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와 스크루드라이버

안 되면 되게 하라! 궁즉통(窮則通)의 술

  • 김원곤|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 |

    입력2010-11-02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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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주운전에 음주목욕, 음주수영까지 즐기는 알코올 중독자가 주인공이다 보니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엔 수많은 술이 등장한다. ‘음주달인’ 주인공이 그중에서도 가장 쉽고 빠르게 만들어 들이켜는 술이 스크루드라이버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 그리고 잔 하나만 있으면 끝. 물론 공구함에 나뒹구는 진짜 ‘스크루드라이버’까지 갖추면 완벽한 칵테일 상차림이 된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와 스크루드라이버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는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1995년 작품으로 존 오브라이언의 반자전적 소설에 기초를 둔 것이다. 원작자 오브라이언은 영화 제작이 시작된 지 2주 뒤에 자살했다. 이 일로 한때 제작 중단이 고려되기도 했으나 오브라이언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 촬영이 진행됐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졌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처음에는 흥행 성적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와 평론가들의 호의적인 평가가 이어지면서 남자 주인공 역의 니콜라스 케이지는 1996년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전미비평가협회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아카데미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알코올에 중독돼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남자 주인공과 라스베이거스 거리에서 하루하루 생활을 꾸려나가는 창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극중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촬영에 들어가기 전 2주에 걸쳐 폭음을 하면서 친구에게 비디오 촬영을 부탁해 취했을 때의 말투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이 경험이 극중 인물 연구 중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벤 샌더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극작가로 심한 알코올 중독 탓에 직장과 가정 등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다. 영화는 벤이 한 대형 슈퍼마켓의 주류 코너에서 엄청난 양의 술을 카트에 채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곧이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동료 피터(리처드 루이스 분)를 찾아가 애걸하듯 돈을 빌린 그는 바로 술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취기에 횡설수설하면서 한 여인을 유혹해보려 하나 실패한다. 술을 줄이라는 여자의 충고에 “차라리 숨을 덜 쉬라고 하지”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그의 정신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바를 나온 그가 차를 몰면서 교통경찰의 눈을 피해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켜는 장면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상징이다. 그 후 스트립쇼를 보면서 단숨에 술 한 병을 비우고 난 그는 거의 인사불성이 된다. 그 상태로 차를 몰다 거리의 창녀를 만나 모텔에 들어간 그는 “술 때문에 마누라가 떠났는지, 아니면 마누라가 떠나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지…”라며 한탄한다. 그날 밤 창녀와의 만남은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가 결혼반지를 잃고 마는 것으로 끝난다.



    두 남자, 한 여자

    밤낮으로 술을 마시지 않으면 금단 증상으로 손이 떨려 글씨조차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그는 마침내 직장에서 해고된다. 퇴직금이라는, 그의 기준으로는 목돈을 손에 쥔 그는 라스베이거스로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집을 정리하면서 사진, 옷가지, 여권 등의 소지품들을 뒷마당에 모아 태운다. 그 와중에도 술을 마시는 것은 잊지 않는다. 그러고는 차를 몰고 라스베이거스를 향해 떠난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벤은 거리를 횡단하던 여자를 칠 뻔한다. 그 여자는 조심하라며 손가락으로 욕을 하고 사라진다. 그녀는 세라(엘리자베스 슈 분)라는 이름의 창녀로 유리(줄리안 샌즈 분)라는 라트비아 출신 포주에게 고용돼 일하고 있었다. 벤과 세라의 우연한 만남은 이후 숙명적인 인연으로 이어진다.

    벤은 하루 29달러짜리 싸구려 모텔에 투숙한다. 그 다음날 맥주를 마시며 라스베이거스 밤거리를 드라이브하다가 거리에 나와 있는 세라를 발견한다. 그는 반가운 나머지 그녀와 거래를 하고 자신의 숙소로 데려간다. 세라는 벤의 방에 잔뜩 늘어서 있는 술병들을 보고 놀란다. 벤은 세라에게 사실 성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며 그냥 자기와 이야기만 나눠달라고 한다. 세라가 “라스베이거스엔 왜 왔느냐?”고 묻자 벤은 “술 마시다 죽으러 왔다”라고 답한다. 세라가 피식 웃으며 “얼마 동안 술을 마시면 죽게 되냐?”고 되묻자 벤은 “아마 4주 정도면”이라고 대답한다. 데킬라를 마시며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라는 벤에게서 포근함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 그만 잠이 들고 만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와 스크루드라이버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세라는 황급히 유리에게 달려간다. 유리는 밤새 돈도 벌지 않고 뭘 했느나며 세라를 구타한다. 그들의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다. 과거에도 그에게 매를 맞고 두 번이나 칼로 베인 적도 있는 세라는 순종적이었고, 유리는 그녀를 폭행한 뒤 눈물을 흘리면서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라는 하룻밤을 같이 지낸 벤을 어느덧 오랜 친구처럼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던 중 거리에서 벤치에 홀로 앉아 쓸쓸히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벤을 우연히 발견한다. 반가워 말을 붙이는 그녀에게 벤은 원하면 돈이라도 줄 테니 저녁식사를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세라는 이런 인간적인 제의에 내심 감동했지만 유리에게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 상황이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가 유리를 찾아가자 그는 심한 불안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고 시시각각 쫓고 있는 폴란드계 갱단의 습격이 임박한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유리는 세라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표시로 그녀를 떠나보내면서 다시는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방문을 나선 그녀는 복도에서 유리를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다가오는 갱단을 지나친다.

    마침내 유리에게서 해방된 세라는 벤을 찾아가 저녁식사를 하지고 말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그들은 시내를 산책한다. 벤이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자 세라는 그를 싸구려 모텔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면서, 비록 셋집이지만 이제 자신의 전용이 된 집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 그녀는 그를 믿고 좋아하며, 원하는 것은 오직 밤새 같이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남, 그리고 영원한 이별

    다음날 아침 행복하게 잠을 깬 세라는 벤에게 지금부터 아예 그녀의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벤은 심한 알코올 중독 증상 때문에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외로운 그녀의 청에 결국 승낙하고 만다. 단 한 가지, 자신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는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단다.

    벤이 세라의 집으로 들어오는 날, 그는 여전히 취한 상태다. 그는 세라에게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내 꼬인 영혼을 당신의 인생에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며 같이 있는 동안 그녀의 직업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런 그에게 세라는 예쁜 셔츠와 플라스크(납작한 휴대용 술병)를 선물한다. 이렇게 그들은 잠시나마 마치 신혼부부와도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죽음을 앞둔 알코올 중독자와 인생의 바닥에서 일하는 창녀가 나누는 이런 행복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세라는 점점 더 심해져가는 벤의 알코올 중독 증상에 조금씩 지쳐갔고, 벤 또한 몸을 파는 세라의 직업에 묘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벤이 또 다른 창녀를 세라의 집에 끌어들이는 일이 생기면서 세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벤을 집에서 내보낸다.

    그 직후 세라는 철없는 청소년들에게 무자비한 구타와 성폭행을 당하고, 이일로 그녀의 직업이 탄로나 셋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세라는 벤이 전에 묵던 호텔로 찾아가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날 밤 그녀에게 벤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고 벤의 허름한 숙소로 달려간 세라는 벤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세라는 벤에게 “당신은 나의 사랑”이라고 고백하고, 벤은 세라에게 “당신은 나의 천사”라고 답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벤은 술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관계를 맺고 잠이 든다. 잠에서 깨어난 벤은 자신의 옆에 있는 세라를 바라보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부어라, 저어라, 마셔라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와 스크루드라이버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는 다른 영화에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종류의 술과 음주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벤은 영화 전편에 걸쳐 보드카, 데킬라, 위스키, 칵테일, 맥주 등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술을 섭렵이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마셔댄다. 음주운전은 기본이고, 샤워를 하면서까지 술을 병째 들이켜는가 하면 풀장 안에 들어가 물속에서 맥주를 마시는 ‘음주달인’의 묘기까지 보여준다. 모든 종류의 술을 섞을 수 있는 사발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이 괜한 허사가 아니다.

    칵테일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영화 초반부에 벤이 즐겨 마시는 진토닉에서부터 세라가 호객행위를 할 때 상대방과 마시는 마가리타와 보드카세븐, 카지노에서 벤이 주문하는 블러드메리, 그리고 벤이 라스베이거스의 술집에서 여자와 노닥거리며 주문하는 가미카제와 럼앤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칵테일을 볼 수 있다. 마치 칵테일 교본을 보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벤이 라스베이거스 거리의 벤치에서 정식 칵테일 글라스에 담아 혼자서 쓸쓸하게 마시는 마티니는 조화롭지 못한 상황과 어울리면서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영화 전편에서 가장 인상 깊은 칵테일은 역시 스크루드라이버(screwdriver)일 것이다. 이 칵테일이 등장하는 것은 벤이 세라와 함께 카지노에 갔다 온 후다. 카지노에서 과음으로 인사불성이 돼 행패를 부리다 의식을 잃은 벤은 세라의 집에서 깬다. 숙취의 고통에 그는 냉장고로 달려가 커다란 오렌지주스 통을 꺼낸 뒤 여기에다 보드카를 병째 붓는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이것을 들이켠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섞어서 마시는 이 방법은 바로 스크루드라이버라는 유명한 칵테일의 레시피가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제대로 형식을 갖춘 잔에 담겨 등장하는 다른 칵테일과는 달리 스크루드라이버는 대형 주스 통에 보드카를 왈칵 부어 만들어지는 거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벤이 스크루드라이버를 마시는 장면은 보드카를 병째 마시는 장면과 함께 영화의 주제와 주인공의 상태를 그 이상 잘 나타낼 수 없는 훌륭한 상징이 된다.

    스크루드라이버는 매우 대중적인 칵테일의 하나로, 사각 얼음을 넣은 하이볼 잔에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적정 비율로 섞기만 하면 된다. 보통은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1대 2의 비율로 혼합하지만 개인적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장식을 하고 싶을 때는 오렌지 조각을 넣으면 된다. 그런데 이 칵테일에 스크루드라이버(나사돌리개)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왜일까.

    금주령 속 중동 근로자들이 ‘발명’

    1950년대 중동의 유전 개발 현장에선 많은 미국 기술자가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힘겨운 일과의 스트레스를 한잔 술로 풀고 싶은 기술자들에게 이슬람교의 금주정책은 큰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렌지주스 캔에 몰래 보드카를 넣어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잘 혼합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바로 그들이 갖고 다니던 작업공구인 나사돌리개, 즉 스크루드라이버였다. 이후 이 칵테일은 자연스럽게 스크루드라이버라는 은어로 불리게 됐다.

    스크루드라이버는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만 있으면 집에서도 누구나 즉석에서 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이다. 이 때문에 영화 속의 벤도 술에서 깨자마자 세라의 집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 바로 스크루드라이버를 만들어 마신다. 물론 영화 속의 벤처럼 술을 그렇게 들이켜듯 마실 이유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스크루드라이버를 마실 때는 오렌지주스 때문에 좀 빨리 마시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크루드라이버를 다른 칵테일처럼 천천히 음미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술도 차분히 그 진정한 가치를 느끼면서 음미하노라면 그만큼 더 깊은 맛으로 보답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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