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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④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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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소나무가 간직한 품격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거기에 비례해 안목도 높아지듯 매화를 제대로 감상하는 데도 세월이 필요하다. 몇 번이나 이런저런 절집을 들락거렸지만, 젊은 시절엔 매화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절실하게 담질 못했다. 나이 들어 새삼 그 아름다움을 알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봄에 경험한 매화의 향기 덕분이다. 새벽같이 서둘러 길을 나선 덕분에 이른 아침 시간에 절집에 당도했다. 언제나처럼 번잡하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조급한 마음에 무우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인적 없는 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자리를 옮길 때,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탐매꾼들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이 암향을 ‘봄을 부르는 손짓’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그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늙은 매화나무 아래에서 홀로 암향을 즐긴 이른 아침의 도락(道樂)은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여정의 피로를 단숨에 보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매화를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것에 더없이 기뻤다. 꽃이 핀 시간과 공간의 절묘한 조화로움이 베푼 마법을 즐길 때의 감동은 거창하고 화려하며 현란한 인공적인 즐거움과는 품격이 달랐다. 자연이 창조하는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우리네 삶이 더 풍요로워지리라.

달마수각의 아름다움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선암사 달마수각.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529년에 창건했다. 그때 이름은 해천사(海川寺).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도선이 비보도량을 세워 삼층석탑(보물 제 395호)을 비롯해 7점의 보물과 함께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지방문화재 12점도 보유하고 있다. 흔히 방문객들은 선암사를 들르면 꼭 봐야 할 3가지로 ‘건너면 속세의 때를 벗고 신선이 된다’는 ‘승선교’(보물 400호), 화장실로서는 유일하게 문화재(자료 214호)로 지정된 해우소, 그리고 무우전 돌담가의 늙은 매화나무를 든다. 하지만 스님들은 오히려 늙은 매화와 함께 1000년 세월을 버텨온 차나무와 달마선원의 수각(水閣)을 더 큰 자랑거리로 여긴다.

야생차밭을 사진에 담고자 겨울 선암사를 찾았을 때, 포행 중인 스님을 찍어드린 덕분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무우전 내 달마전 선방과 그 안마당에 있는 수각도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각이라는 스님의 자랑처럼 달마선원의 수각은 흔히 볼 수 있는 수각이 아니었다. 일명 ‘칠전(七殿)선원 수각’으로 알려진 이 수각은 다양한 크기의 돌로 깎은 함(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수각의 바깥에 바로 무우전 매화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스님은 선암사의 천년 야생차밭에서 흘러내리는 달마수각의 약수로 끓인 차를 대접하면서 매화와 함께 수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물을 담는 돌함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크기가 다른 4개의 자연석을 깎아 만들었고, 물통마다 통나무와 대롱을 이어 차례로 물을 아래로 흘러내리게끔 되어 있다. 차나무 밭에서 흘러나온 약수 중 맨 위에 있는 가장 큰 사각형 석함에 담긴 것은 상탕(上湯)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나 차를 끓일 때 사용하며, 두 번째에 있는 타원형 석함의 물은 중탕(中湯)으로 스님과 대중의 음용수로 사용된다. 세 번째 아담한 크기의 동그란 석함의 하탕(下湯)은 밥을 짓고 과일과 채소를 씻는 데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곁가지를 내어 만든 듯한 가장 작은 석함의 물은 허드레 탕으로,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할 때 쓰는 물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야생차밭에서 흘러나온 약수가 통나무와 대롱을 타고 수백 년의 세월은 족히 견뎌냈음직한 돌항아리에 차례로 흘러내리는 수각은 선암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예스러운 풍경임에 틀림없다. 돌함에 흘러내리는 물이야 다 같은 물일 텐데도 제각각 의미를 달리 부여한 선방 스님들의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여쭈어보질 못했다.



달마수각의 아름다움과 함께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승방의 문고리를 한번 잡아보라던 스님의 권유다. 스님의 권유는 진지했다. 그 진지함에 이끌려 나는 선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스님의 설명인즉 수많은 수행자가 밤낮으로 선방을 들락거릴 때마다 문고리를 잡았기 때문에 선방의 문고리에는 선승의 기(氣)가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선방의 문고리를 잡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한다. 선방 문고리의 효험을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은 없지만, 용맹정진에 힘썼던 수행자들의 생기(生氣)를 문고리를 통해 전수받는다는 기분에 나는 처음 생각보다 오랫동안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사진 한 장이 만든 스님과의 인연의 고리는 선방 문고리를 잡아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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