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조은명
그곳을 지나 자동개폐문을 열고 들어간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통유리 가운데 커다랗게 붙어 있다. 난 가끔 이곳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하지만 습관처럼 자동문 속으로 빨려들어가 일 속에 파묻힌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고향의 장터처럼 시끄럽고 어수선하지만 가끔은 태풍 직전의 무거운 침묵처럼 숨이 막힐 때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됐건 나는 작은 손가방을 서랍 속에 넣고, 컴퓨터를 켜며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밤 입원한 환자의 이름과 간단한 병력들을 챙겨 본다. 가족들의 연락처가 없거나, 사회보장번호가 없거나, 행려자로 구분되면, 내 머릿속에는 빨간 불이 켜진다. 그들은 오늘 해야 할 업무의 최우선 순위로 정해진다.
그해 여름
1984년 여름, 나는 남편과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화학을 전공한 남편이 유학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공계 졸업생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학비를 대줄 집안어른이 없었고, 국비 장학생 자격을 신청하기에는 남편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에 올랐던 것은 남편 지도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전군, 자네가 제일 고생을 안 할 거야. 유학생 부인이 간호사인 경우, 제일 안정되고 좋더라.”
그 말에 우리는 상당히 고무되었고, 별 준비 없이 미국에서 늦깎이 유학생 가족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이 화학과 대학원생인 동시에 실험조교로 등교하고 나면, 나는 짧은 영어로 손짓발짓해가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의 결단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나 절감했다. 한국에서 준비한다고 했지만 나는 현지인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따라서 내 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말과 문화가 다른 이국 생활이 결코 녹록하지 않으리란 것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닥쳐보니 내 발등을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의 ‘줌마 파워’는 요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도 한국 아줌마는, 더구나 엄마는 강했다. 남편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간호사 시험 준비를 했던 시절, 내 평생 그때처럼 처절히 공부한 적이 있던가 싶다. 박사 과정의 남편보다 도서관에 더 많이, 더 오래 붙어 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다. 몇 달 되지 않아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이 됐으므로 내가 옆에 없어도 될 정도였다. 따라서 낮 시간 동안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저녁 이후에 또래가 있는 이웃 유학생 집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새 이민자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어덜트 스쿨(adult school)’에 등록하고 2년 동안 개근상을 탈 정도로 영어에 매달렸다. 가족과 대화하는 것말고는 한국 문화를 일절 접하지 않았다. 한국 책과 한국 TV 프로그램, 한국 비디오테이프는 아예 주변에 놓지 않았고, 집안일을 할 때조차 CNN 뉴스를 틀어놓았다.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며 늘 하던 대로 CNN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내일 날씨는 무척 덥고 바람이 많이 불겠으니 불조심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 하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기상 캐스터가 날씨 예보를 하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