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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세상과 ‘진보’에 대하여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살기 좋은 세상과 ‘진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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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자본주의를 선호하면 보수이고 사회주의를 선택하면 진보라든가, 투쟁은 진보의 길이고 타협은 보수의 편이라든가, 친북 반미면 진보이고 반북 친미면 보수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이제 별 의미가 없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실의 세계에서 의미가 없어진 사고방식을 관념적으로 고수하는 것은 진보니 보수니 하기보다 그저 ‘막힌 사고’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은 원래 프랑스혁명 당시 지롱드당이 오른쪽에, 자코뱅당이 왼쪽에 앉은 데서 유래한 단순한 좌석 구분이었다. 지롱드당과 자코뱅당은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당시는 둘 다 부패한 왕정을 타도한 ‘진보’였던 것이다.

이남곡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진보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침범하지 않도록 한계를 정해서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령 후세인의 독재정치는 이라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침범’했고, 이러한 폭압정치를 끝내는 것이 진보를 위한 가장 큰 목표가 된다. 한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라크 국민의 자주에 대한 요구를 침범했다. 이것은 진보에 반(反)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라크에 한국도 파병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많은 고민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처럼 높은 생산력이 진보의 바탕이다. 즉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히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않고는 진보를 말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가난’과 ‘내핍’을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의 욕구와는 거리가 멀다. 현대사회에서 대두한 ‘단순 소박한 삶’이나 ‘생태적 삶’도 어느 정도 물질적 수요가 충족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재화의 생산’은 진보의 중요한 요소다.

셋째, 의식혁명이다. 인간 자체를 에고(ego)와 소유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지키는 사람 열이라도 도둑 하나 막기 어렵다’는 말처럼, 아무리 제도나 규범을 바꾼다 해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는 어렵다. 이남곡은 의식혁명의 시작을 남을 침범하는 행위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옳은가 대신 무엇이 옳은가

‘진보를 연찬하다’는 완성된 이론을 제시한 책이 아니다. 연찬(硏鑽)이라는 방식 자체가 이론이나 사상, 방법, 실천의 모든 영역에서 무엇이든 한 가지로 단정 짓지 않고 열린 자세로 함께 진리를 추구한다. 저자는 야마기시에서 배운 연찬의 방식에 대해 “누가 옳은가를 서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서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함께 물어가고 끝까지 규명해가는 모습이 작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회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대립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향해 함께 가는 상생과 협력이다. 이남곡은 흔히 “좌파는 독선으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에서도 방법을 찾는다. 즉 아집과 탐욕이라는 각각의 약점을 지적한 이 말을 교훈 삼아 좌파와 우파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좌파가 그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특성을 이해하고 개방의 확대를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거기에는 반미적 성향에서 벗어나서 미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한미FTA를 오히려 적극 수용하며, 국가 이익과 생산력의 증대를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하라는 조언도 포함된다. 북한의 민주화, 노사 대타협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도 좌파의 몫이다.

자유를 지향하는 우파는 오히려 과거 좌파의 전유물로 인식되어온, 자유경쟁에서 불리한 사람이나 집단의 실질적 자유에 관심을 갖고 그러한 정책에 이니셔티브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적극적인 사회복지 정책, 북한 원조, 과감한 좌파의 주장을 수용한 조세정책 등을 우파가 앞장서서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뉴라이트나 뉴레프트 운동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정국은 보수세력의 분열과 진보대연합의 약진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진리를 향해 고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좌우익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막힌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진보를 연찬하다’를 읽으며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신동아 200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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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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