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암사 팔상전 뒤편의 600년생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탐매나 심매(尋梅) 행각은 예부터 격조 높은 봄맞이 행사(迎春)였다. 혹한의 세월을 견뎌내고, 은은한 향기와 고아한 아름다움으로 누구보다 먼저 봄소식을 전하기에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탐매에 빠진 애호가들은 취향에 따라 각기 백매, 청매, 홍매의 아름다움을 최고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산속이나 물가에서 자라는 야매(野梅), 굽은 가지에 내려앉은 푸른 이끼가 감싸고 있는 고매(古梅), 달밤에 핀 월매(月梅)는 물론이고 시로 보고 그림으로 읽는 매화를 통해서 봄의 향기를 감상하기도 했다.
오늘날도 산청삼매(山淸三梅)나 호남오매(湖南五梅)가 탐매꾼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산청삼매란 지리산 자락의 산청을 중심으로 자라는 세 종류의 매화를 가리킨다. 고려 말의 세도가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는 원정매(元正梅), 강희안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며 심었다는 정당매(政堂梅), 남명 조식의 남명매(南冥梅)가 여기에 속한다. 호남오매는 백양사의 고불매, 선암사의 선암매, 가사문학관 뒤편 지실마을의 계당매, 전남대의 대명매, 소록도 중앙공원의 수양매를 일컫는다.
정보통신 혁명의 광풍이 숨 가쁘게 몰아치는 바쁜 세태 속에서도 탐매 행각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마치 느리게 사는 삶의 전형인 양 속도전의 치열한 경쟁에 초연한 듯, 매화를 찾는 즐거움으로 마음의 풍요를 얻는다.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지리산 자락의 산청을 먼저 찾기도 하고, 정자골인 담양 소쇄원 백매와 식영정 홍매가 꽃눈을 터뜨릴 때만 애타게 기다리는 탐매꾼도 있다. 국가에서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매화 중에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천연기념물 484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남녘의 절집에 터를 잡고 있다. 바로 화엄사 길상전 앞의 백매(천연기념물 485호),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천연기념물 486호),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천연기념물 488호)가 그것들로, 절집과 매화 사이에 얽힌 사연도 예사롭지 않다.
20여 그루의 늙은 매화

선암사의 무우전 고매들.
선암사의 매화가 탐매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또 있다. 무우전매가 한두 그루가 아닌 20여 그루를 칭하기 때문이다. 늙은 매화 한 그루만 있어도 그 향취와 자태를 즐기려는 탐매꾼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데, 수백 년 묵은 고매가 20여 그루나 있으니 이 좋은 기회를 탐매꾼들이 놓칠 리 없다.
옛 문인들은 가지에 붙은 꽃이 많지 않고(稀), 나이를 먹어(老), 줄기와 가지는 마른(瘦) 매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등위를 매겼다. 무우전 돌담 곁에서 400~500년 묵은 매화들은 고매가 지녀야 할 이런 품격을 간직하고 있다. 늙은 등걸에서 용틀임하듯 기이하게 구부러지고 뒤틀린 가지가 힘차게 뻗어 나와 점점이 붉은 꽃과 흰 꽃을 피워내는 자태는 탐매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중 2007년 11월에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된 매화는 무우전 건너편 호남제일선원과 팔상전 사이의 통로에 있는 600여 년 묵은 백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