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입력2010-10-18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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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앞의  삶

    일러스트·조은명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옆이 보호자 대기실이다. 그곳은 늘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사람들의 표정도 대부분 어둡다. 어떤 이는 넋을 놓은 듯 창밖을 내다보고, 또 어떤 이는 랩톱을 펼쳐 인터넷을 두드리며 열심히 무언가를 찾거나 전화기로 누구와 텍스팅을 하고 있다. 침묵을 깨는 것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대기실 안의 커피메이커 소리. 커피의 향긋한 냄새에도 심해(深海) 같은 침묵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곳을 지나 자동개폐문을 열고 들어간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통유리 가운데 커다랗게 붙어 있다. 난 가끔 이곳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하지만 습관처럼 자동문 속으로 빨려들어가 일 속에 파묻힌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고향의 장터처럼 시끄럽고 어수선하지만 가끔은 태풍 직전의 무거운 침묵처럼 숨이 막힐 때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됐건 나는 작은 손가방을 서랍 속에 넣고, 컴퓨터를 켜며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밤 입원한 환자의 이름과 간단한 병력들을 챙겨 본다. 가족들의 연락처가 없거나, 사회보장번호가 없거나, 행려자로 구분되면, 내 머릿속에는 빨간 불이 켜진다. 그들은 오늘 해야 할 업무의 최우선 순위로 정해진다.

    그해 여름

    1984년 여름, 나는 남편과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화학을 전공한 남편이 유학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공계 졸업생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학비를 대줄 집안어른이 없었고, 국비 장학생 자격을 신청하기에는 남편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에 올랐던 것은 남편 지도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전군, 자네가 제일 고생을 안 할 거야. 유학생 부인이 간호사인 경우, 제일 안정되고 좋더라.”

    그 말에 우리는 상당히 고무되었고, 별 준비 없이 미국에서 늦깎이 유학생 가족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이 화학과 대학원생인 동시에 실험조교로 등교하고 나면, 나는 짧은 영어로 손짓발짓해가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의 결단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나 절감했다. 한국에서 준비한다고 했지만 나는 현지인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따라서 내 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말과 문화가 다른 이국 생활이 결코 녹록하지 않으리란 것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닥쳐보니 내 발등을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의 ‘줌마 파워’는 요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도 한국 아줌마는, 더구나 엄마는 강했다. 남편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간호사 시험 준비를 했던 시절, 내 평생 그때처럼 처절히 공부한 적이 있던가 싶다. 박사 과정의 남편보다 도서관에 더 많이, 더 오래 붙어 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다. 몇 달 되지 않아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이 됐으므로 내가 옆에 없어도 될 정도였다. 따라서 낮 시간 동안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저녁 이후에 또래가 있는 이웃 유학생 집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새 이민자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어덜트 스쿨(adult school)’에 등록하고 2년 동안 개근상을 탈 정도로 영어에 매달렸다. 가족과 대화하는 것말고는 한국 문화를 일절 접하지 않았다. 한국 책과 한국 TV 프로그램, 한국 비디오테이프는 아예 주변에 놓지 않았고, 집안일을 할 때조차 CNN 뉴스를 틀어놓았다.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며 늘 하던 대로 CNN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내일 날씨는 무척 덥고 바람이 많이 불겠으니 불조심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 하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기상 캐스터가 날씨 예보를 하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 이제 알아들을 수 있구나.”

    실험을 하다 잠시 저녁 먹으러 온 남편에게 흥분한 어조로 자랑했다.

    “그래, 그러면 이젠 간호사 시험만 붙으면 되겠네.”

    남편은 대견하다는 듯 씩 웃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미국 간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일자리를 찾을 차례였다. 신문 광고를 보고 몇 군데 이력서를 냈더니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미국 병원 경험도 없고 시스템도 몰랐으므로 큰 병원은 자신이 없어 작은 요양병원을 택했다. 인터뷰를 하는데 이번엔 말이 문제였다. 간호과장 질문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Pardon me? Could you repeat it for me?”를 몇 번 하다가 “I will do my best”라고 한마디하고는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나와버렸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미국 간호사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된 것이었다.

    약국으로 숨어들기

    유학생 가정에 차가 한 대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버스 통학이 되지 않는 학교로 남편이 차를 가지고 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내 출근길이 막막했다. 하여 난 밤일을 택했다. 남편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밤 11시까지 출근하는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아침 7시 퇴근 시간에 맞춰, 남편은 잠이 덜 깬 아이를 담요에 둘둘 말아 차 뒷자리에 싣고 나를 데리러 왔다. 그리고 나와 아이를 집에 내려놓고는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나는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고 숙제를 점검하고 준비물과 가방을 챙겨 통학 버스에 태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 중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거나 하게 되면 난감했다. 동네 이웃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쉽지 않았다. 차가 한 대 더 필요했지만 차를 사기엔 유학생이라는 신분과 할부금이 부담됐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밤 근무를 6개월쯤 했을까. 낮일을 하던 간호사 한 명이 사직을 했다며 내게 낮 근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영어 때문에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밤잠을 못 자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선뜻 “Yes”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남편과 아이를 새벽같이 데려다주고 퇴근 후 데리러 가는 것으로 일정을 바꿨다. 남편은 일찍 학교를 가도 할 일을 할 수 있고 도서관도 있으니 괜찮지만 아이는 오전 7시 전엔 학교를 갈 수 없었으므로 또 이웃의 신세를 져야 했다. 새벽, 아이를 깨워 아침 먹이고, 학교 갈 준비를 시켜 이웃집으로 보내면 이웃 아이들과 함께 스쿨버스를 탔다. 아이가 하교할 무렵엔 나도 퇴근을 해 아이를 야구와 태권도 모임 등에 데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큰 일은 병원에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트를 보고 약을 주거나 의사의 오더를 시행하는 건 문제없었다. 문제는 전화였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환자 주치의나 환자 보호자와 연락을 해야 하는 경우가 제일 곤혹스러웠다. 내 딴에는 또박또박 상황을 전달했다 싶은데도 상대편에서 못 알아들어 되묻고 또 되묻고 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환자에게 연락을 해야 할 때는 함께 일하는 조무사에게 시키면 되지만 전화로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할 때는 의료법상 반드시 내가 해야 했다. 스펠링을 물어보거나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래서 꾀를 낸 것이 전화를 피하는 방법이었다. 전화가 울리면 난 잽싸게 약국으로 들어갔다. 병동의 약국은 간호사실 뒤에 붙어 있어 들어가기가 쉬웠다. 전화가 아무리 오래 울려도 난 약국에서 무언가 급한 일을 하는 척하며 위기를 피했다. 전화가 오래 울리면 간호감독이 받아 의사의 처방을 적어서 내게 갖다 주곤 했다. 미국인 간호감독이 적어준 것이니 틀릴 일은 없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눈치를 챈 간호감독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더는 피할 수 없겠구나 싶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전화 받기가 가장 두렵다고. 간호감독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전화가 울리면 둘이 동시에 받고, 둘이 동시에 적어, 둘이 내용을 맞추어본 후 차트에 옮겨 적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 후 전화가 오면 감독과 나는, 서로 연결돼 있는 전화기로 동시에 받았다. 내가 좀 틀리고 못 알아들으면 그녀가 정정을 해주었고, 나쁜 발음은 그 자리에서 교정해주었다. 그리고 서너 달 후, 그녀는 “이제 혼자 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때,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두려움에 떠는 새가슴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자신 있게 전화를 받고, 거의 매일 스무 통화 이상 전화를 하고, 매일의 시작과 끝을 e메일로 처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더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지 않았을까. 다시 또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웠던 분, 이미 퇴직했겠지만 어디선가 아직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곱게 백발을 만들어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도 병실 약국에 오래 있는 신참 간호사를 보면, 물론 투약 준비를 하는 것이겠지만, 혹 불편한 시간을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옛날의 나를 기억하며 들여다보게 된다. “뭘 좀 도와 줄까? 바쁜 일 있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얘기해.” 가벼운 이야기를 붙여보면서 말이다.

    케이스 매니저

    케이스 매니저로 처음 배치받은 곳은 정형외과 병동이었다. 중환자실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 고관절이나 무릎관절 수술을 하고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이었다. 거의 독거노인이었는데 회복을 위해 재활 병동이 있는 노인요양원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환자는 101세였다. 할머니는 입원 직전까지 단독주택에서 혼자 살았다. 식사는 물론 간단한 청소까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창가에 만들어놓은 작은 화분에 박하와 민트, 타임 같은 향기 나는 채소를 기르며 소일했다는 할머니. 며칠 전 봄눈 내리던 날 베란다로 나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졌고 대퇴골이 골절돼 실려 왔다. 할머니는 넘어짐과 동시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움직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응급호출기(Life Line) 목걸이를 걸고 있어 바로 눌렀다. 응급실에 도착, X-Ray와 CT 촬영을 했는데 출혈 가능성이 큰 복합 골절로 판단돼 바로 수술을 했고 수술 후 병동으로 옮겨왔다.

    기록에 의하면 운전을 하지 않았던 것말고는 모든 일상을 독립적으로 해결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80세의 딸이 살고 있고 또 두 블록 건너에는 70이 넘은 아들이 살고 있어 할머니 집을 매일 들렀다고 한다. 주말이면 할머니를 태워 가까운 마켓에서 일주일치 식재료를 사고 소소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매주 토요일,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 겸 점심의 브런치를 하는데, 할머니는 시나몬 뿌린 프렌치 토스트와 달걀 반숙을 좋아했다. 구수한 구전 동화처럼 풀어놓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80세의 딸이 수술을 마친 어머니 곁에 서서 독백처럼 들려준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자 할머니는 육두문자로 통증을 호소했다. 진통제를 많이 주면 호흡곤란이 올 것 같고 소량만 주면 통증이 너무 심해 재활 치료를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언어폭력에 딸이 민망하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표시로 윙크를 해 보였다. 이틀 후, 통증이 많이 사라지자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친 쪽 다리는 힘을 줄 수가 없어 다치지 않은 쪽만 이용해 움직이는 일은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5분도 못되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두 팔을 내저었다.

    환자가 자신의 상황을 잘 인지해 바로 집으로 퇴원하는 것이 힘들고, 퇴원시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바로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할 차례다.

    “할머니,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이제 재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데 퇴원 후 집엔 간호해줄 사람이 없네요.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일을 나가고 딸은 증손자를 보기 위해 손자네 집으로 가신다면서요. 그래도 자식들 집으로 퇴원해 가실래요, 아니면 재활 간호를 할 수 있는 노인요양원으로 보내드릴까요?’

    “아, 거기.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지. 그땐 폐렴이 걸렸었을 땐데 말이야. 회복되는 시간이 좀 길었지. 거기, 나쁘지 않더라. 호텔 룸서비스처럼 잘 차려진 밥상을 내 코앞까지 갖다주질 않나, 스크린 텔레비전도 있지, 널따란 독방이지, 게다가 물리치료실에 가면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 그 옛날, 남편과 함께 추던 탱고 생각도 나고 말이야, 댄스홀이 멋졌거든. 그래, 거기 가지 뭐. 사람들은 요양원이라고 다들 우중충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야. 난 거기 있었을 때 아주 편했어. 청소할 필요가 있나, 끼니 걱정할 이유가 있나. 하하하.”

    옆에 서 있던 80세의 딸이 어쩔 줄 모른다.

    “그러니까 엄마. 제가 우리 집에 모신다고 했잖아요. 말을 안 들을 땐 언제고….”

    “너희 집보다는 내 집이 낫고, 거긴 말이야 일종의 호텔 서비스 같은 게 항상 있다는 거야. OK! 퇴원할 때가 되면 그곳으로 보내줘. 그런데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은 말이야. 이제 무슨 일 있어도 다시는 수술 같은 것 안 할 거야. 그냥 갈 수 있게 해줘. 내가 가야 할 곳은 저 산 넘어 평화로운 그곳뿐이야. 하느님이 날 목 빼고 기다리신단 말이지.”

    환자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심폐 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다는 것을 하지 말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어떤 경우에도 응급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의미인 보라색 DNR(Do Not Resuscitation) 스티커를 찾아 차트에 붙이고 보라색 팔찌를 채워드렸다.

    컴퓨터에 입력돼 있던 할머니에 관한 병력을 요양원에 송고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춘설은 사라지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작은 잎들이 봉곳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계절은 또 이렇게 오고 있었다. 퇴근 후에 봄옷들을 챙겨 먼지를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콜로라도의 폭설

    3월이 되자 봄기운이 제법 따스하다. 성급한 마음으로 봄을 준비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봄은 색깔이 참 곱다. 흰 꽃잎 뚝뚝 떨구는 백목련, 멀리서 보면 노랑의 폭포를 이루는 개나리,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 함박꽃눈을 선사하는 벚꽃, 나지막하게 핀 연산홍까지 초록과 연두를 바탕으로 한 폭의 고운 유채화를 그린다.

    산 아래 동네의 봄은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겨우 온다. 죽은 것 같았던 고목에서 새순이 돋는 것으로 시작하다가는 봄을 시샘하는 춘설이라도 내리면 어리고 연한 잎은 금세 얼어버린다. 늦된 것들만 여름을 맞으며 금세 웃자라 한 순간 진초록 함성을 내지르고 만다. 순간, 계절을 바꿔버리는 이곳의 봄은 낯설기만 하다.

    폭설이 내렸다. 차고 문을 올리니 눈이 무릎 위까지 빠질 만큼 쌓였다. 차를 뺄 수 있게 눈을 치우고 남편은 길이 좋지 않아 위험하다며 날 데려다주겠단다. 눈이 왔다고 일을 안 가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던 나는 조금 늦기는 했지만 남편이 데려다준 덕택에 출근을 했다.

    그러나 12층 사무실은 유령의 집처럼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폭설로 도시 교통이 마비되어 입·퇴원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아주 급한 환자나 대형 사고가 아니면 응급실로 올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이런 천재지변 이상기후에는, ‘폭설로 인한 결근’이 용납된단다. 폭설로 도시 전체가 설국(雪國)으로 변하며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 결근을 해도 되는 충분한 핑계가 된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케이스 매니저가 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새내기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환자 입·퇴원도 없고 의사들 지각사태가 속출해 예정됐던 모든 수술은 전면 취소되었다. 응급실도 음산하리만큼 조용했다.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없어 눈사태로 인한 사고도 거의 없었다. 각 병동도 현재 입원해 있는 환자들만 계속 돌보면 되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컴퓨터를 켜니 이곳의 기후 상황과 눈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곳에 본부를 둔 의료 보험회사들로부터 온 메시지들이 있었다. 환자들이 왜 퇴원하지 않았느냐? 임상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느냐? 언제 퇴원시킬 것이고, 어디로 퇴원시킬 것이냐 등등. 내가 맡은 병동의 환자가 아니어도 일일이 답을 했다. 현재 천재지변의 비상사태이므로 아무도 퇴원할 수 없다는 것과 다음 날 기상상태가 좋아져 각 층 케이스 매니저가 출근하면,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알려줄 것이고 퇴원 정보 등도 보내주겠다고. 그리고 각 층을 돌아다니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는지 알아보았다.

    그래도 시간은 겨우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었다. 남편이 날 데리러 왔다. 집들도 거리도 낮은 언덕들도 온통 순백색인 도시. 차선이 어디인지 신호등은 무슨 색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리를 거북이걸음으로 퇴근했다. 다음 날, 디렉터는 내가 출근했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기후 속에서 출근하다 다치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럴 땐 집에서 쉬어도 좋다는 것이다. “내 사전에는 눈 때문에 출근을 안 하는 일은 없다”고 하자, 이 도시는 다르단다. 여기서는 그런 이유가 통한다고. 목숨을 담보하는 출근은 제발 하지 말란다. 그러나 보험회사에서는 현지의 상황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속속 연락해왔다. 눈 속을 뚫고 갔던 출근길, 새로 시작한 도전에 점수를 보태는 일이 되었다.

    폭설은 아직도 이 도시가 낯선 이들에게 계절을 지나는 길목에서 두려운 복병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다시 돌아온 중환자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두 개의 병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중심으로 하고, 또 하나는 중환자실을 중심으로 층마다 일반내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심장내과 등으로 나뉜다. 병동마다 매니저가 있고 케이스 매니저는 병동의 매니저 및 의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환자 돌보는 일을 한다. 의사가 환자의 치료에 중점을 둔다면, 병동의 매니저는 간호사들의 질적인 간호에, 케이스 매니저인 나는 환자의 경제적인 측면까지 염두에 두고 최적의 치료와 간호를 받아 최상의 결과를 갖고올 수 있느냐는 것에 중점을 둔다.

    정형외과 병동에서 2년쯤 지나자 새로 시작한 케이스 매니저 역할에도 이력이 붙었다. 어떤 경우도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가다보면 해답은 늘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용한 프로그램이 많아 행려환자나 궁핍하고 무보험인 환자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비싼 약을 구입해야 하는 경우 최소한의 금액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또한 커다란 제약회사들은 환자를 보조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비싼 신약을 공짜로 공급해주기도 한다. 보건소 같은 곳은 주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런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거나 그곳에 직접 연결해 주기도 한다.

    환자가 퇴원한 뒤 갈 곳이 없다면, 무숙자 홈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주민이면 공공 보건기관을, 사회보장번호가 없는 불법체류자이면 병원 안의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군 퇴직자이면 가장 가까운 곳의 군인병원을 이용하게 주선한다.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동안 완벽한 퇴원준비가 되어야만 퇴원 후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 퇴원 준비를 위해서 하루에도 몇 통의 전화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e메일도 물론이다. 병원 내에서 쓰는 휴대전화를 점심시간은 물론 화장실에 갈 때도 들고 다닌다.

    그러던 중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 자리가 비었다. 중환자실의 임상 경험이 제일 많았던 나는 자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늘 까칠하게 대했던 젊은 간호사도, 나의 악센트와 문화의 차이를 염려했던 중환자실의 매니저도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직장 생활에서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가 되어 돌아가는 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환자실로 돌아가 케이스 매니저 일을 이렇게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동시에 생겼다.

    돌아온 곳. 촉각을 다투는 곳. 다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했다. 매일 오전 9시30분, 라운딩이 있다. 환자를 직접 간호하는 간호사로부터 환자 상태를 듣고, 문제를 지적하고, 다른 분야의 의료팀과 의견을 나누고, 기록해 컴퓨터에 입력한다. 36개의 중환자실 침상, 라운딩에는 한 시간 이상이 족히 걸린다.

    라운딩을 마치면 환자들의 상태에 따라 일의 경중이 결정된다. 이제 중요한 것부터 처리해간다. 중간 중간 환자와 보호자, 의사들과 미팅하고, 퇴원 준비시키고, 의료 보험사와 전화와 e메일을 주고받는다. 하루는 너무 짧고, 시간은 빠르게 간다.

    일하는 동안 만나는 이야기들은 저마다 각각의 사연이 있다. 내 인생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 혹은 지나가는 행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며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리고 최대한 환자의 입장이 되어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환자실로 돌아와 몇 달 지난 뒤부터 까칠했던 간호사나 내 능력을 의심했던 매니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듯 잘 지내게 됐다. 또 한 번 ‘시간은 약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최선을 다하는 나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이젠 누구도 내 영어를 흠잡거나 내가 준비한 퇴원 계획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

    Kathy Smith

    어느 날 암 병동의 케이스 매니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 환자가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간 되는 대로 가기로 하고 환자의 병력을 미리 알기 위해 방문해야 할 환자 이름과 방 번호를 물었다. ‘Kathy Smith’. 성명만으로는 한국인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환자가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60년, 이후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50년 가까운 세월을 미국에서 살았으니 완전한 미국인일 것도 같았다. 병명은 자궁 경부암과 폐암.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점심시간이 지나 시간 여유가 조금 생겨 환자를 찾아가 병실 문을 노크하며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간호사이고 케이스 매니저입니다.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어눌하고 악센트 심한 영어로 답했다. 한국말이 더 편하면, 한국말로 답을 하라고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 그제야 한국말을 시작했다. 6·25 이후 미군 병사였던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고, 한때 한국의 가족들과 연락을 했었지만 모두들 고달픈 짐이 되어 인연을 끊고 산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으려고 노력해보았으나 임신이 되지 않았고, 담배를 피운 것은 50년이 넘었다.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대화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고 그래도 어디로 어떻게 퇴원시켜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국인 남편, 할아버지는 치매가 심해 한 요양원에서 지내는데, 그곳에 들어간 것이 1년은 넘었단다.

    “그럼, 혼자 사시네요? 교회는 다니세요?”

    한국 교회를 몇 번 나가보았지만 적응이 안 되어 지금은 어디에도 교적을 두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의 병을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 같다며 어두운 표정이다. 나를 ‘애기엄마’라고 부르며, 애기엄마가 보기에도 그런가 하고 묻는다. 늘 듣는 질문이지만 늘 답이 궁하고 당황스럽다. 가끔은 애매하게 끝을 흐리고 또 가끔은 확실하게 답을 한다. 어떤 답이 되었든 쉽지는 않다.

    “그런 것 같아요. 상당히 진행된 암이거든요. 한국에 가족 있으면 연락해서 들어오게 하고 남편 쪽 친척들한테도 연락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환자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도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 극 처방의 답을 택했다.

    “내겐 아무도 없어, 남편이 내 유일한 친구였고 전부야. 그 사람 친척들하고는 연락을 전혀 안 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뭐. 그 사람, 저렇게 아프기 전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정말 잘했어 나에게. 어디 가자 그러면 두말도 않고 같이 가주고, 뭐 사달라고 하면, 이틀도 안 되어 사주곤 했는데…. 한 2년 전부턴가 엉뚱한 말을 자꾸 하는 거야. 날 보고 돈 줄 테니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하고, 이상한 몸짓도 시키고 그러다간 또 미안하다며, 손잡고 쓰다듬고, 배고프지 않으냐고 물어보고…. 그러다가 아이처럼 대소변도 못 가리게 되어서 요양원으로 보냈지.”

    할머니가 얼마나 아픈지 알려고 갔었는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말았다.

    “그럼, 친구 분들은요? 꼭 할머니 친구가 아니라도 할아버지의 친구들 중 누구라도 연락할 사람 없나요. 그럼, 1년 동안 할머니 혼자 어떻게 사셨어요?”

    이어지는 할머니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없고, 오랫동안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살 만큼 살았으니 편안하게 가면 되지 뭘 그리 아등바등 하겠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마침 회진을 돌던 암 전문의가 들어왔다. 대화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며,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을 알려준다. 할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편안히 갈 수 있는 임종 간호(Hospice Care)를 택했다. 그러나 실제 죽음과 마주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단지 혼자 집으로 퇴원하게 되면 집에서 사용해야 되는 산소와 자궁 경부에서 흐르는 악취의 분비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영양분이 충분한 식사, 적당한 운동, 병의 진행에 따라 진통제가 필요할 수도 있는데 제 시간에 올바른 약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운전을 할 수 있어 혼자 장도 보고 할아버지 면회도 가고 의사를 보러가는 일 등을 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운전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어 매일 해야 하는 일상에 커다란 불편은 물론이고 혼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서너 번 전화가 왔고 삐삐도 두어 번 울렸다. 금방 퇴원할 것이 아니므로 생각 좀 해보자며 방을 나오다가 다시 한 번 한국 친척들의 연락처는 정말 없는지 물어보았다. 할머니가 직접 연락하기 불편하면 대신 전화해드리겠다고 말하며 일어섰다. 다음 날, 다시 환자 방을 찾았다. “오, 애기엄마 오늘 참 섹시하네, 검은 스타킹도 그렇고, 입술 색도 그렇고, 남편이 좋아하겠어, 호호호”라며 반갑게 말문을 연다.

    할머니 말에 난 참 당황스러웠다. 내 차림새를 보고 누구도 섹시하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편이며 목이 깊게 파였거나 민소매거나 꽉 끼는 바지 같은 것은 절대 입지 않는다. 그런 날 보고, 왜 그런 표현을 했을까. 어쩌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찬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생글거리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생각해보셨나요? 할아버지가 입원 중이신 요양원에 함께 보내드릴까요? 그곳에서도 임종 간호를 동시에 받을 수 있거든요. 한국 연락처는요?”라고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퇴원 준비를 해달라신다.

    “근데 말이지,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혹 애기엄마가 와줄 수 있어?”

    어느 정도의 책임이 나에게 주어질지 모르지만 혼자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혼자 충분히 외로웠고, 그 외로움이 사무쳐 아픔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돌아가시게 되면 카운티에 연락을 취해 사후 처리를 하면 되고, 퇴원 후 몇 번 찾아가다보면, 한국 친척들이나 할아버지의 친척들의 연락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두 가지가 다 안 된다 하더라도 한국 할머니라는 것만으로도 도와드려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한국 친구들은 가끔 내게 그런 말을 한다. 미국 생활 25년이 넘고 미국시민권자가 된 뒤에도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 훨씬 지났으니 이젠 확실한 미국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그러나 그것은 아주 요원한 이야기 같다. 아폴로 안톤 오노와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경기를 할 때 난 무조건 한국 사람을 응원한다. 오노가 미국인의 우상임에도 그를 좋아할 수가 없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한국인 이름의 환자가 있으면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더 살핀다. 어쩌면 이것은 역차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민자들이 이룬 사회이므로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요양원으로 임종 간호를 받기 위해 퇴원하던 날, 한국말로 커다랗게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드렸다. 급할 때 꼭 연락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설핏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꽉 잡는다.

    “고마워, 애기엄마. 혼자인 것은 참으로 무서워!”

    할머니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별일 없다는 것이겠지만 혹, 적어드린 쪽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연락을 드려봐야겠다.

    빛의 터널

    또 다른 할머니 환자도 있다. 아주 곱고 깨끗하게 늙으셨다. 병명은 뇌졸중. 뇌출혈이 심해 호흡기능이 저하된 상태. 인공호흡기를 단 채 경과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할아버지를 다음 날 만났다. 환자가 살 수 있는지 무척 걱정했다. 자식들은 모두 다른 주에 살고 있는데 연락해 오도록 할까 물어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환자는 아무런 차도가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자는 듯이 누워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호흡하는 할머니는 참 편안해 보였다. 물론 인공적으로 잠을 재우는 약물과 진통제를 간혹 주사했지만 전신 감염 증상도, 인공호흡기로 인한 폐렴 증세도 없었다. 가족들이 다 모이자 잠을 재우던 약물을 줄이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할머니가 깨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빨리 주위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다음 날, 물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는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난 거기 가서 애들이 잘 있는 거 보고 왔어요.”

    “무슨 소리야?”

    “거기 갔더니 죽은 우리 아이들이 다 잘 있습디다. 아직 어린데 날 알아봅디다. 한참 안아보고, 함께 있으려고 했는데, 당신이 기다린다며 아이들이 자꾸 가라고 해서 돌아왔어요.”

    “그래. 아이들이 다 잘 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힘들어 보이지는 않고?”

    되묻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걱정 안 해도 되겠습디다. 뭘 하는지 몰라도 보기 좋았어요.”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을 꼭 잡은 채 한참을 놓지 못했다.

    노인 부부에게는 자녀가 다섯이었다. 그중 셋이 노인 부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둘은 아주 어릴 적에, 또 하나는 사춘기 때 사고로 먼저 갔단다. 자식들을 먼저 보낸 할머니는 늘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여보, 답답해! 답답해 죽겠어.”

    손으로 가슴 쓸기를 습관처럼 했던 할머니.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심정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리라.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음 직전까지 갔는데 그곳에서 죽은 자식들을 다 만나고 온 모양이다. 죽은 아이들을 만나고 왔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할머니의 깊은 꿈속에서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일이든 할머니는 먼저 간 자식들을 만났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잘 지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앞으로의 삶에서는 명치끝의 고통이 덜하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손등을 쓸며 “아이들 만나러 가느라 이렇게 쓰러진 거였구먼. 이제 만나고 왔으니 그만 털고 일어나. 난 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제 그만 아이들을 가슴에서 내려놔. 이젠 내 손만 잡고 있으면 돼”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죽은 자식들이 잘 지내는 것을 확인하고 온 때문인지 할머니는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좋아졌다. 후유증으로 말은 느려지고, 왼쪽 팔은 약해졌지만 재활 치료를 받으면 생활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던 자식들의 죽음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며 편안해지고, 할아버지와 함께 오래오래 해로하라고 말씀드리자 고개를 끄떡이는 표정이 참 부드럽다. 타지에서 왔던 장성한 아들딸은 모두 돌아갔다.

    조용한 시간에 할머니가 다녀온 곳은 어떤 모양이며 멀리 보이는 빛은 어떤 색이더냐고 물어보았다. 모양은 분명하게 기억 못하지만 긴 터널 같고 그곳의 빛은 참으로 곱고 아련하더라고 전해준다. 아이들이 있던 곳은 아주 포근하고 따뜻하며 푹신한 통같이 느껴졌단다.

    그래! 천국은 있는 것이구나! 천사 같은 아이들이 먼저 가 살고 있는 곳이니 속세와는 다르겠지. 나도, 우리들도 그곳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날 밤은 기도하는 자세가 되어 그분의 소리 청해 듣고 싶었다.

    중년의 사랑

    토요일 밤, 응급실을 통해 들어온 환자는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정신이 혼미했고 상황 판단을 잘 하지 못했다. 출동한 경찰과 구급요원들에 의해 간단한 처치를 받고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는 바로 인공호흡기를 걸어야 할 만큼 상태가 악화되었다. 즉시 뇌 단층 촬영을 했고, 지망막하 출혈, 경막하혈종과 왼쪽 늑골 골절, 팔목 골절, 왼쪽 대퇴 골절 등이 발견되었다.

    연락을 받은 가족들이 응급실로 달려왔다. 한눈에도 임신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젊은 여자는 의식 없는 환자를 잡고 울다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잠시 후였다. 또 다른 여자가 도착해 본인이 환자의 부인이라고 소개했다. 무슨 소리냐고? 임신한 여자도 자기가 부인이라고 했는데….

    후에 도착한 여자는 자신의 ID를 보여주며 환자와 같은 성을 쓰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가족들이 두 여자를 잡고 설명을 했다. 임신 중인 여자는 환자의 여자 친구였고 나중에 도착한 여자는 법적인 아내였다. 두 여자는 서로 알지 못했고 더구나 법적인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동거 중이었고,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환자의 사고보다 더 큰 충격인 것 같았다. 응급실 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청원경찰까지 동원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다른 환자 보호자들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모여들었다. 환자의 큰아들이 나서서 겨우 진정시켰다.

    환자는 다른 부분에 비해 뇌출혈이 심한 상태여서 즉시 수술실로 갔고 출혈된 부위를 절개하고 고여 있던 혈액을 제거했다. 그리고 중환자실로 이송돼 왔다. 동시에 법적 아내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방문자들을 제한했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므로 절대 이혼이 불가하단다. 환자가 집을 나간 것은 8년 전, 그러나 가족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고 서로 연락도 주고받았으며 ‘이혼’이라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중년의 위기가 끝나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단다.

    환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 2년 전부터 사실혼 관계였던 것을 가족들은 알면서도 지금까지 숨겨주었다며 상당히 노여워했다. 그래도 그녀는 절대 이혼 불가를 주장하며 자신이 환자를 돌볼 것이라고 선언했다. 임신 5개월인 여자 친구도 가만있지 않았다. 병원장을 찾아가 읍소하며 자신에게도 권리를 달라고 간청했지만 ‘법은 법’이었으므로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그들 중간에서 중환자실 간호사들과 나는 양쪽 주장을 끊임없이 들어주어야 했고, 환자 간호보다는 가족의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뺏겼다. 환자 상태는 많이 호전됐었으나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다. 환자를 뇌 손상 환자 재활 치료를 위한 전문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재활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내가 살고 있는 덴버와 여자 친구가 살고 있는 스프링스 두 곳에 다 있었다. 덴버와 스프링스는 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거리다. 아내는 환자를 덴버로 옮겨달라고 청해왔고, 여자 친구는 스프링스에 그냥 있게 해달라며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나에게만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담당 의사들과 병원장, 간호부장 등등 병원의 모든 채널을 동원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나는 모두 함께 모여 터놓고 이야기해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름 하여 ‘Family Care Conference(가족 간 대화의 장)’을 통해 환자를 어디로 옮길 것인지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병원의 간호부장과 병원 자문 변호사도 함께했다.

    의사들과 병원 팀, 가족들, 그리고 환자의 아내와 여자 친구 등이 함께한 자리. 처음 환자가 응급실에 오게 된 상황부터 현재 중환자실 경과까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이젠 중환자실을 벗어나 재활간호가 절실해 환자를 다음 단계로 옮길 때라고 했다. 옮길 곳을 결정해야만 환자가 제 시간에 재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병원 팀은 가족들의 주장을 경청했고 여자 친구에게도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내는 잘 참고 들어주었다. 그리고 환자의 큰아들이 결정을 내렸다.

    “우리 아버지의 법적인 아내는 내 친엄마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녀는 분명 아버지의 법적인 아내이고 임신 중인 여인은 죄송하지만, 법적인 권리가 없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내 동생을 임신 중인 여인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가능하다면 그녀도 아버지의 간호에 한몫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십시오. 예를 들어 환자 방문시간이나 날짜를 번갈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불편하겠지만 여자 친구도 조금 양보해 덴버까지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족은 덴버에 살고 당신만 스프링스에 살고 있잖아요”하며 여자 친구를 쳐다본다.

    그녀는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법적인 아내도 여자 친구에게 방문 시간을 충분히 주겠단다. 한국과 달리 간통죄라는 것이 없는 미국. 이혼이 무척 쉽다는 이곳에서 드문 경우이지만, 복잡하기만 했던 ‘환자의 사랑타령’을 뒤로하고 환자는 덴버의 한 재활병원으로 옮겨갔다. 환자의 빠른 쾌유를 빌고, 언젠가 완전히 깨어났을 때 그의 올바른 선택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그의 이야기가 기억 어디쯤으로 사라질 무렵, 입구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누굴까? 약속한 사람은 없는데. 문밖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다. 여자 친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참으로 생소한 모습의 건장한 남자도 함께 있다. 여자는 가볍게 목례를 건네더니 얼른 다가와 포옹을 한다.

    “정말 고마웠었어.”

    “그래. 근데 옆에 있는 이가 그 환자? 네 남자 친구?”

    각종 기구를 꽂고, 환자복을 입고, 수염을 자르지 못해 덥수룩했던 그때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아주 핸섬한 중년 남자가 돼 있었다.

    여자 친구는 나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단다. 그 당시 법적인 아내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모이는 회의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가족들은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뻔했다며 살며시 웃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속담처럼, ‘통 속에 들어 있는 벌레들을 모두 꺼내놓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법일 수도 있다. 보기 흉하고 만지기 싫은 더럽고 불편한 것이라도 통을 열어 오물을 꺼내지 않으면 막힌 통 속의 문제는 영영 볼 수가 없으니까.

    옆에 있던 그에게 입원해 있던 방과 기구들을 보여 주며 설명해준다. 그도 만나는 의료팀 하나하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언제 그렇게 심하게 다쳤던 사람인가 싶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그의 모습에서 ‘신의 부름을 받기엔 아직 이른’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옆에 서 있는 여자 친구의 배가 만삭이었다.

    “언제가 예정일이지?”

    “이번 주말이야.”

    “준비는 다 되었어?”하고 다시 묻자, 물론이란다.

    “아빠가 옆에 있잖아. 뭐가 더 필요하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고 둘을 배웅하러 중환자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가 고마움의 표시라며 가을색 완연한 국화 화분을 건넨다. 작은 소리로 귀엣말을 한다. “저이,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절차가 진행 중이야. 그쪽에서도 지난 몇 달 동안의 상황을 보면서 완전히 포기한 것 같아.”

    나의 상식으로는 아내가 처해 있을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떠나간 사랑을 잡고 매달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내 의견이다. 두 사람 사랑의 증표인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 그들의 새 삶의 활력소가 되길 기도했다. 스쳐 지나는 것들은 모두 인연이라는데 중환자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만나는 이들도 내게는 참으로 깊은 인연인가 싶다. 그전에 한번 만난 적이 없어도 그들은 지난 이야기를 혹은 현재의 상황들을 술술 잘 풀어놓는다. 물론 그래야만 환자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누구에겐가 털어놓고 나면 시원한 기분이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능하면 좋은 경청자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퇴근길, 하늘이 무척 푸르고 높다. 가을 이야기가 옆에서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주말 산행에서 만났던 숲은 아직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이제 곧 색깔을 갈아입을 것이다. 더위 속에서 지쳤던 삶을 내려놓으며 색깔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고운 가을사랑을 전해 주고 싶다.

    그대 사랑/ 가을 사랑/ 단풍 일면/ 그대 오고/

    그대 사랑/ 가을 사랑/ 낙엽 지면/ 그대 가네/

    그대 사랑/ 가을 사랑/ 파란 하늘/ 그대 얼굴/

    유행가 한 가락을 흥얼거린다.

    그녀의 선택

    그녀가 중환자실로 내려온 것은 벌써 3일째. 상당히 진행된 유방암 진단을 받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양쪽 가슴 적출은 물론 가슴 주위와 겨드랑이 임파절까지 모두 제거해냈다. 곧 이어 항암요법을 시작해 5번째 투약을 마쳤다. 독한 주사약 때문에 탈모가 심해 머리에는 터번을 쓰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했으며 너무 깡말라 쇄골과 광대뼈도 두드러졌다. 항암 요법을 할 때 흔히 동반되는 부작용인 구토가 심해 탈수증상이 있었고 수액과 전해질 보충을 위해 암 병동에 입원한 참이었다. 입원 중 흉부 가슴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종양이 발견되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조직검사 계획을 잡았고 수술실로 내려가기 직전 심한 호흡 곤란이 생겨 중환자실로 급하게 옮겨왔다.

    그녀는 다행히 의식이 분명했고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할 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아 코를 통해 공급하는 산소량만 최대한 올려놓았다. 그날 아침 라운딩이 끝나자 그녀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단다. 그녀는 병이 점점 나빠져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할 만큼 상태가 악화되면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의사 결정권을 일임한다는 뜻을 전했다.

    콜로라도 주법은 의식이 있는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면 의사 결정권을 누구에게 주겠느냐고 반드시 묻는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에서는 배우자, 자녀, 부모의 순서로 하지만 콜로라도 주는 환자가 지정한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꼭 가족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친구나 회사동료, 심지어는 룸메이트를 지정할 때도 있다. 일정 양식에 사인을 하고 인증을 받아놓으면 된다.

    그녀는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도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고, 심장에 이상이 있어도 심폐 소생술을 실시하지 말라는 의사도 명확히 밝혀왔다. 함께 일하는 의료팀들에게 그녀가 원하는 사실들을 알리고 카피를 만들어 환자차트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여자였다. 작은 컨퍼런스 룸에서 마주 앉았다.

    “아는 것처럼 우리 엄마는 66세, 유방암 말기 환자야. 그런데 남자 친구는 49세로 나보다 겨우 다섯 살 많아. 우리 엄만 재력이 좀 있어. 내가 볼 때 저 남잔 엄마의 돈을 노리며 엄마가 치료받는 것을 자꾸만 방해하는 것 같아. 그리고 엄마는 어떻게 날 두고 저 남자한테 의사 결정권을 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 난 엄마의 유일한 피붙이거든. 네가 어떻게 좀 도와줘.”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남자 친구가 돌아가고 딸이 그녀의 침상가를 떠난 틈을 타 그녀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넌 정말 네 남자 친구에게 모든 결정을 하게 할 거야?”

    “물론”이라고 딱 잘라말했다. 그리고 한참 생각하더니 호흡이 가쁜데도 불구하고 긴 설명을 이어갔다.

    “네가 보기엔 내가 미쳤단 생각이 들지도 몰라. 젊은 남자에게 정신을 빼앗겨 모든 결정권을 그에게 주었다고 말이야. 그러나 너는 내 사정을 몰라. 그는 내가 부를 때면 언제든지 달려와. 어떤 일을 부탁해도 ‘No’라고 대답한 적이 없어. 특히 병이 심해지고, 몸이 힘들어 꼼짝할 수 없을 때 그는 날 업고 의사를 찾아갔고, 그 독한 약들 때문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낼 때도 그 더러운 분비물을 닦아내면서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왔어. 누워 있는 상태에서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줘. 절대 남의 손에 나를 맡기지 않아. 그거면 되지 뭘 더 바라겠어.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나를 사랑해. 그는 최선을 다해 나를 간호해주었지. 지금 내가 더 이상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해볼 만큼 해보았잖아. 이젠 그만 편해지고 싶어. 그의 품 안에서 잠들고 싶은 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야.”

    “그러면 딸은?”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인 성인이잖아.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어 내 재산을 바라지는 않을 거야. 그 아인 날 이해해주리라고 믿어.”

    차마 딸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말도 못하고 말았다. 확고한 그녀의 선택 앞에 그것이 최선이다라고 밀어놓는다.

    내가 만약 그녀의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다. 머리로는 이해되다가도 막상 어떤 사실에 부딪히면 한국식 사고방식이 앞선다.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른 생각은 스스로가 갖는 편견의 덫이 되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를 좁아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나라면 남은 딸에게 모든 것을 주었을 것이다. 함께 지낸 남자 친구에게는 ‘고마웠고, 사랑했어’정도로 끝낼 것 같았다. 젊은 남자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만 기억하고 살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은 꼬리를 물고 답이 없는 것들은 헛바퀴를 돌 뿐이다.

    에필로그

    나의 일상 속에는 늘 죽음이 있다. 백수를 넘긴 ‘호상’에도 남겨진 가족들에겐 슬픔과 아쉬움이 있다. 하물며 20대의 주부라든지 40대의 가장이면 그 고통의 정도는 상상하기 힘들다. 사연 없는 일생과 이유 없는 죽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환자실 간호사 15년과 케이스 매니저 4년. 촉각을 다투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일을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빠른 회복 후 일반 병동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지난 겨울은 그렇지 않았다. 신종 플루가 그 몫을 단단히 했던 때문인지 너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흰색 시트를 덮어쓴 들것이 연이어 자동 개폐문을 열고 나갔다. 긴 호흡을 하며 애써 외면했다.

    어떤 죽음이 쉬울 수 있을까. 심장 모니터에 ‘삑~~~’하는 소리와 동시에 일직선이 그어지며 심박동도 호흡도 모두 멈추는 그 시간. 남겨진 사람들은 분노하거나 멍해지며 맞닥뜨린 사실을 부인하곤 한다. 혼돈과 공포의 순간들. 그 상황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은 내 직업의 한 부분이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싶어도 사람들의 아픔은 내 가슴속에서도 응어리가 되어 묻힌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같은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고 그 정도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수행 잘한 수도승이나 신실한 기도를 하는 수도자라도 죽음, 그 뒤란을 본 적은 없어 열반과 천국에 대한 기대가 두려움과 동시에 평안이 되어 다가오는 것 아닐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는 참 다르다. 직면할 때까지 자신에게는 전혀 오지 않을 일처럼 외면하는가 하면 불안해하며 질병과 맞서 싸우기보단 정신적인 황폐화로 먼저 지는 사람도 있다. 또한 나처럼 죽음을 자주 대하는 사람들은 죽어도 괜찮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잘 떠날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이 든다.

    삶의 연속선상에서 죽음은 잠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포물선을 그으며 떠나는 일이다. 포물선이 둥그렇게 그어지며 돌아올 그 시간은 정말 있을까. 그곳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 알아보기는 할까. 이어지는 의문들도 ‘생자필멸(生者必滅)’, 오면 가야 하는 우주의 법칙 안에서는 해답이 없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 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갱년기 증상처럼 뜨거운 열이 되어 가슴으로 올라온다. 창을 열고 얼음냉수를 소리 나게 들이켜지 않으면 열기는 가라앉지 않는다. 오랫동안 열어놓지 못해 답답해 생긴 속병을 이젠 좀 내놓고 싶다. 그래야만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퇴근 후 남편과 마주 앉아 와인 한잔하며 뒷마당과 이어진 작은 동산을 바라본다. 지난 시간 젊음의 숨가쁜 오르막이었어도 열심히 올랐기에 지금 내려갈 시간을 준비할 수 있다. 아직 학생인 아들을 생각하면 엄마의 무게 때문에 힘겨워 피해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자책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몫으로 두고 싶다. 아직도 한국에 혼자 계시는 친정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숙제다. 내 환자들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입·퇴원 방법을 마련해주면서도 직접 만나는 나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커다란 벽이다. 언젠가는 모시고 살게 되겠지만 한국과 미국이라는 거리의 한계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너무 많은 사연을 만났다. 삶의 한순간에 함께했던 것들은 내려놓으며 염색을 해야 하는 머리카락과 눈가에 자글거리는 주름과 굽은 등 뒤로 이젠 조금씩 편해지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추억의 필름이 빠르게 돈다는 것이다. 더 빨리 가는 ‘FF 단추’를 눌러 스쳐가는 영상들을 본다. 한 지점에서 스톱을 누른다. 머무르고 싶었던 시간이 화면 가득히 뜬다. 흑백이거나 유행이 지난 차림이다. 다시 플레이 단추를 누르면 화면은 움직인다. 또다시 앞으로 간다.

    지난 사연들도, 앞으로 만날 이야기들도 나의 성긴 언어들로 짠 직조물이겠지만 부드러웠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본다. 와인 잔을 들어 살짝 부딪치고는 한 모금 천천히 넘긴다. 입 안에는 와인 향이 가득하다.

    당선소감

    죽음 앞의  삶
    전지은

    ● 1956년 강원도 강릉생

    ● 강릉여고,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 간호학과 졸

    ● 1984년 도미, 도미 전 이름은 최지은(崔志恩)

    ● 現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펜로즈 병원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

    콜로라도의 가을은 참으로 곱습니다. 아스펜 나무의 작은 잎사귀들이 황금색으로 물들며 찰랑거리는 듯 흔들립니다. 산세는 노란 옷깃을 마음껏 펼치며 단풍의 절정을 이룹니다. 산정에서 시작한 가을 이야기가 점점 짙어져 도시 전체도 제법 가을 색을 갈아입었습니다. 단풍의 향연을 감상하며 퇴근을 하면 지친 마음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저녁 시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한참 동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26년이 지난 이민생활. 내가 세 살 때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詩人 崔寅熙. 딸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 혼자 사신 팔순의 어머니. 미국 병원 안에서의 한국 간호사. 그리고 중환자실. 담고 있으면 명치 끝이 무겁거나 손톱 밑의 가시처럼 달막거리는 응어리들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얼굴들도, 어눌한 영어도, 손짓과 표정으로 말을 거는 이들도 모두 나의 몫입니다.

    이제 실용의 현지어가 아닌 나의 느낌과 감정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모국어로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내 유년의 기억들을 끌어올립니다. 늦은 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일 뿐이라고 알려주신 ‘신동아’에 감사합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 정진하라는 격려로 알아듣고 겸허한 마음으로 본 상을 받겠습니다. 남편과 아들, 어머니와 이 기쁜 소식을 함께합니다.


    이층 세 주었냐?

    말문이 트이고 전화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자 병원 생활에 자신이 붙었다. 간호사가 부족했던 탓에 오후까지 이어지는 오버타임을 많이 했고 통장의 잔고도 조금씩 늘어갔다. 그러자 남편은 집을 사자고 제안을 해왔다. 아직 유학생 신분인데 좀 이른 것 아니냐 싶었지만, 간호사 취직이 되고 영주권도 조만간 나올 것 같아 세금을 줄이는 방법으로 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었다. 영주권이 나오면 합법적으로 미국에 살 수 있고 주민으로 인정받아 학비 감면 등의 혜택도 받게 된다. 미국 생활은 술술 잘 풀려갔다. 다만 유학을 떠날 때 반드시 귀국하겠노라 약속했던 홀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여러 채의 집을 보고 나서, 아이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결정했다. 지금이야 돈 많은 유학생도 많지만, 그때만 해도 다들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쪼개고 아끼며 살았었는데 우리는 유학생 가족 중 유일하게 내 집을 가진 집이 되었다. 이층집! 집을 산 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자, 제일 먼저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었다.

    “이층집이라며? 이층 세는 주었니?”

    한국식으로는 이층집의 경우 한 층에 주인이 살고 나머지 층은 전세를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아래층에는 방이 없어요. 이층에만 방이 네 칸인데 부엌은 일층에 하나고, 이층으로 직접 통하는 입구도 없어서 세를 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미국엔 전세라는 게 없어요.”

    “그럼 두 층 다 너희 세 식구만 쓴다는 거야? 낭비다, 낭비…… 뭐 그리 신통치 않은 집이 다 있냐? 별 쓸모가 없게 생겼나 보네.”

    “아니에요. 아주 아담하고 예쁜 집이에요. 우리한텐 딱 맞아요.”

    “그래도 이층이라면 세도 좀 주고 실용성이 있어야지…….”

    설명이 길었지만 어머니는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다음 해, 어머니가 직접 와보시고야 이해를 했다. 미국에서 첫 번째 집을 사고 이사를 하던 날, 그 설렘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다.

    일생을 살면서 가장 기뻤던 날은, 첫 번째는 아들을 낳은 날, 두 번째는 미국 간호사 시험의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 세 번째는 영주권을 받은 날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서가 미국에서 처음 집을 사 이사를 하던 날이다. 친정의 가족력으로 보아 아들을 낳는 것은 무척 어렵게 느껴졌고 심한 입덧 탓에 아이는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하나인 아이가 아들이라니 그리 든든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딸이 아들보다 낫다고들 하며, ‘아들’ 운운하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성차별주의자’라고 하겠지만 아직도 난 아들이 더 든든하다고 믿는다.

    간호사 시험의 합격은 곧 미국에서의 ‘고생 끝’으로 이어지며, 간호사 자격증 하나면 미국에서 사는 데 등심 줄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다소 머뭇거릴 테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개도 안 먹는다는 영주권! 주민등록증같이 생긴 작은 증명서! 미국에 살며 영주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적법성의 여부를 떠나 학비와 세금, 보험과 노후문제로 이어지는 것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다르다.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국에서의 생활은 살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이런 것들을 가슴으로 기억하며 미국을 살아낸다. 내 나라 내 땅이 아니므로 아직도 조심스럽고 불편한 것이 많지만, 미국에서 산 시간과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거의 비슷해지는 지금, 이곳에서 내린 뿌리를 더욱 실하고 단단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층을 세 주지 못해 전세금이 안 나왔어도 평생 갚아야 하는 집값이 내 발목을 잡고 있어도, 일하는 만큼, 능력만큼 차근차근 블록을 쌓듯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미국이니까 말이다.

    또 하나의 도전

    새집에서의 생활에 점차 틀이 잡히고 아이도 동네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등·하교를 함께하게 되자 생활은 더욱 안락해졌다. 성격상 한자리에서 안주하지 못하는 나는 다른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우선 미국의 노인 요양병원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했으니 그 다음 단계인 종합병원으로 옮겨보기로 했다. 늘 지나다니며 일해 보고 싶었던 가톨릭재단의 병원이었다. 이력서를 넣고 기다리는 동안 간호과장에게 큰 병원에 이력서를 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기회가 된다면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늘 격려해주었는데, 아무리 말려도 갈 사람은 간다고 생각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큰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엔 ‘Floating’이라고 하여 여러 층을 돌아다니며 갑자기 입원 환자가 늘어난다든지, 누군가 결근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를 메워주는 역할을 맡았다. 딱히 정해진 자리가 아니고 여러 병동을 돌아다니게 되자 일은 손에 안 잡혔고 한국에서 배웠던 간호학의 한계가 피부에 와 닿았다. 청진기를 들고 환자의 심장소리를 듣거나, 호흡의 패턴을 보고 환자를 진단하고 간단한 엑스레이를 판독하거나 환자의 병력을 조사해 간호 진단을 하는 일들은 정말 생소했다. 물론 요양병원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다. 경험 없이 부딪힌 일들로 무척 당황스러웠고, 괜히 옮겼나 싶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또 다른 도전이 필요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일하는 시간이 하루 12시간으로 일주일에 3일만 하면 풀타임으로 쳐주었던 점이다. 일주일에 4일을 쉴 수 있어 시간이 있을 때 간호학 공부나 더 해 두어야겠다 싶어 학교에 등록을 했다. 학교는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당면 과제인 인체 진단과 검사학(Physical assessment · diagnosis) 한 과목을 들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체를 검사하는 과목으로, 한 학기가 끝나자 환자가 입원해 들어왔을 때 주의해 살펴야 하는 것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청진기를 들고 심장소리, 호흡소리를 듣는 것 등에도 능숙해졌다. 동시에 병원 자체에서 제공하는 재교육 프로그램과 신참 간호사를 위한 세미나에도 빠지지 않았다. 미국 병원의 체계와 조직, 의학과 간호학 시스템을 모르며 시작했던 큰 병원의 생활은 좌충우돌, 정신이 없었지만 몸으로 부딪치는 것보다 더 좋은 선생은 없었다. 그때 나는 풀타임 간호사이면서 동시에 풀타임 학생, 파트타임 엄마, 파트타임 마누라였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영어에 매달렸다.

    두 번째 학기에는 두 과목 수강 신청을 했고, 세 번째 학기에는 정식으로 간호학과 학생이 되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간호학 석사과정 준비를 위해서 꼭 필요한 과목들을 수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남편의 박사과정도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난 아직 이수해야 할 과목들이 남아 있었고 졸업시험도 봐야 하는 등, 일이 겹쳐졌다. 이왕 공부를 시작한 것이니 미국의 간호학사라도 해둬야 할 것 같았고, 석사과정 준비도 미리 해두어야 했다. 두 학기는 더 해야 될 것 같아, 남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박사과정 마치는 것을 좀 천천히 하라고. 다행히 남편의 지도교수는 실험 한 가지를 더하는 조건으로 그의 과정을 연장해주었다.

    그리고 일 년 후, 같은 날 같은 교정에서 그는 박사 학위를, 나는 간호학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은 박사과정이 끝나자 바로 박사 후 연구원(Post-Dr.)이 되어 떠났고 나는 혼자 이삿짐을 챙기고 집을 세놓은 뒤 몇 달 후 아이와 함께 뒤따라갔다.

    남편이 먼저 도착한 샌타크루즈(Santa Cruz)는 아주 작은 도시였으므로 병원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력서를 내자 중환자실밖에 자리가 없단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미국에서 공부도 했는데 중환자실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수락했다. 그러나 중환자실은 삼엄한 긴장이 나를 억눌렀고 갖가지 복잡한 기계들이 쉴 새 없이 삑삑거려 정신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많은 약물. 몸 전체에 달려 있는 기구들과 복잡한 선들. 그리고 각종 색깔의 선을 그리거나 쉬지 않고 숫자를 알려주는 모니터가 눈길을 붙잡았다. 중환자실에 들어서자 아차 싶었지만 하겠다고 한 일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미국 병원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고 자신이 붙었는데 다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그전엔 중환자실에서 일한 경험이 없어 3개월의 수습기간이 주어졌는데, 그동안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며 배웠다. 어떤 환자가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며 무엇부터 처리해야 환자의 생명에 지장이 없는지를 늘 생각했다. 실수가 없자 의사들이 신임했고 주임간호사들도 심각한 상태의 환자가 들어오면 꼭 내게 맡겼다. 그리고 또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며 무모한 도전은 없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조금은 자만 같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맡겨주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수 있다.

    평행선

    영주권이 해결되어서일까. 자연스럽게 귀국을 포기했고, 남편은 박사 학위와 전혀 상관없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들은 이미 완전한 미국 아이가 되어 어눌한 한국말로 나를 당황케 했다. 의사소통 문제는 직장에서만 부딪치는 게 아니었다. 아이와의 문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이번엔 언어 문제만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 모두 미국에서 초·중·고를 다녀보지 않았으니 아이의 학교생활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나와 같이 근무했던 병원 친구가 또래의 아들 둘을 두고 있어 그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방과 후 운동 프로그램이라든지 학교 내 활동, 아이들 파티, 운동 게임이 있으면 팀 마더가 되어 간식 챙기기 등등. 사춘기가 지나는 아이는 때론 조금 거칠고 반항을 해왔어도, 내 친구는 늘 아이 편이었다.

    “내가 볼 때 네 아들은 참 착한 아이야. 그리고 아이들은 누구나 자신의 실수로부터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해. 네가 아무리 잔소리해도 소용없어. 아이들도 무엇이 나쁜지 좋은지 다 알거든. 내가 볼 때는 너와 네 남편은 너무나 한국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네 아들은 미국 아이거든. 두 개의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네 가정을 스스로 인정하고, 아이를 내버려둬. 혼자 잘할 수 있어. 너희 부부가 아이를 믿어주고 격려해준다면 다 잘될 수 있어.”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해가 되다가도 아이를 보면 “공부해라” 라고 잔소리만 했던 나. 두 개의 문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간호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를 겨우 마치고, 스스로 ‘천천히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학기에 휴학을 하며 ‘꼭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직면하자, 내가 짊어진 삶이 갑자기 버거워지며 쉬엄쉬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분간 새로운 도전은 미루어둔 채 그냥 그렇게 안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래도 병원 일은 많이 익숙해져 중환자실에서 사용하는 기계 모두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기계 사용법에 대한 자격증도 획득했다. 중환자실의 주임간호사가 되었고, 새 간호사의 훈련을 책임지는 교육 간호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도 훌쩍 커 대학에 들어갔다. 1년이 지난 후 아들은 연세대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여름 방학 동안만 갔다 온다던 것이 1년으로 길어지더니, 제법 한국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은 아직 한국어가 서툴고 쓰고 읽는 것은 더욱 힘들어 하지만 제 뿌리를 찾는 데는 나름대로 성공한 것 같다. 요즘은 제 뿌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 족보가 어떻고 집안 어른이 누군가에 부쩍 신경을 쓴다. 제 한국 이름을 다시 찾아 쓰고, 어른을 모실 줄 아는 것도 기특하다. 한국에서 술만 마셨는지 어른 앞에서 고개를 돌리며 술을 마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어 흡족하다. 물론 술 마시는 태도 하나만으로 아들이 한국인이 다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이라도 이해하고 따라 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인정하고 싶다.

    8주간의 휴가

    한 직장에 10년간 근무하며 한 번도 결근을 안 했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필요할 때마다 신청했던 휴가는 충분했고 몸도 건강했기에 ‘결근’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가 심하게 아팠다. 그간 특별히 아픈 적이 없었던 나는 한동안 물파스를 바르며 견뎌보려 했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져 나중엔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편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을 때까지 병을 키우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내 작은 체구에 비해 대부분 거구인 중환자들을 다루는 일은 힘에 부쳤다. 자세를 바꿔주거나 목욕을 시켜야 하면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몸무게는 배로 커진 듯하다. 동료 간호사들과 협동해 일을 하지만 급할 땐 혼자 애를 쓰다보니 그 무게 때문에 요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척추운동도 하고 파스도 붙이고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버티다 못해 의사를 찾았고 몇 가지 검사를 하자 결과는 생각지도 않은 ‘자궁 내 근종’이었다.

    근종이 너무 자라서 허리 뒤쪽을 눌러 생긴 요통이라며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수술 후 회복에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친정어머니께 연락을 했고 어머니는 즉시 달려왔다. 가벼운 수술이라고는 하나 여성성을 상실하는 것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남편과의 관계를 걱정했고, 혹 중환자실에서 보아왔던 최악의 시나리오인 악성 종양은 아닌가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병가 신청을 하자,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한 번도 결근을 안 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물론입니다.”

    “그런데 병가 신청은 6주 하셨네요? 혹시 수술하시나요?’

    “자궁근종 절제 수술요. 우리 병원에서요. 한 이틀 입원하면 된다네요.”

    “수술 후 퇴원하면 누가 도와줄 사람이 있나요?”

    “그럼요. 한국에서 친정어머니가 오기로 돼 있어요.”

    “그래요. 그럼 어머니와 함께 지낼 휴가도 필요하겠네요.”

    “아, 예. 제 회복 기간 동안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휴가지요 뭐.”

    “휴가는 말 그대로 쉬는 거고, 병가는 아파야 쉬는 거잖아요? 이왕 쉬는 김에 한 두어 주 더 쉴래요? 휴가 처리해드릴게요. 이렇게 장기 근속하면서 한 번도 결근 안 한 사람은 처음이라 특별 처리해드리려고요. 중환자실 매니저한테는 인사과에서 직접 연락을 할 거니까, 병원 일 걱정은 말고 충분히 쉬다 나오세요. 엄마하고 좋은 시간도 갖고요.”

    전화를 끊고, 조금 의아했다. 병가 신청은 6주를 했는데 8주나 휴가를 주겠다니. 남편과 병원 친구들은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며 잘됐단다. 미국 생활 중 처음으로 마음 놓고 아무런 계획 없이 코가 노랗게 놀며 지낼 수 있는 핑계가 생겼다. 종양 조직 검사는 다행히 음성으로 판정되었고 수술 후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한 시간쯤 운전을 해 큰 도시로 나가면 한국 서점이 있다. 사는 것에 쫓기면서 미뤄두었던 한국 책들을 박스로 사 왔다. 소설이며 시집, 수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휴가 내내 막히는 곳 없이, 사전을 찾지 않고도 술술 읽히는 한국 문학만 들여다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고운 물소리가 들리고, 아름다운 꽃밭이 만들어졌다.

    한국문학을 탐독하는 동안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생 시절 내내 쓴 가계부는 가벼운 메모들도 적혀 있어 일기를 대신했었다. 메모가 적힌 가계부는 광채를 발하는 보석은 아니라도 청운의 꿈을 품었던 젊음의 원석, 지난 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었다. 상추 한 단, 바나나 한 무더기의 값은 그리 변하지 않았는데 내 삶의 초심은 중심을 잃은 채 흔들렸던 것은 아닐까.

    8주간 휴가 동안 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두고 왔던 것들, 잊고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가슴속에 앙금이 되어 침잠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표면에 떠 있던 뿌연 물을 쏟아버리고 새 물을 부어 감정들을 골고루 섞어 저었다. 오랜만에 만난 내 삶의 여유는 작은 무늬들을 그리며 올라왔다.

    한국, 한국인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믿었던 중환자실. 8주가 지나고 돌아와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중환자실 매니저와 동료들은 회복되어 돌아온 것을 반가워했지만 내가 없다고 병원 일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빠진 자리는 예전의 나처럼 ‘Float’간호사가 대치하면 되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고 꾀부리지 못했고 결근 한 번 하지 못했던 것은 성격 탓이었다. 더구나 외국인 간호사였고 아직도 악센트 있는 영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심한 강박관념을 갖게 했고 완벽주의를 고집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열등감 같은 것이 한 번의 실수와 게으름도 용납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멀리 떠나 바라보면 안쪽의 것들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인다. 쉬면서 중환자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디쯤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한 간호사. 경험이 꽤 오래된 중환자실의 간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내 모습이 보였다. 작은 한 부분에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하던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건 내 생활 속의 어느 부분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내 자존심이니까. 성실하게 일하고 남편 챙기고, 가끔 대학에 나가 있는 아들도 챙기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샌타크루즈는 아주 작은 동네여서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우리끼리 모이면 늘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한국과 미국 명절이면 함께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고, 음식을 한 접시씩 해 와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지냈다. 모이기만 하면 애국자가 되고, 두고 온 고향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국 환자들은 병원에 입원하면 종종 날 찾았다. 생경한 의학 용어들이 불편할 때 도움을 청해오는 한국 환자들. 병원에서 근무 중이거나, 쉬는 날이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시간을 내어 도와드렸다.

    그날도 한국 환자가 있는데 나와줄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쉬고 있던 터라 흔쾌히 나가겠다고 했다. 환자는 70세, 동네 한국 교회의 은퇴한 원로 목사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고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병명은 고혈압성 출혈성 뇌졸중이었다. CT상 출혈 부위가 너무 커 수술로 고여 있는 혈액을 제거한다 해도 소생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담당의사가 나를 불렀다. 가족들을 모이게 해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 편안히 임종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준비가 안 되었다며 좀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큰아들이 한국에서 오고 있으니, 그 시간까지는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만약 환자의 상태가 그때까지 못 기다리고 악화되면 어떻게 하실래요? 혹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생명을 위협하면 인공 심폐 소생술을 쓰고, 전기 충격 요법과 각종 약물을 써서 끝까지 해볼까요, 아니면 편안하게 가시게 할까요? 인공 심폐 소생술을 하게 되면 갈비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가슴 부위에 시퍼런 멍이 들기도 하지요.”

    “그래도 아들이 올 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살려줘요. 큰아들이 오면 그 다음은 그때 결정할게요.”

    담당의사에게 부인의 의견을 전하자 “그래. 최선을 다해보지 뭐,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 아들이 도착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하고 물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비행시간만 12시간이니까 한국에서 공항에 나가 미국행 비행기를 지금 바로 탄다 해도 최소한 24시간은 살아계셔야 할 텐데.”

    “최선을 다하자고. 근데 넌 내일도 일을 나올 거야? 오늘도 쉬는 날인데 나왔다며?”

    “필요하면 나올게. 내가 나오는 것이 더 낫겠어?”

    “물론이지. 아들이 도착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혹, 바로 돌아가시게 된다면 네가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는 게 좋겠어.”

    “그래, 그러면 내일도 근무하는 것으로 할게. 그런데 내일은 종일 오버타임이거든. 매니저가 OK를 해야 나올 수 있지. 비싸잖아. 하하.”

    시간당 임금의 한 배 반을 받는 오버타임은 스케줄을 담당한 매니저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때 갑자기 환자 방 커튼 안 쪽에서 한국어로 커다란 합창 소리가 들렸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은 정해져 있고 방문객 숫자도 한 번에 두 명으로 제한된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더구나 중환자들은 자극을 주지 않고 최대한 조용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커다란 찬송가 합창 소리라니. 잰걸음으로 달려가 커튼을 열자, 열댓 명의 한국 교회 교인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쉿,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시켰다.

    “왜 찬송가 부르면 안 돼? 목사님이신데.”

    “여긴 중환자실이에요. 조용히 하셔야 하고요. 옆에도 다른 환자들이 있잖아요. 근데 다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가족밖에 안 되는데.”

    “우리 모두 가족이라고 했어. 입구에는 전지은 간호사가 들어와도 좋다고 된다 말했어. 괜찮지?”

    “예? 제가 언제 다들 오시라고…. 부인과 며느님만 남고 다 나가세요.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 보면 뭐라겠어요. 누군 다 들어오라고 하고 또 누군 둘밖에 안 된다 하고. 밖의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든지 아니면 댁으로 돌아가세요. 무슨 일 있으면 교회 사무실로 연락드릴게요.”

    까칠한 나의 질책에 교인들은 주섬주섬 찬송가와 성경책을 들고 중환자실을 빠져나갔다. 이런 경우 참 난감하다. 아는 분들이라 매정하게 할 수도 없고, 원칙대로 하다보면 까칠하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 다시 출근을 했다. 큰아들이 미국행 비행기에 탔다는 연락을 받았다. 환자 상태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은 답보 상태였다. 열 명이 넘는 한국 분이 환자보호자 대기실을 점령해 밤새워 통성 기도를 했다며, 입구에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기도하고 찬송가 부르고, 먹고,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란다.

    “다들 집에 가셨다가, 제가 연락드리면 오세요. 여긴 병원, 그것도 중환자실입니다. 계속 기도하시려면 교회에 가서 하셔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교회로 연락 드릴게요. 다들 집에 돌아가셔서 좀 쉬고, 씻고 오셔도 좋을 것 같네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 후에야 설득이 되었고 큰아들이 도착하거나 환자 상태에 변화가 있으면 연락하기로 하고 교회 신자들을 돌려보냈다. 그제야 부인이 조용히 환자 침상 옆 자리에 앉아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하실 말씀을 남편한테 들려드린다. 둘째 며느리도 조금 눈을 붙였다.

    오후 4시, 큰아들이 도착했다. 담당의사는 가족을 다시 불러 CT필름 등을 보여 주며 설명했고 나는 하나하나 한국어로 통역했다. 가족들이 환자의 위중함을 알고 곧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 그때 큰아들이 마지막 부탁이 있단다. 한국에서 가져온 한약인데 뇌졸중에 특효라니 한 번만 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성분이 뭔지도 모르고 미국 내에 시판도 허락되지 않은 약을 쓰게 할 의사는 아무도 없다. 의사가 날 처다보며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소생 못할 환자 아니냐. 우리 모르게 환자 가족들이 쓰게 하는 것으로 우리가 눈감아주면,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으니 원망은 없을 거다.”

    그렇게 이해를 시켰다.

    “그래, 그러면 큰아들이 시술할 수 있게 준비해주고 우린 커튼 밖으로 나와 있자.”

    10여 분이 지났고, 큰아들은 이제, 인공호흡기를 떼어도 좋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면 5분 안에 운명할 것으로 보였는데, 내 퇴근 시간인 7시가 넘도록 환자는 혼자 숨을 쉬었다. 몰론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담당의사가 참 이상한 일이라며, 큰아들이 갖고 왔던 약이 효험이 있긴 하나보다, 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교회의 신자들이 또다시 보호자 대기실을 점령하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자, 이번엔 매니저가 직접 나서서 중환자실의 제일 가장자리의 유리문이 있는 방으로 환자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유리 문 안쪽이니 소리도 덜 들릴 것이고 뒷문을 이용해 다닐 수 있어, 교우들도 가족들도 편안하지 않겠느냐고. 마음을 써주는 매니저가 고마웠다. 가시는 길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가시는 길을 잘 배웅하게 해주는 것도 임종 간호의 일부다. 환자의 방을 새로 옮겨 정리하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퇴근 시간도 자연히 늦어졌다.

    “한국 환자만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니야?”

    늦게 퇴근하자 남편은 걱정스럽게 한마디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국 간호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 환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는 것.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한국 환자들만 보면 내가 담당해야 할 것 같고, 내가 나서 처리해주어야만 할 것 같다. 쓸데없는 동포애인지 이민자들만 갖는 역차별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목사님은 그 상태로 3일을 더 견뎠다. 소천하기 바로 전날, 난 중환자실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데 대한 근속상을 받고 부상으로 18K 팔찌를 선물 받았다. 또 그 달의 간호사로 뽑혀 병원에서 만드는 사보에 나의 이야기와 사진들이 실렸다. 파티복을 대신해 한복을 차려입고 남편과 함께 병원에서 베풀어준 근사한 파티에 참석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가 아니어도 고운 한복은 우아함으로 미국 친구들의 시선을 받기에 손색없었다.

    로키산맥을 찾아서

    그 무렵 남편은 잘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난 10년이 넘도록 같은 일을 해도 싫증나지 않는데 남편은 왜 전업을 생각할까 싶었지만 더 늦기 전에 업종을 한번 바꿔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샌타크루즈에서 샌디이에고, 뉴멕시코의 샌타페이까지 돌아다니며 다른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병원 일은 앞뒤로 몰아 쉬는 날을 늘려 남편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넉넉지 않은 자금 탓에 꼭 하고 싶은 것은 그리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6개월쯤 거리에 돈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나자 남편은 초초해 했다. 그때 마침 로키산맥 끝자락에서 친척이 경영하는 물 공장의 책임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친정 쪽 일이었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좀 더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렸지만 남편은 콜로라도행을 고집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로키산맥.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탄 비행기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경이롭다고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도도한 산세는 너르게 팔 벌리고 서서 도시를 병풍처럼 감싸안았다. 주홍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지는 석양은 산 위에 걸리며 신비한 오로라를 만들어냈다. 붉은 기운은 낯선 도시와 만나는 첫 대면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며칠 간의 콜로라도 방문 후 남편은 혼자 남았다. 나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또 혼자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신문에 ‘집을 세놓는다’는 광고를 하고,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원 일을 쉬는 날이면, 책같이 깨지지 않는 물건들을 하나씩 묶어두고, 쓰지 않는 물건들은 팔고, 이웃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콜로라도에 새로 살 집을 구하고, 이사 준비가 끝난 것은 거의 추수감사절이 가까운 늦가을과 초겨울의 입구였다. 병원에 사표를 내자, 병원에선 나만한 경력 간호사를 구하기 쉽지 않다며 한 달에 한 번, 열흘 정도씩 일을 묶어줄 테니 비행기를 타고 와 일을 계속해줄 수는 없느냐고 물어왔다. 병원 뒤쪽에 있는 아파트의 방 하나를 제공하겠다는 조건도 함께였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떠난 것에 미련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고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보다는 미련이 남는 곳에 마음이 더 쓰인다. ‘떠날 때는 말없이’ 매몰차게 떠나야지만 새로운 곳만 바라보며 적응하려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푸슬푸슬 오던 추수감사절 이틀 전, 콜로라도 새집으로 이삿짐이 도착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나는 눈에 꼬리를 흔들며 돌아다니는 강아지처럼 서성거리다 시간을 다 버렸다. 이삿짐은 천천히 풀자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마당으로 찾아온 이가 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카드 한 장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앞집에 사는 노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일럿이었고 이 동네 공군사관학교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단다. 팔순이 넘었고 할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어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은 바깥출입을 못해 함께 못 왔단다. 카드에는 ‘이웃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해’라며 전호 번호도 적어놓았다. 잘 정리된 마당, 잘 가꾸어진 나무들, 환영 카드까지, 낯선 곳에서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겨우 이삿짐이 정리되고 크리스마스와 신년까지 이어지는 휴일이 지나자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가까운 곳에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다. 이력서를 내자 바로 연락이 왔다. 중환자실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사용할 줄 아는 자격증이 이렇게 많은 간호사는 처음이라며 매니저는 싱글벙글했다. 또다시 새로운 곳에서의 출발이었다. 병원 전체와 중환자실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곧바로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늘 하던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간호사가 태클을 걸어왔다.

    “지은, 네가 하는 말은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오늘부터 나한테 인계해줄 때는 모든 것을 적어주면 좋겠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젊어도 한창 젊은, 서른이 채 안 돼 보이는 깡마른 백인 간호사였다.

    “못 알아듣다니?”

    “네 악센트 말이야. 난 도저히 안 되겠다고.”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캘리포니아를 떠날 때 친구들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일러주던 말이 생각났다.

    “콜로라도에는 ‘Red Neck’이 많아. 네가 힘들 수도 있어.”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농부나 복지수당을 타는 빈민층이면서도 백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고 뻐기며 이민자들을 무시하고 잘난 척하는, 뭐 그런 부류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그 간호사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확실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악센트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파르르 하며 따져봐야 내 속만 끓일 것 같아 한 번은 참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네가 꼭 인계받으라는 법은 없잖아. 네가 인계를 받게 되면 그때는 내가 써 줄게. 네가 못 알아듣는다니까 말이야. 그러나 다 쓸 때까지 너는 기다리고 있어. 내가 쓰는 동안 방해하지 말란 말이지. 쓰는 일이 그리 쉽냐? 난 일이 좀 늦게 끝나겠네. 장문을 써야 하니 말이야. 너한테 인계를 주는 한 오버타임은 맡아놓았네. OK. 그러지 뭐.”

    그는 나의 차분한 대응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문제는 몇 주일 뒤였다. 내 오버타임의 원인이 그에게 인계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자, 매니저가 우리 둘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분명히 말했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불편하다니, 그가 원하는 대로 인계해야 할 것들을 종이에 적어주었어. 인계란 일이 끝나야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래서 난, 일이 끝나야 종이에 적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늦고 말았네. 일이 안 끝나서 오버타임을 했던 것은 아니고 순전히 인계할 상황들을 적다보니 시간이 많이 갔을 뿐이야.”

    매니저가 덧붙였다.

    “나는 지은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겠는데 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부분은 어디야?”

    “글쎄, 지금은 이해할 만하네.” 그는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말로 인계를 주어도 괜찮겠어?”

    “그래, 그러지 뭐.”

    그가 나가고 매니저는 나를 따로 불렀다.

    “너무 상처 받지 마.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잖아. 쟤는 누구든 새로 오면 꼭 한번쯤 꼬투리를 잡는 아이야. 난 너의 능력을 믿어. 열심히 해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새로 시작한 곳에서 엉뚱하게 한 방 맞았다. 그의 꼬투리 잡기가 아니라도 외국인이 하는 영어는 악센트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원어민하고는 다를 테니까. 조심, 또 조심하기로 했다. 따뜻한 이웃을 만나며 기대했던 것과는 영 딴판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허들 넘기

    한번 삐걱거리기 시작한 병원 일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니터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환자를 간호하는 것은 의사 처방 내에서 내 나름대로 노하우를 쓰면 되었다. 그러나 일일이 간섭하고 약 하나를 더 쓰거나 뺄 때도 왜 그렇게 했느냐고 꼬치꼬치 묻고 따졌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은 상호 신뢰가 관건이다. 믿지 못한다면 누구도 안심하고 환자를 맡길 수 없다. 주임 간호사가 사사건건 질문을 하는데 답을 안 할 수도 없고, 일일이 답을 하자니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또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했다.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무거운 환자, 행려 환자, 담당 의사가 아주 까칠해 일하기 까다로운 환자들만 내게 맡겼다. 그러나 그런 조치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맡지 않으면 다른 간호사들이 돌보아야 하는 환자이기에 직업 윤리상 특별한 이유 없이 그들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묵묵히 견뎌보기로 했다. 이전의 경험과 떠나온 캘리포니아에서 받은 대우 등은 빨리 잊는 것이 편했다. ‘새 나라 새 땅에서 처음 적응하는 새 이민자일 뿐이다’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 새로 겪는 텃세에 가슴 시렸고 조금은 서글펐다. 이 나이에 이런 대접 받으려 여기까지 왔던가 싶고, 그렇다고 누구 아는 사람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늘 어딜 가든 잘하는 줄 믿는 남편에게 실망을 주기도 싫어 끙끙거리며 속병을 앓았다. 혼자 극복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불평 않고 묵묵히 주어진 일만 하며 1년이 지났다. 까칠했던 간호사와 관계도 조금 나아졌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거나 시원한 생맥주 한 잔에 인생을 논하고 병원을 떠도는 가십들을 안주 삼아 수다를 떠는 일도 가끔 생겼다. 시간은 만병통치약이다. 사람의 관계란 주는 만큼 받게 돼 있었다. 새로 들어온 간호사가 모든 기구를 다룰 줄 알고 모든 중환자도 간호할 수 있다고 하니 기존 간호사들은 일종의 시기심으로 텃세를 부렸던 것 같다.

    어느 날 컴퓨터를 보다가 병원 내에만 공고를 하는 ‘R.N. Case Manager’ 자리가 눈에 띄었다. 일반 간호사 경력 5년 이상, 최소한 간호학사(BSN) 이상, 시간제 수당이 아닌 연봉제 월급, 중간 매니저급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에게 어떻게 해야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함께 점심을 먹으며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제일 먼저 입원 환자가 병원 입원의 기준에 맞게 입원했는지를 살피고, 입원 기준에 맞지 않으면 즉시 주치의한테 연락해 퇴원시키거나 요양원이나 재활 치료병원 등으로 옮겨갈 수 있게 주선해주고, 둘째 입원환자의 의료보험을 확인하고 보험회사에 환자의 병명과 입원 사실을 통고한다. 그 다음 환자가 사(私)보험을 갖고 있을 경우, 매일 환자의 상태를 알려주어, 의료 보험회사로부터 병원으로 의료수가가 제때에 지급되게 한다. 또한 의사와 간호사, 약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과 함께 라운딩을 해 환자 상태를 살펴 그날 환자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치료는 무엇이며, 환자들이 최적의 간호와 치료를 받는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진행상황을 기록한다. 만약 환자가 최적의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으면 즉시 의료부장에게 보고해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병원 재정팀과 미팅을 해 환자들 진료비 상황을 숙지하고 의료비가 오래 연체되었거나 보험회사에서 지급되지 않았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최선의 조치를 취한다.

    참 흥미로웠다. 환자의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전인간호와 최대의 치료를 제공해주며 환자의 퇴원까지 책임 있게 살펴주는 특별 간호사 제도였다.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력서를 준비해 케이스 매니저들의 디렉터를 찾아갔다. 디렉터가 내 이력서를 보고는 임상 경험이 풍부해 좋을 것 같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디렉터는 중환자실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는데, 중환자실 매니저는 책임감 있고 경력이 많은 간호사이기는 하지만 이민을 온 외국인 간호사여서 미국 문화도 서툴고 말도 아직 악센트가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했단다. 물론 아주 뒤에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 간호사들은 외국인 간호사인 내가 케이스 매니저에 도전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나고 자릴 옮겨가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다. 더구나 이번처럼 동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짠’ 하고 옮겨가는 것. 조금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해 가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다. 더 이상 간호사 유니폼을 입는 일은 없을 것 같아 유니폼을 정리했다. 커다란 상자로 두 개나 되었다. 색이 누렇게 변한 흰색 원피스, 무릎 나온 바지, 색깔도 낡고 소매 끝도 해진 긴 소매 재킷, 이웃이 손수 만들어준 꽃무늬 유니폼 그리고 치마바지. 내 삶의 일부분인 세월은 고스란히 상자에 담아 창고에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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