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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⑨

현실의 결핍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

말괄량이 삐삐와 빨강머리 앤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현실의 결핍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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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결핍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

‘못 말리는 말괄량이’ 앤은 마릴라의 사랑과 관심 속에 멋진 어른으로 자라난다. 드라마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오라버니, 저 애는 정말 누군가에게 입양되어 교육을 받아야 해요. 저 아인 거의 이교도나 마찬가진 걸요. 오늘 밤 전까지 단 한 번도 기도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내일 목사관에 가서 새벽 성경 공부 책을 빌려 와야겠어요. 꼭 그래야겠어요. 제가 적당한 옷을 만드는 대로 주일학교에도 보내야지요. 할일이 정말 많겠어요. 그래, 맞아요. 우리 몫으로 주어진 어려움을 겪지 않고 세상을 살 수는 없죠. 저는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살아 왔어요. 마침내 제게도 때가 왔으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아요.”

-루시 몽고메리, 김경미 옮김, ‘빨강머리 앤’, 시공주니어, 2002, 77쪽.

마릴라는 엄격한 교육으로 앤의 무제한 공상의 세계를 통제해보려 하지만 오히려 앤의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상상력의 반딧불을 쫓아다니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고 만다. 그칠 줄 모르는 앤의 수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처음부터 매튜는 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저 앤의 수다를 듣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앤의 직접적인 ‘양육’을 맡은 마릴라는 앤에게 좀 더 절도 있는 교육 철학을 적용하려 한다. 하지만 좀처럼 마음속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마릴라는 시간이 갈수록 앤의 공상 속 이야기가 하루라도 들리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이 허전해지는, 앤이 창조해낸,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초록색 지붕 집’을 발견하게 된다.

교육하는 아이 vs 교육당하는 어른

무엇보다 마릴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감수성을 앤으로부터 배운다. 아름다움에 대한 투명한 예찬은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마릴라가 오랫동안 억압해왔던 감수성이기도 하다. 앤이 날마다 실천하는 수다의 마법은 조용하고 평온한, 일관성 그 자체였던 마릴라의 일상을 매일 다른 빛깔의 상상력으로 물들인다. 달력의 날짜만 다를 뿐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처럼 느껴지던 마릴라와 매튜에게 앤은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선사한다.



“나 참, 저 애가 온 지 겨우 3주밖에 안됐는데, 꼭 항상 여기 있었던 것만 같아요. 이 집에 저 애가 없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마릴라는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앤의 생각을 쫓아다니느라 매번 녹초가 되면서도 앤의 수다에 중독돼 앤이 없는 적막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앤은 주변 사람들의 혼을 모두 쏙 빼놓아 매번 ‘계획되지 않은’ 치열한 감정 노동을 하게 만든다. 마릴라뿐 아니라 다이애나를 비롯한 앤의 친구들, 앤의 원수이자 미래의 연인 길버트 블라이스, 린드 부인과 목사 부부와 조세핀 할머니까지, 모두 앤의 ‘상상공화국’의 즐거운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삐삐는 앤보다 훨씬 도전적인 방식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한다. 앤이 ‘수다’와 ‘몽상’으로 어른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면 삐삐는 각종 ‘액션’과 ‘돌발 질문’으로 어른들을 골탕 먹인다. 삐삐는 자신을 기어코 ‘어린이 집’으로 보내려고 하는 경찰들을 혼자 힘으로 내쫓아버리고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도 태연자약하게 도둑들을 따돌릴 뿐 아니라 도둑들이 얼떨결에 삐삐 앞에서 춤까지 추게 만든다. 재미 삼아 한 번 가본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질문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 질문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 아니카. 너한테 문제를 낼게. 구스타프가 같은 반 친구들이랑 소풍을 갔어. 구스타프는 소풍 갈 때 1크로나가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7요레가 남아 있었어. 구스타프는 얼마를 썼을까?”

삐삐가 또 끼어들었다.

“그래 맞아, 나도 알고 싶어. 구스타프는 왜 그렇게 돈을 펑펑 쓰고 다니지? 구스타프는 탄산 음료를 사 먹었을까? 또 집에서 나오기 전에 귀는 잘 씻었을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햇살과 나무꾼 옮김,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시공주니어, 2009,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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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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