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은 1990년 10월3일 통일을 이뤘지만 내적 통합은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 내적 통합은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긴 과정일 수밖에 없다.
- 반면 한반도의 분단은 아직까지 진행형이다. 독일이 겪었던 분단보다 더 철저하고 강력하며 위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 양국의 관계 정상화가 중요한 과제다.
지금까지도 구동독의 많은 사람은 통일로 인해 직업을 잃었고 그 결과 물질적인 궁핍을 감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이전까지 자신들이 살면서 달성했던 모든 것이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나아가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가 독일의 내적 민족적 통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서독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적 통합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실제 현재 독일의 체제는 구동독 지역의 모든 영역에 서독 체제가 급하게 전이된 결과, 통일 이전의 서독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전이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형평성과 심리적 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관철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통일된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아직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국은 분단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분단이란, 독일이든 아니면 한국, 사이프러스 또는 어느 다른 나라에서든, 종속을 의미하며 언제든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은 한 국가에 제한된 국지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다.
先 관계정상화 後 통일
한국이 왜 통일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많은 한국인이 한민족은 오랫동안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루고 살았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답이 기성세대에게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여겨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언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충분한 토론이 진행되지 않았다. 정치 경제 그리고 통일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도 통일과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질적인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볼 때 독일이 평화적 통일의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이 한국에서 그대로 반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독일 통일이 한국을 위한 완벽한 모델은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독일의 경험이 한국에 시사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남북한 두 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그리고 협약을 통해 평화공존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평화적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에 통일은 언젠가 달성해야 할 필연적인 과제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지속적인 관계 정상화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협상의 경험 또한 일천해 국제 사회에서 협력하는 것 자체를 종속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 모두 분단이 외국의 간섭으로 인해 지속되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마치 한국인들만이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면 아주 이른 시일 안에 손쉽게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현재까지 분단이 지속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서로 적대적인 두 체제가 반목하고 있다는 점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두 체제 간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는 중요한 원인이 양측의 불신이 너무 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돈독한 공생관계를 유지해본 경험이 없다는 데 있음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한반도의 상황이 아직까지 난제로 남아 있는 이유는 양측이 서로를 보는 상반된 시각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주 유사한 행동양식을 보인다는 데 있다. 서로 상반된 시각을 갖는 적대적인 두 국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를 통해 협력을 강화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형식적으로라도 상호 간에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반도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양측이 그러한 의사가 없거나 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화 없이는 정상화도 통일도 불가능
1990년 늦가을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하던 동독의 주민들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들고 나오면서 동독의 평화적 정치혁명이 민족혁명으로 발전했다. 이후 독일의 통일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물결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민족 또한 하나의 민족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는 아직까지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동유럽에서, 특히 동독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변화가 없이는 한반도의 통일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그러한 변화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변화 변혁을 향한 움직임은 먼저 북한 내부에서 시작되고 북한 주민들이 그러한 변화를 요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외부에서 북한의 체제에 가해지는 압력은 그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심과 현재의 열악한 상태라도 유지하려는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통일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한반도에서 북한 체제가 붕괴되어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통일 한국은 북한 엘리트의 일부와 협력하지 않고는 북한 지역에서 통일된 체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가정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 지역에서 통일된 새로운 체제에 협력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별하는 적절한 틀을 마련하는 일이다. 독일의 경험에서 특기할 점은 군대 경찰과 같은 민감한 부분에서 그러한 협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순수하게 전문 직업인의 차원에서 의무를 따르고 명령에 따라 잘 협력하는 것을 그들의 직업윤리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군대 경찰과 동일한 전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지도층과 국민은 통일 이후에도 북한의 어떤 요소들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또는 심지어 어떤 것들을 통일 한국에서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임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만일 북한 내부에서 어떤 정치적인 변화가 발생해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를 해방했을 때 이후의 발전과정이 남한에 의한 북한의 식민지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협력, 비용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점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이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주민들의 삶은 모든 영역에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반면에 구서독지역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믿었다. 그 이유는 단지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서독인들이 보기에 체제 변화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서독의 체제가 동독에 전반적으로 수용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거대한 ‘서독체제’를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아주 새로운 독일을 탄생시켰다.
독일의 경험이 분명히 보여준 것은 적대적인 두 국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적은 비용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더욱이 통일 이후 독일이 지출한 항목 중에는 한국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아주 많은 비용이 들었던 부분들도 한국에서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다.
나아가 남북한 간의 관계 정상화의 범위가 광범위하면 할수록 통일 이후의 많은 과제를 해결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남북한의 통일을 주저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리고 우리는 통일 비용을 논할 때 항상 분단으로 인해 드는 모든 비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이 정확하게 계산된다면 결국 분단비용이 훨씬 크고 분단을 유지하는 것이 국민의 삶에 더 많은 불안과 위험을 가져다준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체제 전환 이후에 한국은 아마도 1945년 종전 이후 탈나치화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독일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나마 쉽지 않을 통일과정에 더욱 부담을 줄 것이다. 종전 이후 독일에서 탈나치화의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 발생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패배 이후 승전 연합국에서 이 과정을 주도, 감시했기 때문에 그나마 큰 갈등이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거기에는 공격적인 독일 민족주의가 설 자리가 아예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남북한 간의 관계 정상화와 통일이 이루질 경우 남한의 많은 사람이 통일을 민족주의의 승리로 간주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1990년의 통일이 독일에는 민족주의가 새로이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이 나토와 유럽연합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한 국가의 통일은 그 국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남북한 간의 관계정상화와 통일은 동아시아 지역 내의 정치적·경제적 협력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에 지역 전체에 이로운 일이다. 통일 이후 어려운 과도기를 거치고 나면 한국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확대될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요한 조건들
한국의 경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분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더욱이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그로 인한 갈등이 확대되지 않는 한 한반도의 대다수 국민을 제외한, 모든 주변국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갈등 당사자는 거의 모든 경우 상대방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고 반응해왔다. 북한의 행동 또한 일정한 틀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북한 지도부의 시각에서 볼 때 그들의 전략은 분명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북한 체제가 갖가지 커다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모든 문제가 정치적인 것으로 고착화한 현재의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어떤 새로운 자극이나 제안이 나오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반도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이 급격하게 변화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미국의 태도 또한 변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 측은 지금까지 어떤 신뢰할 만한 제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 상황의 극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등의 국제사회가 북한의 체제유지를 보장하고 서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현재 미국은 북한에 대한 보이콧과 봉쇄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북한이 베이징의 6자회담에 참여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미국인들을 데려가기 위해 전직 대통령들을 여러차례 평양으로 파견했다. 북한의 지도부가 이러한 미국의 상반적인 태도를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보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유지해온 성공적인 전략을 고수하려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결코 아니다.
남한은, 북한 지도부가 느끼는 위협과 행동반경 그리고 그들의 지금까지의 경험 등을 더욱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남한의 지도층은 만일 자신들이 북한의 지도부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 사회에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룹, 특히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잠재적인 반미성향과 북한에 관해 낭만적으로 상상한 점에 대해 사실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북한 그리고 미국 모두가 변화해야 한다.
공동의 미래를 위한 기금
한국인에게 통일은 거의 ‘성스러운’ 정치적 목표다. 통일 그 자체는 질문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와 통일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현실적이고 모든 국민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토론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통일은 국가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 능숙한 외교 그리고 외국의 지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요구와 지지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통일 과정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국민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통일을 위한 재원을 준비하기 위해 도입할 새로운 제도를 ‘통일세’라고 칭하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세금은 모든 국민이 다양한 액수로 국가에 납부하는 것이며, 그에 대해 국가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도 없는 의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부가 통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하고자 하는 새로운 제도에 ‘공동의 미래를 위한 기금’과 같은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제도를 통해 강조되어야 할 점은 ‘우리가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재정적인 부담을 나누겠다는 의지는 국민이 심리적으로 통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측정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물론 그렇다고 재정부담을 담당할 준비가 심리적인 준비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통일을 위한 실제 행동에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올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통일을 위한 심리적인 준비자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독일은 1990년 10월3일 통일을 이뤘다. 그렇지만 내적 통합은 아직까지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 내적 통합은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긴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 반면 한반도의 분단은 아직까지 진행형이다. 독일이 겪었던 분단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강력하며 위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 양국의 관계 정상화가 중요한 과제다. 그것은 한국을 위해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사회와 국제사회의 이익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굳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분단의 아픔을 공유했던 입장에서, 10월3일 통일을 기념하는 독일인들이 한국 또한 머지않은 장래에 독일과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