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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①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전후(戰後) 문단·언론 짓누른 적색 알레르기의 집단적 표출

  •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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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오소백 기자의 책 ‘올챙이 기자 방랑기’ 표지.

오소백은 이 시를 한하운이 편집국에 와서 쓴 것이라고 했으나, 당시 ‘서울신문’은 그가 14일에 써서 “최신작의 시 한편을 보내준 것”으로 보도했다. 사소한 시차는 있으나 이 시가 한하운의 심정을 노래한 최신작이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서울신문’은 문둥이 시인이라는 특이한 인물에 대해 떠돌던 소문을 해소하는 동시에 그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에 걸린 불우한 인간이 보리피리 불며 산과 들을 방랑하는 모습을 노래한 시를 특종으로 내보낸 것이다.

초판과 재판의 차이

기사와 시가 신문에 실린 후 의혹 제기가 본격화했다. 한하운은 허구의 인물이며 공산당의 선동시인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신문에 실린 ‘보리피리’ 자체가 이상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어째서 가을에 ‘보리피리’라는 시를 쓴 것인가?”

한하운은 문예지에 추천되거나 신춘문예를 거쳐 등단한 문인이 아니다. ‘서울신문’이 발행하는 종합잡지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라(癩) 시인 한하운 시초(詩抄)’가 실린 뒤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신천지’는 광복 후 6·25전쟁 이전의 해방공간을 대표한 종합잡지다. 시인 이병철이 한하운의 시 머리에 ‘한하운의 시초를 엮으면서’를 통해 한하운이 나병환자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문단 등단 절차를 밟은 셈이다. 이병철은 한하운이 나병으로 손가락이 떨어졌고, 지난 겨울 추위에 시력마저 잃어버렸다고 그의 신상을 공개했다. ‘신천지’에는 ‘전라도 길’ ‘벌’ ‘목숨’ 등 13편이 실렸는데, 한 달 후인 5월 정음사에서 ‘한하운 시초’를 출간해 그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한하운 시초’는 70쪽의 얇은 분량이었으나 당시 열악한 출판 사정으로는 이례적으로 모조 100g의 고급 용지를 사용했고, ‘신천지’에 발표했던 13편에 12편을 추가해 25편의 시가 수록됐다. 책 말미에 편자 이병철이 ‘신천지’에 실었던 글을 발문 형태로 수록했다.

이병철은 한하운의 시가 “참을 길 없는 그의 울음이 구천에 사무치도록 처절한 생명의 노래”라며 “역사적 현실 앞에서 건강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부정한 그것을 다시 부정해버린 다음의 높은 경지의 리얼리티를 살린 데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집에는 장차 문제가 되는 시 ‘데모’도 실려 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6·25전쟁 발발 때까지 1년여 동안 한하운 시에 대한 논란의 흔적은 없다. 그런데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6월30일 재판(再版)이 나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재판은 초판에 비해 분량과 내용 면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초판에 없던 시 8편이 추가돼 전체 편수가 늘어났다. 해설과 발문에 해당하는 글 또한 초판 끝에 실었던 이병철의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가 재판에서는 빠지고 조영암(‘하운의 생애와 시’), 박거영(‘하운의 인간상’), 최영해(‘간행자의 말’)의 글로 대체됐다. 그래서 총 100쪽 분량이 됐다. 장차 문제가 되는 시 ‘데모’는 ‘행렬(行列)’로 제목이 바뀌고, ‘물구비 제일 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로 시작되는 연(聯) 전체와 그 다음 연의 둘째 행이 삭제됐다. 정현웅이 그린 초판의 표지장정은 재판에도 그대로 쓰였는데, 다만 초판에 표시됐던 정현웅의 이름이 빠졌다.

‘데모’ (재판 제목은 ‘행렬’)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속으로/ 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만세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구비 제일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연 전체 삭제)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 (*한 행 삭제) /아우성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싶어라 죽고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재판이 발행된 후 ‘태양신문’은 경남경찰국에서 ‘한하운 시초(詩抄)’를 압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시집은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좌익선동 서적이란 낙인이 찍혔던 것으로, 재판 간행을 계기로 치안국이 경찰에 지시, 8월초부터 내사를 거듭해오다 압수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태양신문’ 1953년 8월24일, ‘한하운 시초 압수, 문제의 좌익 선동시집에 斷’)

그러나 ‘한하운 시초’를 정부 수립 이전에 좌익서적으로 낙인찍었다는 ‘태양신문’ 기사는 오보였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시집은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5월에 정음사에서 발행됐다. ‘태양신문’이 8월24일자 기사에서 세간에 커다란 물의를 빚고 비난을 자아내면서 전국 각 서점에서 한하운 시초가 판매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서울신문’의 10월17일자 기사는 이미 한하운 시에 대한 논란이 일고, 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을 때다. ‘한하운 시초’를 발간한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간행자의 말’에서 ‘그(한하운)의 생사를 우리는 모른다. 바람에 들리는 말로 인천 어디서 살아 있다고도 한다. 아 ―불행의 연장이여, 우리는 여기서 그를 추궁치 말자’고 했다. 오소백이 한하운의 시와 함께 그의 존재를 비중 있게 기사화한 목적은 한하운이 사상을 의심받을 필요가 없는 시인이며, 살아 있는 실존인물임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전쟁 전에 초판이 발행된 시집의 재판이 나오자 ‘좌익선동’으로 지목당한 것은 전쟁 후 문화계를 포함한 사회적 분위기가 전쟁 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이 발행하는 ‘신천지’에 시가 처음 실리고, 정음사가 시집 초판을 내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후 재판을 발행하면서 출판사 스스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부분을 삭제했음에도 필화사건으로 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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