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25일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이 서울 역사박물관의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을 하고 떠나고 있다
법무부는 노 전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검찰에 지휘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사실 그런 법무부의 해명은 당연한 말이었다. ‘검찰청법 제8조’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국정원 의혹, 청와대와 법무부의 압력행사 여부에 대한 검찰총장의 노코멘트 발언 등은 이명박 정부를 수사 외압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두 사건 순서 바뀌었다”
박연차 게이트는 전·현직 정권의 최고위급 실세를 ‘함께’ 수사 대상에 올려놓았다. 이런 구조적 측면에서도 수사외압 의혹의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노무현 수사의 경우 외압이 들어올 만한 부분은 ‘노무현 수사는 언제 마무리할 것인가’‘노무현 구속을 단행할 것인가’ 등 두 가지다. 그런데 또 다른 거물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도 수사 대상이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였다. 노무현 수사와 천신일 수사는 별개인 것 같지만, 어느 것을 먼저 처리하느냐, 어떤 수위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이슈의 향배가 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외압이 들어올 만한 부분은 ‘노무현 수사와 천신일 수사 중 어느 것을 먼저 처리하고 어느 것을 나중에 처리할 것인가’‘노무현 구속을 단행할 것인가’‘천신일 구속을 단행할 것인가’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수사 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법처리 결정 이전 서거했고, 천신일 회장에 대해서는 검찰의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그렇다면 노무현 수사와 천신일 수사의 진행 속도는 어떠했을까.
노무현 수사는 4월30일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를 통해 사실상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검찰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의 결정만 남겨두고 있었다.(5월2일 동아일보 보도) 그런데 노 전 대통령 신병처리라는 노무현 수사의 본류는 5월2일부터 사실상 정지됐다. 이와 동시에 노무현 수사에 비해 수사 진전단계가 현저히 뒤처져 있던 천신일 수사가 속도를 내어 노무현 수사를 앞질렀다.
천신일 수사는 천 회장에 대한 출국금지 단계에 있었다. 그런데 5월 초 계좌추적, 5월7일 천 회장의 자택 사무실 등 19곳 압수수색, 5월8일 국세청 전산실 압수수색, 5월18일 한상률 전 국세청장 서면조사, 5월19일 천 회장 소환조사로 가속도를 내더니 마침내 5월23일 천 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방침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날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영장 청구는 미뤄졌다.
노무현 수사가 최종단계에서 정지되어 있는 동안 뒤처져 있던 천신일 수사가 노무현 수사보다 먼저 마무리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누군가 급히 두 사건의 순서를 조정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나왔다. ‘공교로운 결과’라는 의문도 있었다. “현 정권의 비리의혹인 천신일 사건을 먼저 처리한 뒤 박연차 게이트의 최종 단계로 전 정권의 비리의혹인 노무현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그 반대의 순서보다는 현 정권에 더 유리해 보인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출장취소 지시”
그러나 검찰 수사에 외압은 전혀 없었으며 수사팀 내부 사정이었다는 게 검찰 측 설명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일정이 지연되는 것은 박연차 전 회장이 2007년 6월 말 노 전 대통령 측에 건넨 100만달러가 어디에 쓰였는지를 놓고 검찰과 노 전 대통령 측이 기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 속도가 늦춰지고 있는 데에는 검찰 쪽의 사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검찰은 천신일 회장 수사에 본격 나서면서 노 전 대통령 쪽 수사는 완만하게 진행하며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동아일보 5월11일 보도)
이런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닷새 뒤인 5월28일 검찰 주변에서 민주당 정치보복진상특위 측에 제보를 했다. 특위 관계자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제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4월30일 대검찰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5월1일 새벽 김해 봉하마을 자택으로 귀가했다. 다음날인 5월2일 토요일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비공개리에 청와대를 방문하여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 내용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김 장관에게 향후 검찰 수사와 관련 어떤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김 장관은 불과 이틀 뒤인 5월4일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해외출장을 떠나게 되어 있었다. 한국-이란 범죄인인도조약 체결과 같은 국가 간 공식 조약 체결 일정이었다. 외교관례상 도저히 출국 이틀 전, 그것도 휴일에 취소하기 어려운 행사였다. 이 대통령은 ‘해외출장을 취소하고 국내에 있으라’고 지시했다. 김 장관 측은 부랴부랴 일정을 취소하기 위해 주한 이란대사관 측에 전화를 걸었으나 토요일 휴무여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김 장관 측은 외교통상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외교통상부는 이란대사관 측과 연락이 닿아 일정 취소를 통보했다. 이런 내용은 법무부와 검찰 일각에 전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