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과의 단독 인터뷰가 성사될 것 같다는 보고를 하자 회사는 막 시작한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장기 연재 회고록 시리즈에 모시라는 지시를 내렸다. 첫 만남은 이런 형식에 대한 그의 승낙을 받기 위한 자리였다. 물경 10여 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선생은 기자의 제의에 선뜻 승낙하지 않았다. 그가 동아일보를 통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다 하지 못했던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과 남한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는 것을 반대했다. 대신 자기의 철학, 즉 인간중심철학을 남한 주민들에게 전파해 당시 막 끝난 촛불 파동에서 목도한 남한의 사상 혼란과 대북 전략 부재를 지적하고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이 보름쯤 뒤인 8월7일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를 방문하기까지 그와 기자는 한동안 기싸움을 벌여야 했다. 철학 이야기냐 인생 이야기냐를 놓고 기자는 수차 선생과 통화했고 측근들을 만났다. 한때 인생 이야기 속에 철학을 녹여 넣는 방식에 합의를 했지만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형식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졌고 대신 선생이 동아일보 사내 학습조직인 ‘남북한 포럼’ 소속 기자 20여 명을 상대로 북한민주화전략에 대해 강연을 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왜 저런 사진이 나갔느냐”
여기서 나타난 선생의 첫 번째 성정은 마음을 정한 뒤에는 잘 바꾸지 않는다는 것, 솔직하게 말하면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13년 전 모든 가족을 버리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진 분으로서 좋고 싫은 것에 무슨 번뇌가 있었을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해보니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가 원하는 회고록을 약속받기 위해 기자가 얼마나 아양을 떨었겠는가. 하지만 선생은 웃는 표정으로 들어줄 듯 들어줄 듯하다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가까이서 선생을 모신 측근들의 의견도 일치한다. 한 제자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선생은 평소 국내외 언론에 실리는 사진에 자신이 강한 모습으로 비치기를 바랐다. 혹 원치 않는 느낌의 사진이 나가면 “왜 저런 사진이 나갔느냐”고 측근들을 질책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을 마음속에 들이는 일에 신중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황 선생은 주변에 새로 사람이 오면 한동안 마음을 주지 않고 지켜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가차 없이 지적을 했다. 한 측근은 “모시게 되고 나서 한동안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 고생했다”고 말했다.
선생은 그러나 한번 마음에 들이면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었다. 기자는 그의 마음속에 비교적 쉽게 들어간 편이었다. 기자가‘어른에게는 배우는 자세로 머리를 숙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자지만 북한학 박사여서 ‘말이 통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선생이 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2009년 7월21일 그를 처음 독대했을 때, 기자는 박사학위 논문과 두 권의 저서를 들고 가 올리며 “북한을 공부하는 후학으로서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선생은 빙긋 웃으며 “우리 함께 공부해봅시다”라고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인연을 맺은 기자는 선생이 10월10일 세상을 떠나기 꼭 9일 전인 올해 10월1일까지 모두 열 번 그를 독대했다. 가끔은 취재를 위해서 만났고 가끔은 근황이 궁금해서 만났다. 때로는 황 선생이 먼저 나를 부르기도 했다. 만나면 주로 황 선생이 말을 했다. 마치 지도교수님이 학생을 개인교습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말을 잘 받아 적었다. 늘 비슷한 이야기였지만 늘 처음 듣는 말처럼 눈을 맞추고 경청했다. 그럴수록 황 선생은 기자에게 더 마음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