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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⑨

현실의 결핍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

말괄량이 삐삐와 빨강머리 앤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현실의 결핍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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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짓말은 나빠!
  • 하지만 난 가끔씩
  • 그 사실을 까먹지 뭐니!
  • 난 커서 해적이 될 거야!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중에서
현실의 결핍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

‘뒤죽박죽 별장’에서 원숭이 닐슨씨와 단둘이 사는 말괄량이 삐삐.

어른들의 감시가 없는 곳, 시험도 학교도 숙제도 없는 곳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은 어린이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중 남자 아이의 우상이 피터팬이었다면 여자아이의 우상은 말괄량이 삐삐가 아니었을까. 삐삐롱스타킹이 원숭이 닐슨씨와 단둘이 살고 있는 ‘뒤죽박죽 별장’은 피터팬의 네버랜드보다 훨씬 현실적인(?) 천국이었던 것 같다. 굳이 환상 속 네버랜드까지 떠나지 않더라도 ‘텅 빈 집’만 있다면 그곳이 곧 어린이의 천국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뒤죽박죽 별장에는 모든 것이 ‘제멋대로’ 널려 있기에 오히려 완벽한, 어린이들의 이상향이 될 수 있었다. 뒤죽박죽 별장의 자유분방함과 선원 출신 아버지를 둔 삐삐의 무한한 ‘이야기 제조 능력’은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멋진 판타지였다.

무한 리필되는 소녀의 상상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이 ‘빨강머리 앤’이다. ‘빨강머리 앤’의 정서적 파장은 ‘삐삐롱스타킹’보다 훨씬 오래 지속됐다. 말괄량이 삐삐가 아홉 살을 전후로 한 ‘어린이’의 공상을 책임진다면 빨강머리 앤은 어린 소녀부터 사춘기의 정점까지 아우르는 틴에이저들의 공상의 왕국을 떠나지 않는다. 게다가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아무리 ‘재탕’을 거듭해도 그때마다 TV 앞에 앉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연기를 맡았던 성우 고(故) 정경애씨의 영롱한 음성은 아직도 귓가에 아련하게 울린다.

삐삐와 앤의 공통점은 친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천애고아라는 점. 하지만 이 소녀들에게는 근원적인 결핍을 뛰어넘게 만드는 영혼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못 말리는 상상력’이다.

이 두 어린이는 이야기 창조를 통해 현실에 결핍된 것을 망각한다. 걸핏하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제멋대로 지어내는 삐삐의 상상력의 원천에는 선원이었던 아빠와 함께 원양어선을 탔던 아저씨들이 전수해준 각종 모험담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직접 세계일주라도 다녀온 것처럼 세계 각국의 이름을 대가며 ‘상상 속 경험’을 이야기하는 삐삐는 옆집 친구 아니타와 토미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아이들만 만들 수 있는 천국의 풍경

마주치는 모든 사물과 공간에 자신이 지어낸 이 세상 하나뿐인 이름을 붙여줘야 마음이 놓이는 앤은 또 어떤가. 벽에 장식이 없으면 벽이 슬퍼할 거라 생각하는 아이, 자신이 이름 붙여준 모든 사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에 결코 잊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 앤 셜리.

앤이 뛰어난 ‘감정 이입’ 능력을 가졌다면 삐삐는 뛰어난 ‘발견의 재능’을 가졌다. 삐삐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익숙한 사물의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고 좋아라한다. 여전히 전세계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앤과 삐삐 스토리는 아이들만이 만들 수 있는 우리 안의 천국을 그린 이야기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수업을 하면 법을 어기는 거야. 간혹 어떤 아이들이 벽장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엄마한테 들켰다간 혼쭐나지. 학교에서는 수학을 절대로 안 가르쳐. 7 더하기 5가 뭔지 아는 아이는 하루 종일 교실 구석에 서서 벌을 받아. 바보같이 자기가 아는 것을 선생님한테 가르쳐주는 아이 말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햇살과 나무꾼 옮김,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시공주니어, 2009, 80쪽.

농장 일을 도와줄 ‘쓸 만한’ 남자 아이를 입양하려다가 스펜서 부인의 실수로 얼떨결에 ‘쓸모없는’ 여자 아이를 입양하게 된 마릴라와 매튜. 마릴라는 공상이 지나치고 현실감각이 없으며 절제를 모르는 빨강머리 앤을 어떻게든 ‘개조’해 차분하고 침착한 아이로 만들려 한다. 그의 교육 계획은 좀 더 윤리적이고 종교적이고 합리적인 소녀를 만드는 것이다. 보수당을 지지하고 독실한 기독교도이며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금욕주의자 마릴라의 눈에는 절제라고는 모르는 앤이 거의 대책 없는 ‘이교도’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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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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