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925년 10월23일자에 실린 재판 당시의 김정필. 큰 사진은 ‘삼천리’ 1930년 5월호에 실린 ‘법정에 선 독살미인 김정필‘ 기사.
개정을 한 시간 앞둔 8시30분, 법원 청사 앞에는 이미 500~600명의 군중이 운집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제7호 법정이 수용할 수 있는 방청객은 고작 60여 명. 열에 아홉은 몇 시간씩 기다린 보람도 없이 씁쓸히 발길을 돌려야 할 처지였다. 사람에 치여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자 법원 마당에 모인 군중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여보시오. 나는 조반도 거르고 7시부터 줄을 섰다오.”
“예끼 이 사람, 겨우 7시에 온 걸 가지고 웬 생색이우. 나는 5시에 나왔다오.”
“나는 상점문도 걸어 잠그고 왔소.”
“끼여 죽겠소. 그만 미시오.”
장안을 뒤집어놓은 촌색시
개정 시각이 가까워오자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법원 부근에만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서른 명씩, 마흔 명씩 떼 지어 몰려온 군중은 제지하는 순사들을 밀치고 제7호 법정 앞 입장 대기행렬에 더덕더덕 엉겨 붙었다.
밀어라 당겨라 비벼라 들어가자 애걔걔 죽겠네 여보 가만있소 소리를 지르며 엉겼다 무너지고 무너졌다 들러붙어 이리밀리고 저리 밀리기를 약 한 시간 반. 그 중에 가관이라 할지 무어라 할지 복판에 끼인 사람 중에는 불시로 키가 자라서 우뚝우뚝 솟아오른다. 나오려니 헤치고 나갈 수 없어 야단. 숨이 막혀 야단. 가슴이 결려 야단. 옷고름이 떨어졌네. 모자가 도망갔네. 발등을 밟네. 허방에 빠졌네. 별별 현상 갖은 일이 다 일어났다. (‘본부독살 미인공판 방청객 수기’, ‘동아일보’ 1924년 10월20일자) |
꼭두새벽부터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인파는,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경성복심법원 재개 공판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었다. 쥐약으로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스무 살 촌색시 김정필이 그처럼 거대한 인파를 한 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그날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명은 3·1운동 이후 종로에 운집한 최대의 인파였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경관 수십 명이 출동하여 법원 정문과 법정 문 앞에 몇 사람씩 파수를 세우고 장내 장외에 모여든 수천의 군중을 해산시키기에 노력했다. 장내에 쇄도했던 군중은 두어 시간의 사투 끝에 어느 정도 해산시켰으나 장외 즉 종로 일대에 쇄도했던 군중은 좀처럼 해산이 되지 않았다. 경관에게 쫓겨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오후 두 시까지 의연히 재판소문을 바라보며 모여 있었다. 법정 앞 담에는 수십 명의 기생이 매달려서 춘삼월에 고운 꽃이 핀 산 언덕과 흡사했다. (‘종로 일대 인산인해’, ‘조선일보’ 1924년 10월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