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으로 서른다섯 해를 살고, 평론가로 서른 해를 채웠다. 꽤 진득했다. 허나 진득함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내 삶의 중심축을 이루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시는 경험을 청취하되 경험을 넘어간다. 시는 오래된 기억이기보다는 반기억(反記憶), 기억의 대속(代贖)이다. 시는 역사에 곁살이를 하지만 제 존재가 나온 뿌리인 역사를 부정한다. 역사의 언어가 화석의 언어라면 시의 언어는 생물인 까닭이다. 시는 의미의 정언적 요청이 아니라 의미를 갖고 노는 놀이다”라고 썼다. 서정주, 천상병, 백석, 윤동주, 이상, 조지훈, 박목월, 정지용, 김수영, 고은, 황동규, 김종해, 김명인, 천양희, 문정희, 김사인, 신현정, 이성복에서 김영래, 유홍준, 장인수, 이근화, 김근, 송승환, 박해람, 주용일, 김행숙, 김경주까지 두루 읽었다. 노자, 장자, 공자, 도연명, 유협, 푸코, 들뢰즈, 니체, 사르트르, 롤랑 바르트, 지젝 등에게서 사유의 틀을 빌려다 썼다.
먼저 ‘현대시학’에 2년여 동안 ‘노자시화(老子詩話)’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노장의 철학으로 우리 시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뜻을 캐보려는 시도였다. 이를테면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대붕은 등의 너비가 몇 천리고 날개는 하늘을 가릴 만큼 큰 새다. 대붕이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고 했다. 우선 상상력의 크기만으로도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붕은 세속을 넘어선 내적 자유의 절대성, 그 자유분방한 경지를 사는 데서 오는 기쁨을 노래한다.
서정주의 ‘학’은 이 대붕에 견줄 만하다. 천년을 보던 눈과 천년을 파닥거리는 날개로 나는 이 학은 산덩어리 같은 분노와 초목도 울리는 설움을 내면에 감추고 이승을 넘어 저승 곁을 초연하게 떠간다. 장자의 ‘대붕’이나 서정주의 ‘학’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현실 저 너머로 나아가는 해탈의 존재들이다.
일찍이 천상병은 ‘선경’이라는 시에서 다람쥐를 보고 “나뭇가지를 빨리 가는 동태는/ 무구한 작란이, 순진한 스포츠다”라고 노래한다. 다람쥐가 나뭇가지 사이를 가볍게 돌아다니는 동태는 범속한 풍경의 하나일 터다. 이 범속한 풍경에서 ‘선경(仙境)’을 읽어내는 게 시인의 눈이다. 천상병은 오래 궁구하여 일군 뜻의 성숙함이 아니라 사물과 마음이 부딪치는 순간 일어나는 순진무구한 감응(感應) 그 자체를 시로 드러낸다. 그런 눈으로 삶을 바라보면 비참과 불행으로 얼룩진 삶도 대긍정 속에서 ‘아름다운 소풍’이 되어버린다.(‘귀천’)
노장철학을 가장 잘 체화한 천상병은 자기를 비우고 무욕함으로 일관했던 시인이니, 대소 미추 선악 시비의 분별을 떠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라고 주저함 없이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를 아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 곧 우주를 아는 것”이다. 이 책은 깊은 실존의 물음 앞에 벌거벗고 섰던 내 사유의 속살을 보여주는 책이다. 장석주│시인, 평론가│
일기일회 _ 법정 지음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법문 모음집이 출간됐다. 몇몇 사람이 우리의 스승이 육체의 건강을 회복해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기를, 다시 여러 계절을 더 맑은 가르침으로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법문을 엮었다. 고즈넉한 사찰뿐 아니라 명동성당, 세종문화회관, 원불교 대강당까지 실로 다양한 곳에서 선문을 설파한 스님의 음성은 낡은 카세트테이프,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MP3파일을 거쳐 책으로 재탄생됐다. 스님은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라며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 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는 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라. 그 순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문학의숲/ 390쪽/ 1만5000원
원풍 김년오 시집 _ 김년오 지음
탁월한 선거전략가로 한국정치마케팅연구소 소장을 지낸 저자가 도시를 등진 지 어느새 8년이 됐다. 저자는 “식구들을 광명에 두고 세간을 챙겨 내려온 뒤, 가급적이면 움직이지 않고 동면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잠이 나를 거부하면 며칠이고 날밤을 지새우며 단순하게 살자”고 했고, 그간의 생각을 4권의 시집에 가감 없이 담아냈다. “세상을 살면서 가짐 없이 채움도 없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시인의 음성에 귀 기울여볼 만하다. ‘나만이 아니고/ 내가 앞장을 서지 않고/ 누구도 할 수 있게/ 나라도 나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내가 나서 등을 두고 엎드려 누구도 할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 언제고 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끔.’ 서화림/ 각권 250여 쪽/ 3만2000원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_ 전경일 지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나 삶에서 밀려난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좌절하곤 하지만, 따뜻한 온돌방처럼 나를 지켜주는 기억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아버지와의 기억은 고통의 시간마다 나를 쫓아다니며 포기하지 않도록 추슬러준다.” 책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뿐 아니라 평범한 삶을 풍요로이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 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좌절로 주저앉아본 사람은 시련을 버티는 과정에서 한없이 강해질 수 있다. 어떤 불행도 우리를 뿌리째 날려버리지 못한다. 우리의 뿌리는 희망에 닿아 있으니까….” 저자는 미국 NBC TV와 CBS방송국, 삼성전자 미디어본부, 야후코리아 총괄이사, KTF 팀장을 거쳐 현재는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인문과 경영을 아우르는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예담/ 196쪽/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