김정필의 시부모가 뒤에서 운동하여 60여 명의 연명을 받은 것이니 재판장은 그리 알고 김정필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줄 것’을 호소했다. 언론 역시 진정서를 제출한 명천 주민을 거세게 질타했다.

    진정서를 보낸 60여 명 인사의 심사를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그들이 어여쁜 생명 하나를 기어이 죽여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만일 그 미인이 자기 남편을 독살한 것이 죽여 마땅한 죄악이라면 그 미인 하나를 죽이려는 60여 명의 죄는 또한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독약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또는 어떤 세력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이려는 것과 그 수단 방법은 비록 다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시비판단은 언제나 공정하게 돌아가는 법이다. 60여 명의 진정이 아니라도 그 미인에게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인데 오늘 60여 명이나 되는 이가 아까운 목숨이 끊어지기를 재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이 우리는 의심쩍은 동시에 또한 그들의 책임이 작지 않은 것을 우리는 단언한다. (‘본부 독살 사건에 대하여’, ‘시대일보’1924년 10월4일자)


    살인사건 공판을 앞두고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피고인을 살려야 하느니 죽여야 하느니 투서전을 벌이는 것은 기현상이었다. 절세미인이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동정 여론은 엉뚱하게도 가련한 여인을 고발한 시부모에 대한 질타로 옮겨갔다.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두 차례의 공판을 거치면서 김정필은 부조리한 조선의 가족제도에 희생당한 가련한 희생양으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됐다. 함경북도 명천의 이름 없는 구여성 김정필은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부검의의 불리한 증언

    김정필 사건 공판이 재개된 1924년 10월10일에도 종로 거리는 공판을 구경 나온 인파로 하루 종일 몸살을 앓았다. 8월 공판 때보다 열 배나 불어난 거대한 인파였다. 종로경찰서에서 파견한 수십명의 경관이 인파를 해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인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용수를 쓴 채 호송차에서 내린 김정필은 군중이 다섯 겹 여섯 겹으로 에워싼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재판장이 출입하는 안문을 이용해 겨우 법정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친이 차입해준 깨끗한 옷을 입고 힘없는 걸음걸이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김정필이 안문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수천 명의 방청하러 온 사람 중에서 요행히 방청석에 들어온 60여 명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로 모였다. 용수를 벗고 나타난 얼굴은 옥중에 오래 있어 햇빛을 못 본 까닭인지 희던 중에도 더 희어서 비를 머금은 배꽃과 같았다.

    그런 가운데 문뜩 난데없는 처량한 곡소리가 났다. 증인으로 나온 죽은 김호철의 형 김영철은 법정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계수 김정필에게 달려가 폭행을 하려다가 경관에게 제지를 당했다. 시어머니 최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년, 꽃 같은 내 자식을 왜 죽였노. 이년. 죽일 년” 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욕설을 함부로 내뱉다가 결국 퇴장을 당했다. (‘처량한 곡성’, ‘시대일보’ 1924년 10월11일자)


    10시50분 최씨의 퇴장으로 법정 소란이 진정되자 요시다 재판장과 후지무라, 가와시마 배석판사, 후쿠다 검사, 이인, 모리이 변호사가 차례로 입장해 자리에 앉았다. 요시다 재판장은 개정을 선언하고 증인 신문에 들어갔다. 김호철을 마지막으로 진단하고 부검한 의사 최승하가 첫 번째 증인으로 증언대에 올랐다.

    “증인은 김호철이 죽기 전 진단한 일이 있는가?”

    “올해 5월29일에 주재소의 부름을 받아 김호철을 진찰했습니다. 피부 빛이 누렇게 변했고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것이 음독한 지 4, 5일은 돼 보였습니다. 너무 늦게 진찰한 까닭에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못했습니다. 김호철은 다음날 오후 4시경 사망했습니다.”

    “부검도 증인이 맡았다지?”

    “사망 직후 시신을 살펴보니 입과 코에서 암갈색 진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부검해보니 창자와 간장은 적갈색으로 변색돼 있었습니다. 황린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 증세라서 독살이라 판단했습니다.”

    “김호철이 황린 성분이 든 쥐약을 먹었다면 어째서 곧장 죽지 않았나?”

    “황린은 먹더라도 즉시 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지방에 용해되어 4, 5일 후, 늦으면 일주일 후에 죽습니다.”

    “김호철에게 매독과 임질이 있었나?”

    “화류병이나 다른 질병은 없었고, 체격도 좋았습니다.”

    “김호철이 살아 있을 때 증인에게 독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던가?”

    “예. 그가 말하길 자기는 4월27일에 결혼했는데 한방에서 같이 자기는 했으되, 매양 아내가 싫어해서 자기는 아랫목에 자고 아내는 윗목에서 자서 결혼 후 한 번도 부부관계를 가진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약을 먹이던 날 밤 항상 냉정하던 아내가 방에 들어와서 잠든 자기를 깨우며 다정한 태도로 무슨 병이 없느냐고 묻기에 자기는 아무 병도 없다고 말했더니, 아내는 자꾸 무슨 작은 병이라도 있으면 말하라고 했답니다.

    하는 수 없이 어떨 때엔 오줌을 누면 방울방울 떨어진다고 했더니 아내의 말이 이것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 하여 환약 같은 것 세 알을 주었답니다. 두 알을 먹었더니 냄새가 고약하기에 한 알을 안 먹고 뒤뜰에 파묻었다고 했습니다. 아내에게 속아 이 지경이 됐다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뒤뜰에서 환약이 발견되었나?”

    “김호철의 모친 최씨가 뒤뜰에서 파온 것이라며 가져온 환약을 살펴보니 황린이 분명했습니다.”

    재판장의 신문이 끝나자 이인 변호사가 추가 신문에 나섰다.

    “진단서를 보니 의사의 의견이 별로 없고 의학 교과서에 적힌 대로여서 베껴 쓴 것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김호철이 황린을 먹은 것이 확실합니까?”

    “김호철의 증상이 황린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일치했습니다.”

    “명천 같은 시골에 대소변이나 독약 같은 것을 분석할 기구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분석했습니까?”

    “꼭 성분 분석이 아니더라도 빛깔과 냄새, 복용 후의 증상 등으로 황린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풍설에 김호철의 집과 증인 사이에 양해가 있었다는데 혹시 여비조로 얼마간 돈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최승하의 증언이 끝나자 통역관이 김정필에게 통역해주었다. 통역이 끝난 후 재판장은 김정필에게 다른 의견이 없는지 물었다.

    “저는 남편에게 환약을 준 일이 없습니다. 친정에 쥐가 많아 시댁 칠촌아주머니께 부탁해 쥐 잡는 약 30전어치를 사다가 헝겊에 싼 일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죽기 전에 다른 병이 없었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시집온 지 닷새째 되던 날부터 남편은 국부에서 고름이 나며 앓아 누웠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소뼈다귀 같은 것을 달여 먹인 일까지 있습니다. 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남편의 병을 간호했습니다.”

    재판장에게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한 김정필은 최승하를 쏘아보며 “죽어가는 남편이 나를 보고 ‘나는 내 병으로 죽지 너로 해서 죽는 게 아니’라고 한 말을 왜 하지 않느냐”고 외쳤다.

    엇갈린 진술

    최승하의 신문을 마친 후 재판장은 김정필의 부친 김경열을 증언대에 세워 신문에 들어갔다.

    “증인의 집에는 쥐가 많나?”

    “쥐가 많아 여러 가지로 처치할 궁리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피고인에게 쥐약을 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가?”

    “딸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은 없습니다.”

    “피고인이 결혼한 이후 친정에 다녀간 일이 있는가?”

    “사돈집과 거리가 80리나 돼서 1년에 한 번이라도 다녀가기가 곤란합니다.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돼 사위가 죽어서 한 번도 다녀가지 못했습니다.”

    “시집간 후 피고인 소식은 들은 적이 있는가?”

    “시어머니가 못살게 군다는 말은 건네 들었습니다.”

    “시집가기 전 피고인이 김옥산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전혀 몰랐습니다.”

    김경열의 신문을 끝낸 재판장은 김호철의 형 김영철을 신문했다.

    “증인의 동생 김호철은 죽기 전 임질을 앓았나?”

    “제 동생은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김호철은 죽기 전 증인에게 어떤 말을 남겼나?”

    “김정필이 자신에게 약을 주었으며 약을 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김정필 때문에 죽는 것이니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증인이 피고인을 주재소에 고발했나?”

    “동생의 말을 듣고 김정필을 붙잡아다 묶어두고 주재소에 고발했습니다.”

    김영철의 증언이 있은 후 재판장은 피고인을 일으켜 세워 다른 의견이 없는지 물었다. 김정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울먹이며 말했다.

    “스무 살에 과부 된 것도 원통한데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새파란 하늘이 무서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김영철의 신문을 끝낸 후 재판장은 퇴장시킨 김호철의 모친 최씨를 불러와 증언대에 세웠다. 재판장은 의례적인 사실확인으로 신문에 들어갔다.

    “피고인이 김호철의 아내인가?”

    “무슨 그까짓 년을 아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김호철이 죽기 전 무슨 말을 남겼나?”

    “아들이 죽기 전날 김정필이 죽을 약을 주어 이렇게 죽으니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땅에 파묻었던 환약을 파다가 주기에 냄새를 맡아 보았더니 성냥에서 나는 유황 냄새가 나서 의사 최승하에게 보여줬습니다.”

    “증인의 집에 쥐가 많았나?”

    “고양이는 많지만 쥐는 없었습니다.”

    “김호철에게 약을 먹인 적이 있는가?”

    “소뼈를 달여 먹인 일이 있습니다.”

    오전 10시50분에 시작된 증인신문은 오후 2시에야 끝이 났다. 심문을 마친 재판장은 한 시간 휴정을 선언했다. 새벽부터 법정에 나온 방청객들은 혹시라도 법정 문을 나섰다가 못 돌아올까봐 점심도 거르고 자리를 지켰다. 종로거리의 인파는 교통순사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재판이 끝날 때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오후 3시 요시다 재판장은 개정을 선언했다. 개정 직후 이인 변호사는 총독부병원 의관이 김호철의 사체를 재부검할 것을 요청하고, 증인 신문이 불충분했다며 주재소 주임 다케다 경부보, 김영철의 처 최씨, 김정필의 모친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요시다 재판장은 변호인의 요청을 모두 각하하고 곧장 논고로 넘어갔다. 후쿠다 검사는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피고인의 유죄가 명백해졌고, 피고인은 범죄사실을 부인으로 일관할 뿐 반성하지 않으므로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장이 최후변론을 요청하자 모리이 변호사는 피고인의 범죄는 강제결혼의 폐단으로 생긴 것이니 죄가 있다 해도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변론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이인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원고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스무 살에 무기징역

    “원고는 이면 사정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기록에 나타난 것과 증인의 공술만 믿고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피고인은 시집에 와서 10여 일이나 시집 일가를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여가가 없었습니다. 김호철이 약을 먹다가 남긴 것을 이튿날 흙 속에 묻었다는 것과 약을 먹은 지 여드레 만에 죽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거짓임이 분명합니다. 청진지방법원에서 피고인이 ‘잘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남편을 죽여서 잘못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옛 도덕에 남편 잃은 여자가 흔히 하는 말을 한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증거가 모두 불충분하니 무죄를 선고해 마땅합니다.

    만일 김호철을 독살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형은 부당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사형을 폐지하는 이때에 홀로 일본과 몇몇 나라에만 아직 이런 악형이 남아 있는 것은 최근 형사정책의 추세에 위반되는 것이니 사형을 경감해주시기 바랍니다.” (‘재개된 독살 미인 공판 속보’, ‘동아일보’ 1924년 10월12일자)


    최후변론이 끝나자 요시다 재판장은 김정필을 일으켜 세우고 “재판소에서 조사한 바도 피고인에게 불리하고 증인들의 증언도 피고인에게 불리하나 변호사들은 피고인이 남편을 죽였을 리 없으며 죽였다 하더라도 사형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고, 피고인 자신도 청진에서 자백한 일이 있으니 남편을 죽였으면 지금이라도 자백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자백을 권유했다.

    김정필은 울먹이며 “남편 죽어서 과부된 것도 원통한데 남편을 죽였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었으니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밝혀진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최후변론이 모두 끝난 후 요시다 재판장은 후일 선고하겠다며 선고일자를 확정하지 않은 채 폐정을 선언했다.

    김정필에게 불리하게 공판이 끝났지만 김정필에 대한 동정여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김정필 같은 미인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도 없지만, 설령 살인을 저질렀다 해도 환경 탓이지 김정필의 잘못이 아니라고 믿었다.

    선고공판은 예정일자를 미리 발표하면 재개공판 때처럼 법정 주변에 대혼란이 야기될까 봐 일반인에게 공지하지 않은 채 10월22일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렸다. 숨기다시피 개정한 공판이었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좁은 법정에는 빈 자리가 없었고, 법정 밖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재판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른 사건에 대한 심리가 끝나자 요시다 재판장이 들어왔다. 판결을 언도하겠다고 말한 재판장은 “피고인에 대해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해 역시 본부를 독살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한다”고 말한 후 잠시 말을 끊었다. 피고인이나 방청객들이나 모두 그러면 결국 사형이 되나보다 여기고 법정 안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은 다시 입을 열어 “원래 이 사건은 일심 판결대로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피고인의 나이 아직 어리고 여러 가지 사정을 보아서 달리 처벌할 필요가 있어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언도했다. 방청객들의 긴장한 얼굴은 일시에 피었는데 김정필은 무기징역이 무엇인지 자세히 몰라 통역관이 “무기징역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징역을 사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니 피고인은 “어째 재판을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말했다. 재판장이 “그 말은 여기서 할 것이 아니라 불복할 것 같으면 상고를 하라”고 하니 김정필은 “제가 너무 억울해서 상고하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왔다. 김정필은 법정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성통곡을 하여 방청객들이 모두 그를 쫓아가는 등 일시 대혼잡을 이루었다. (‘김정필은 무기징역’, ‘조선일보’ 1924년 10월23일자)


    2심 판결 직후 김정필은 주저 없이 상고하겠다고 말했지만, 상고 기간인 닷새가 지나도록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았다. 후쿠다 검사도 상고를 포기해 1924년 10월27일부로 김정필의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상고 포기로 법정재판은 끝났지만, 여론재판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김정필의 형이 확정된 이후에도 요시다 재판장 앞으로 재판 결과에 항의하는 투서가 여러 통 날아들었다. 가히 ‘김정필 신드롬’이라 할 만큼 대단한 관심이었다. 경성복심법원 직원이 “판결을 받은 후까지 이처럼 말썽 많은 사건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시골 여관의 가난한 하녀

    독살 미녀 김정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무기징역이 확정된 이후에도 식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5년 1월1일자 ‘재감(在監) 동포 특집’을 필두로, ‘동아일보’ 1925년 10월23일자 ‘보고 싶은 사진 : 김정필’, ‘시대일보’ 1926년 1월1일자 ‘철창생활 특집’, ‘조선일보’ 1927년 2월9일자 ‘문제의 미인 수인 김정필 감형’, ‘조선일보’ 1928년 1월7일자 ‘일시 소문 높던 여성의 최근 소식 : 남편 죽인 독살 미인 김정필’, ‘삼천리’ 1930년 5월호 ‘법정에 선 독살 미인 김정필’, ‘삼천리’ 1933년 10월호 ‘미인 독살 김정필의 옥중 근황’, ‘삼천리’ 1935년 7월호 ‘12년 만에 출옥한 김정필, 그는 다시 결혼하려는가’ 등, 김정필의 수감생활은 지속적으로 신문 잡지에 보도됐다.

    최근 서대문형무소에서 여죄수로 복역 중이던 모 여사가 만기 출옥했는데 그이는 독살 미인으로 소문이 높은 김정필의 소식을 가지고 나왔다. 김정필이 남편을 독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이 1924년 가을이었으니 금년까지 10년 동안을 철창 아래 신음하고 있다. 무기징역이매 아직 언제나 나올는지 막연하다.

    그러나 중죄수의 종래의 예를 보건대 대개 품행이 방정하고 일을 부지런히 해 상장이나 타게 되면 나라에 무슨 은사나 특사가 있을 때 감형의 은전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사형이 무기도 되고 무기가 유기도 되어 12년의 중죄수가 11년도 되고 다시 7~8년도 되는 예가 적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살인한 중범이라도 무기징역만 받으면 대개 10년 이내로 나오는 예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필은 감옥 안에서 평판이 대단히 좋아서 벌써 상장을 3개나 받았다고 한다. (‘미인 독살 김정필의 옥중근황’, ‘삼천리’ 1933년 10월호)


    김정필은 수감생활 대부분을 바느질을 하며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기 바쁘게 공장에 나가서 해질녘까지 바느질로 기모노를 지었다. 김정필의 바느질 솜씨는 여죄수 중에 단연 최고여서 서울에 사는 일본인 상류가정의 기모노는 도맡아 지었다. 김정필은 성실하고 마음씨도 따뜻해 서대문형무소 여죄수 사이에서도 단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새로 수감되는 여죄수를 반가워해서 틈만 나면 찾아가 세상소식을 묻곤 했다. 옥중에서 한글을 깨치고 일본어까지 배웠다.

    1927년 은사칙령으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고, 1928년 은사로 15년, 1934년 은사로 13년으로 감형됐다. 이로써 김정필의 만기는 1936년 12월18일이 됐다. 만기를 1년8개월 앞둔 1935년 4월, 김정필은 서른두 살, 수감 1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김정필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세 번의 은사를 입어 12년 만에 출옥하여 고향인 함북 명천으로 돌아가 있다. 한때 그렇게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그는 출옥 뒤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시집갔는가. 혹은 중이 되었는가.

    삼천리사 명천지국 기자 K군은 최근 출옥 후의 김정필을 만났다. K군은 김정필과 같은 동리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김정필의 가정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김정필이 서울까지 올라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K군은 그곳 보통학교에 다니는 소학생이었다. 온 동리를 휩쓸던 소문에 가슴을 두근거리기 여러 번이었다.

    김정필은 출옥해 고향에 내려갔다가 곧 친정 부모 있는 곳을 떠나서 명천읍으로 가서 그곳 ‘송천여관’이란 여관집에서 하녀로 있다. 그는 제 마음대로 나다니지도 못하면서 오직 주인과 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녀로 일하고 있다. 그는 세상을 피하는 듯 이 송천여관에 묻혀 다른 사람과 거의 만나지 않는다. 여관집 하녀로 일하면서 한 달에 몇 푼 안 되는 적은 월급이나마 모으기에 힘쓴다. (‘12년 만에 출옥한 김정필’, ‘삼천리’ 1935년 7월호)


    미녀는 즐거워

    유죄가 확정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김정필이 남편을 독살했는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사건 당사자들 사이에 진술이 엇갈리고, 무엇보다도 독살한 동기가 불분명하다. 남편이 못생겨서 이상적인 남편에게 새로 시집가고자 남편을 독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김정필이 거센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킨 것은 박해나 억울함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당시 본부 독살 사건은 이야깃거리조차 될 수 없을 만큼 흔하디흔한 사건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일부 신여성을 제외하면 조선 여성 모두가 강제결혼으로 희생당한 가련한 여인이었다. 당시 본부 독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다른 모든 여성도 어느 정도는 강제결혼의 희생자였고,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그마한 동정여론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남편을 독살한 무기수 김정필이 1920~30년대 조선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그가 절세미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미인이었기 때문에 세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미인이었기 때문에 세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것에 끌리고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주목하고 동정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닌 한 미인을 주목하고 동정하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 미인을 주목하고 동정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미인 아닌 사람을 주목하지 않고 동정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오늘날까지 미인은 여전히 즐겁다. 미인이 즐거운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미인만 즐거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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