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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림을 사랑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소설은 그림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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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레시아 부인은 문을 열러 갔다. 문틈으로 보이는 루크레시아 부인은 산 이시드로 올리바르 공원의 허옇게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초상화 속 인물 같았다. 폰치토의 노란색 고수머리와 푸른 눈이 보였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박민규의 소설이 사랑한 그림, ‘라스 메니나스’

그리고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아니 ‘라스 메니나스’. ‘라스 메니나스’는 박민규 신작 장편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를 장식한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림의 제목이자 이 소설 첫 장의 제목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의 첫 문장 역시 짧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런 첫 문장들은 언젠가 한 번쯤 써본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언젠가 자신의 청춘의 어느 장면을 보는 듯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러니까 이 첫 문장 속의 ‘그녀’를 찾아가는 추억의 여행이자 추억 속의 ‘그녀’를 위한 헌사다. 그녀는 누구인가. 우리는 연애소설의 주인공들을 기억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마담 보바리’의 엠마 보바리, ‘롤리타’의 롤리타,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 ‘리진’의 리진…. 작가들은 소설의 여주인공을 창조하면서 절대미의 기준을 독창적으로 제시해왔다. 또한 우리는 연애소설의 공식도 잘 알고 있다. 세상의 남성들은 절대미의 그녀들을 가슴에 품고, 소유하려고 하고, 세상의 여성들은 절대미의 그녀들에 의해 은밀히 웃거나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첫 문장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다’는 연애소설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다보면 여주인공의 공식은 철저히 배반된다. 눈을 맞으며 서 있던 그녀라는 첫 문장의 실루엣은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지만, 사실 그가 사랑한 그녀는 누구도 사랑할 것 같지 않은 못생긴 여자. 그러니까 이 첫 문장은 소설의 화자인 성공한 중년의 작가가 스무 살 무렵에 사랑했던 못생긴 그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출발하는 것이다. 못생긴 그녀를 떠올리게 한 것은 한 편의 음악,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박민규가 제목을 따온 이 음악은 사실은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본 뒤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음악. 그러니까 태초에 ‘라스 메니나스’가 있었고, 그리고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었고, 또 그리고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고, 그 소설의 첫 장 ‘라스 메니나스’가 있는 것이다. 소설을 둘러싼 원전(原典)의 출처가 서로 쫓고 쫓기듯이 맞물리며 퍼즐 맞추기처럼 보이는데, 이들로부터 하나의 모티브를 추출하자면, 세상의 눈부신 여자들 옆에 들러리 선 ‘못생긴 여자’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를 감싸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의 우리말 번역은 ‘시녀들’이다.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17세기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아틀리에를 액자식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들은 왕실 또는 바티칸 소속으로 왕과 왕녀, 교황과 순교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그들의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 벨라스케스는 당시의 관례와는 다르게 ‘왕녀 마르가리타’를 제목으로 하지 않고, ‘시녀들’을 내세웠다(화가의 또 다른 그림으로 단독 초상화 ‘왕녀 마르가리타’가 그려져 유럽의 내로라하는 미술관 벽에 걸려 있긴 하다).

유럽의 왕궁에는 어린 왕녀의 시중을 들며 즐겁게 해주기 위한 구성원들이 있는데, 시녀들과 난쟁이 그리고 개가 빠지지 않는다. 박민규 소설의 여주인공 그녀는 화폭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 왕녀 마르가리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 그중에서도 그림 전면의 오른쪽 옆 구석에 서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난쟁이 시녀로부터 환기된 스무 살 무렵의 첫사랑이다.

“라벨을 듣는다. 또다시 재생되는 그날의 음악처럼 나는 그 벌판과…눈과…나무들과…그녀를 떠올린다.”

작가가 고백한 대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길고 긴 연서(戀書)를 쓰는 마음으로 ‘못생긴 여자와, 그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연애소설이나 영화, 그림 등 예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못생긴 여자에 대해 눈길을 돌린 적이 없다고 단언하고, 이 소설이야말로 미(美)의 소수자들인 못생긴 그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과감하게 쓰고 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가 ‘라스 메니나스’를 그린 17세기와는 달리, 현대 모더니즘의 역사는 고정된 미의 답습이 아니라 추(醜)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숭고의 미를 발견해내는 혁명의 역사가 아니던가. 박민규의 희귀한 연애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니 어느 시인의 전언처럼 왼쪽 가슴께가 저며 온다. (후기: 소설을 읽는 내내 음악이 함께 했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아니다. 이 소설을 위한 백그라운드음반((BGM) Mushroom-‘눈물’ ‘그런, 그녀’‘슈크림’ 어쿠스틱 기타연주 ‘눈물’. 추억의 결정(結晶)처럼 투명하고, 알싸하다. 음악이 흐르는 한,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지음/ 예담/ 420쪽/ 1만2800원

신동아 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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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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