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고(故) 황장엽 선생을 추모하며

“기자라고 바쁘다는 핑계 대지 말고 그저 열심히 공부하라우”

  • 신석호│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kyle@donga.com │

    입력2010-11-02 0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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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신석호 기자는 고 황장엽씨를 여러 차례 단독 인터뷰하면서 깊은 유대를 맺었다. 7년 전 북한대학원 학생으로서 황씨의 강연을 들었던 신 기자는 지난해부터 황씨를 여러 차례 만나며 그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신 기자가 바라본 황씨는 집단과 개인 양쪽을 모두 중시한 인간중심주의 철학자였다.(편집자)
    고(故) 황장엽 선생을 추모하며
    내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이하 선생)를 기자로서 처음 ‘독대’한 것은 2009년 7월21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식당에서였다. 2003년 5월과 2007년 4월 모교인 북한대학원대학교(옛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선생의 특강을 두 번 들었지만 기자가 아닌 학생으로서였고 또 여러 학생과 함께였다. 기자로서의 독대는 2008년 9월 이명박 정부가 선생의 자유 활동을 허용하겠다고 밝힌 뒤부터 ‘탈북 10년 만에 진정한 자유 찾은 황장엽’이라는 주제로 단독 인터뷰를 추진해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취재원과 기자로서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게 의미가 있는 ‘꽃’이 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선생과의 단독 인터뷰가 성사될 것 같다는 보고를 하자 회사는 막 시작한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장기 연재 회고록 시리즈에 모시라는 지시를 내렸다. 첫 만남은 이런 형식에 대한 그의 승낙을 받기 위한 자리였다. 물경 10여 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선생은 기자의 제의에 선뜻 승낙하지 않았다. 그가 동아일보를 통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다 하지 못했던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과 남한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는 것을 반대했다. 대신 자기의 철학, 즉 인간중심철학을 남한 주민들에게 전파해 당시 막 끝난 촛불 파동에서 목도한 남한의 사상 혼란과 대북 전략 부재를 지적하고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이 보름쯤 뒤인 8월7일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를 방문하기까지 그와 기자는 한동안 기싸움을 벌여야 했다. 철학 이야기냐 인생 이야기냐를 놓고 기자는 수차 선생과 통화했고 측근들을 만났다. 한때 인생 이야기 속에 철학을 녹여 넣는 방식에 합의를 했지만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형식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졌고 대신 선생이 동아일보 사내 학습조직인 ‘남북한 포럼’ 소속 기자 20여 명을 상대로 북한민주화전략에 대해 강연을 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왜 저런 사진이 나갔느냐”

    여기서 나타난 선생의 첫 번째 성정은 마음을 정한 뒤에는 잘 바꾸지 않는다는 것, 솔직하게 말하면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13년 전 모든 가족을 버리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진 분으로서 좋고 싫은 것에 무슨 번뇌가 있었을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해보니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가 원하는 회고록을 약속받기 위해 기자가 얼마나 아양을 떨었겠는가. 하지만 선생은 웃는 표정으로 들어줄 듯 들어줄 듯하다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가까이서 선생을 모신 측근들의 의견도 일치한다. 한 제자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선생은 평소 국내외 언론에 실리는 사진에 자신이 강한 모습으로 비치기를 바랐다. 혹 원치 않는 느낌의 사진이 나가면 “왜 저런 사진이 나갔느냐”고 측근들을 질책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을 마음속에 들이는 일에 신중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황 선생은 주변에 새로 사람이 오면 한동안 마음을 주지 않고 지켜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가차 없이 지적을 했다. 한 측근은 “모시게 되고 나서 한동안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 고생했다”고 말했다.

    선생은 그러나 한번 마음에 들이면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었다. 기자는 그의 마음속에 비교적 쉽게 들어간 편이었다. 기자가‘어른에게는 배우는 자세로 머리를 숙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자지만 북한학 박사여서 ‘말이 통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선생이 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2009년 7월21일 그를 처음 독대했을 때, 기자는 박사학위 논문과 두 권의 저서를 들고 가 올리며 “북한을 공부하는 후학으로서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선생은 빙긋 웃으며 “우리 함께 공부해봅시다”라고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인연을 맺은 기자는 선생이 10월10일 세상을 떠나기 꼭 9일 전인 올해 10월1일까지 모두 열 번 그를 독대했다. 가끔은 취재를 위해서 만났고 가끔은 근황이 궁금해서 만났다. 때로는 황 선생이 먼저 나를 부르기도 했다. 만나면 주로 황 선생이 말을 했다. 마치 지도교수님이 학생을 개인교습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말을 잘 받아 적었다. 늘 비슷한 이야기였지만 늘 처음 듣는 말처럼 눈을 맞추고 경청했다. 그럴수록 황 선생은 기자에게 더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황 선생을 지켜보는 동안 깐깐한 할아버지의 마음속에 살아 뛰노는, 환히 웃는 어린아이의 성정을 봤다. 2009년 8월7일 동아일보에 온 그가 최남진 화백이 그려준 캐리커처 액자를 받아 들고, 또 자신이 총장으로 있던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한 주성하 기자를 만나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10년 8월15일 광복절에 만나 꼭 65년 전인 1945년 8월15일 강원도 삼척에서 강제징용 중 해방을 맞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마치 22세 청년으로 돌아간 듯 미각과 청각과 시각이 젊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원도 말이 ‘와’ 자를 써. 어데가시와? 그러는 거지. 그 짝에 참 경치 좋은 데 많~습니다. 주문진 같은 데도 아주 깨끗했어. 강릉도 감이 좋은 것이 있지(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감, 그중에서도 곶감이다). 막걸리는 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시큼한 것을 한 사발씩 먹기도 했다. 지금 막걸리는 잘 만들어 좋지만. 그래도 해방된 날 누군가 쌀막걸리를 만들어 돌렸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금방 가버렸어….”

    북한 급변사태론에 동의하지 않아

    그가 세상을 버린 첫날 저녁 빈소에서 만난 한 측근은 “선생은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 때 가장 행복해했던 것 같다. 마치 돌잔치의 주인공인 아이처럼 기뻐했다”고 회고했다. 아마도 책을 쓰고 싶어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북한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래서인지 황 선생은 1997년 남한에 온 뒤 올해 5월 제자인 이신철 박사와 함께 ‘논리학’(시대정신)을 낼 때까지 모두 20여 권의 책을 남겼다. 그는 사망 당시에도 이 책을 비롯해 몇 권의 개정 증보판을 준비 중이었다. 회고록도 1998년 처음 낸 뒤 2006년 개정판을 냈다.

    이 글을 통해 선생의 철학과 평소 주장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선생이 2009년 8월7일 동아일보에 와 강연한 내용은 8월10일자 동아일보에 소개했다. 열흘 뒤인 8월20일에 그는 다시 회사를 방문해 인터넷뉴스 방송인 동아 뉴스스테이션에 출연했다. 천안함 사건 및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이 보낸 암살조 검거 이후인 올해 4월23일 만나 나눈 내용은 다음 날 인터뷰 기사로 실렸다. 선생의 광복절 회고담은 올해 8월17일자에 나갔다.

    선생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한다면 ‘중간의 철학’이라는 점이다. 선생은 말하고 글을 쓸 때 어느 것이나 양쪽의 편향을 지양하고 수렴, 창조적 발전의 원리를 강조했다. 따라서 선생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극보수’가 아니다.

    선생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강조한 집단주의가 싫어 한국행을 택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개인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자주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개인만 강조하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고, 집단만 강조하면 개인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면이 훼손될 수 있다. 두 면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그의 인간중심철학의 중요 테마가 되는 집단주의와 북한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시도했다 실패한 계급주의적 전체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민주화운동을 위한 전략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유행처럼 번진 북한 급변사태론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김정일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을 중심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엘리트들이 뭉쳐 후계체제를 확립할 것이라는 데 한 표를 줬다. 이는 북한이 곧 무너져 남한이 독일식 통일을 이뤄야 하고, 이룰 수 있다는 보수 진영의 기대심리와는 다른 것이다.

    선생이 북한민주화를 위한 대안과 전략의 일계(一計)로 한미동맹 강화를 제시한 것은 보수진영의 논리와 같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미국과의 관계만큼이나 든든하게 해서 중국이 북한을 설득해 중국식 개혁개방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일종의 ‘용중론(用中論)’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맹주를 넘어 세계 제2의 파워가 된 중국을 넘어 중국의 뒷마당에 있는 북한 문제를 우리 마음대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전략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런데 중국식 개혁개방이란 공산당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경제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보수진영이 있으며 선생과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는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적도 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

    기자는 개인적으로 선생이 철학자요 사상가라기보다는 좋은 교육자나 좋은 멘토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선생은 기자의 손을 잡고 늘 이렇게 말했다.

    “기자라고 바쁘다는 핑계만 대지 말고 그저 열심히 공부해. 그래서 장차 큰사람이 되라우. 사람이 그냥 훌륭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훌륭해질 사람이 정해진 것도 아니야. 일찍부터 큰 꿈을 정하고 노력한 사람만이 그렇게 될 수 있어. 큰 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달라. 꼭 그런 사람이 되시오.”

    나중에 들어보니 선생은 배우겠다고 찾아온 모든 후배에게 이런 덕담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벌써부터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좋았다. 멘토란 그런 것이다. 후배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고 더 큰 꿈을 가지도록 하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사람. 선생의 말은 일종의 주문 같았고 기자는 몸에 엔도르핀이 도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이 때문에 많은 후학이 그를 따랐다. 나이에 관계없이 북한의 본질을 알고 싶어하는 많은 지식인이 그와 공부모임을 함께 했다. 마지막 공부모임이 열렸던 10월7일 선생은 참가한 제자들에게 평소에 하지 않던 묘한 발언을 했다.

    “자네들이 앞으로 철학과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네. 먼저 자기를 사랑해야 가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네. 남을 해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야.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해 가족과 사회, 국가가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네.”

    기자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10월1일에도 그는 국가와 기자 개인에 대한 걱정과 덕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기자의 요청에 따라 이날 오전 11시부터 30분 동안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북한보다 남한이 더 걱정된다”며 “천안함 폭침 사건을 북한이 했다고 믿는 사람이 30%밖에 안 되고 북한에 쌀을 주는 문제로 싸움이나 하고 있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우려했다. 이어 “북한보다 월등하게 잘사는 남한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상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북한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해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당부했다.

    선생은 9월28일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모습을 드러낸 북한의 3대 세습 후계자 김정은에 대해 말을 아꼈다. 그는 “벌써부터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은 이르다. 이제 막 얼굴을 드러냈으니 시간을 가지고 좀 지켜보자”고 평가를 유보한 뒤 “그가 잘해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나가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가 김정은에 의한 북한 변화 가능성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음과 동시에 9일 뒤에 찾아올 자신의 죽음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렇게 기자와 잠시 인연을 맺었던 선생은 10월10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 기념일에 김정일 김정은 부자가 열병식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에 생을 마쳤다.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기자실에서 북한 10·10절 기사를 준비하다 선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번뜩 두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아, 9일 전 선생을 보고 싶었던 걸 보니 그와 나의 인연이 깊었나보다. 아, 추석 연휴 다음이었는데 선생이 좋아하는 곶감 한 상자라도 가져다 드렸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텐데.

    선생이 “개인이 죽어도 집단은 죽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가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평소의 지론을 방송을 통해 발언한 사실을 안 것은 그가 떠난 다음이었다. 기자를 만나기 하루 전인 9월30일 대북 단파 라디오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를 통해서였다. 선생은 갔지만 그가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뿌린 씨앗은 여기저기서 다시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자도 그중의 하나임을 밝히며 선생께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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