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승부는 끝나봐야 안다” ‘4대천왕’ 압박하는 ‘2虎’

왕양 광둥성 당 서기, 왕치산 국무원 부총리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0-11-02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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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대천왕(四大天王)’으로 불리며 치열한 차세대 경쟁을 벌여온 시진핑, 리커창, 리위안차오, 보시라이. 제18기 지도부 출범이 2년 앞으로 다가온 지금 이들 4인과 함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 왕양과 왕치산이다. 두 사람은 경력이나 배경에서 사대천왕에 좀 뒤처지긴 해도 언제든 선두다툼을 벌일 수 있는 강자들. 이들 6인을 ‘육호(六虎)’라 묶어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승부는 끝나봐야 안다” ‘4대천왕’ 압박하는 ‘2虎’

    왕양 광둥성 당 서기.

    2012년 10월 출범할 중국의 제5세대 최고지도부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엔 과연 어떤 인물들이 들어갈까. 현재 9명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모두 똑같은 국가지도자 대우를 받는다. 비록 권력서열은 1위 후진타오(胡錦濤)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부터 9위 저우융캉(周永康) 중앙정법위원회 서기까지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만, 주요 정책이나 요직에 대한 인사를 위해 토론하거나 표결할 때는 1인 1표씩 똑같은 권리를 행사한다. 국가 대사를 논의할 때 당 총서기라고 해서 최종결정권을 갖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정치 시스템을 집단지도체제라고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구의 대통령중심제와 사뭇 다른 대목이다.

    시진핑(習近平)-리커창(李克强) 쌍두마차 시대로 예상되는 중국 차세대 지도부는 후진타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등 현 지도부 2인과 장쩌민(江澤民) 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후 주석 및 원 총리와 더불어 제4세대 지도부의 ‘핵심 3인방(트로이카 체제)’ 중 한 명으로 불리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등 4명이 사실상 결정한다. 비록 사전에 전·현직 고위지도자가 베이다이허(北戴河)에 모두 모여 협의를 하지만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사람은 바로 이들 4명이다.

    차기 후계자 등 지도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 1세대 지도부 핵심인 마오쩌둥(毛澤東)은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 스스로 2세대 지도부 핵심이라고 말한 덩샤오핑(鄧小平)은 후계자를 포함한 중국의 차세대 최고지도부를 결정하면서 주위 사람과 상의를 하긴 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중대로 했다. 하지만 장 전 주석이나 후 주석은 마오나 덩과 같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제5세대 지도부는 제3세대 지도부의 핵심인 장 전 주석과 제4세대 지도부의 ‘권력 3인방’이 치열한 물밑 협상과 타협을 통해 결정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제18기 지도부, 즉 중국의 차세대 지도부가 출범할 날이 2년도 채 남지 않았지만 18기 중앙정치국의 상무위원이 몇 명이 될지, 누가 이 안에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종 목적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는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고, 이곳까지 다다르는 길목엔 아직도 변수가 더 많은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은 2년간 18차 당 대회가 열릴 때까지 중국 정계는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누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유력할지 대략 추정해볼 수는 있다. 우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수는 9명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16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부터 상무위원 수는 9명이었다. 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수가 15기처럼 7명으로 다시 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17기에도 그 수는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18기에도 상무위원 수는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2012년 출범할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아홉 자리 중 두 자리는 현 상무위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리커창 부총리가 차지할 것이다. 이들은 18기는 물론 19기에서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서 2022년까지 중국을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다.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무려 15년간 앉아 있게 되는 셈이다.

    제4세대 최고지도부의 최고권력자가 된 후 주석은 1992년에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따라서 후 주석은 이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서 18년을 근무했다. 앞으로 2년이 더 남았으니 그의 상무위원 재직기간은 20년이 될 전망이다. 권력서열 2위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각각 10년간인 정치국 위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할 예정이다. 1992년 후진타오와 우방궈에 각각 한 끗발씩 밀려 정치국 후보위원에 그친 원 총리는 5년 뒤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한 데 이어 2002년엔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18기 상무위원 유력

    17차 당 대회 직전 시진핑, 리커창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며 ‘4대천왕(天王)’으로 불리던 리위안차오(李源潮) 당 중앙조직부장과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도 18차 당 대회 직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라갈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이들 4인방과 함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은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서기와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다. 이들은 경력이나 배경 등에서 ‘4대천왕’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막상막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 선두다툼에 가세할 수 있는 강자다. 전문가와 중화권 언론들은 이들 6명을 ‘육호(六虎)’, 즉 6마리의 호랑이라고 일컫는다.

    “승부는 끝나봐야 안다” ‘4대천왕’ 압박하는 ‘2虎’

    지난해 11월2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왕양 중국 광둥성 당 서기를 접견하고 있다.

    이들 6인은 모두 17기 중앙정치국의 25명 정(正)위원에 포함돼 있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똑같이 국가정상급 인사라면 중앙정치국 위원 25명은 똑같이 부(副)정상급(부총리급) 인사다. 중국에서는 부총리급 이상 지도자가 돼야 ‘국가영도(국가지도자)’라고 불린다. 또 국가정상급은 정국급(正國級), 부정상급은 부국급(副國級)으로 부른다.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은 보통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여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한 표씩을 행사한다.

    하지만 이들 중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와 왕치산 부총리는 1940년대 출생이다. 반면 시진핑, 리커창, 리위안차오, 왕양은 1950년대 출생이다. 1940년대 출생자는 2012년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2017년 18차 당 대회 때는 상무위원직을 내놓아야 한다. 이는 중국이 간부들의 연경화(年輕化)를 추진하면서 이미 굳어진 관행이다. 2002년 가을 후진타오 지도부가 출범할 때 장쩌민 전 주석의 동년배 지도자는 줄줄이 물러났다. 또 2007년 가을 17기 지도부가 출범할 때도 당 대회가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만 67세를 넘은 사람은 모두 퇴진했다.

    앞으로도 이런 연령 제한에는 변함이 없을 듯하다. 따라서 1948년 7월생인 왕치산과 1949년 7월생인 보시라이는 2017년 가을이면 나이 제한에 걸려 일선 지도부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들이 2012년 가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더라도 ‘중국의 5세대 지도부’로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후 주석을 필두로 한 제4세대 지도부에 이미 진입했어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 6명을 제외하고 201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사람은 링지화(令計劃·54) 중앙서기처 서기다. 일각에서는 위정성(兪正聲), 류옌둥(劉延東), 장더장(張德江), 류윈산(劉雲山), 장가오리(張高麗) 중앙정치국 위원과 왕후닝(王?寧) 중앙서기처 서기도 거론한다. 하지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단 9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위정성을 비롯한 이들 6명 또는 이들 6명을 포함한 다른 후보들은 위에서 언급한 7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2자리를 놓고 치열한 자리다툼을 벌여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 왕·양

    중국에서 몇몇 ‘낙하산 인사’를 제외하고 특히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치가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 승진이 가장 빨랐던 사람은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리커창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그리고 왕양 광둥성 서기 등 3인이다.

    ‘리틀 후’로 불리며 후 주석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한 리 상무위원은 28세에 이미 공청단 중앙학교 부부장과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서 청장급에 승진했고 30세 나이로 차관(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올랐다. 이어 38세에 장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거머쥐었다(제6세대 지도자군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승진하고 있는 루하오(陸昊)도 41세 때인 2008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맡았다). 리커창은 43세 때 당시 최연소로 성장급에 승진했다.

    후 주석 역시 출발은 늦었지만 42세에 장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한 데 이어 이듬해엔 43세의 젊은 나이로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가 됐다. 49세의 나이로 국가지도자 중 한 사람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후 주석의 기록은 앞으로도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갓난아기 시장’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왕양은 17세 때 다니던 고교를 그만두고 공장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승진 속도는 후 주석이나 리 상무위원과 별반 차이가 없다. 26세에 안후이(安徽)성 쑤(宿)현 부서기를 맡은 데 이어 이듬해엔 처장급인 공청단 안후이성 선전부 부장에 올랐다. 이어 33세에 청장급, 38세에 차관(부부장)급에 올랐다. 비록 리 상무위원보다는 못하지만, 집안 배경도 미미하고 이끌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이 여기까지 자력으로 올라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왕양이 1988년 33세의 나이로 안후이성 퉁링(銅陵)시 시장을 할 때는 전국에서 가장 어린 청장급 간부 중 한 사람이다 보니 주변에서 ‘와와(娃娃) 시장’이라 불렀다. ‘와와’란 갓난아기를 뜻한다. 이처럼 젊은 시장이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하면서 특별히 그를 접견해 격려했다. 38세로 안후이성 부성장에 임명될 때도 전국 최연소 부성장이었다.

    “승부는 끝나봐야 안다” ‘4대천왕’ 압박하는 ‘2虎’
    1979년 안후이성 쑤현의 일개 지방 간부학교 교원이던 왕양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를 중앙당교로 보내 공부를 시킨 사람은 덩샤오핑과 더불어 중국의 ‘8대 원로(八大元老)’ 중 한 명이자 당시 안후이성 제1서기이던 완리(萬里)였다.

    왕양은 중앙당교 이론·선전 간부반에서 후 주석의 사상적 사부인 후야오방(胡耀邦·1915~89)의 가르침을 받았다. 왕양이 당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 후야오방은 중앙당교의 상무부교장이었다. 물론 당시 64세의 후 부교장이 24세의 왕양에게 어떠한 사상을 직접 전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무렵 후야오방의 사상해방 정신과 개혁개방 및 민주이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왕양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왕양은 태자당(太子黨), 상하이방(上海幇)과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3대 계파 중 하나인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계열)’의 ‘8대금강(八大金剛)’으로 불린다. 그는 1979년 중앙당교에서 연수를 받은 뒤 안후이성 공청단에서 4년을 일했다. 하지만 1955년생 동갑내기 리커창과 달리 퇀파이의 ‘교주’인 후 주석의 배려를 많이 받지는 못했다. 리커창은 후 주석과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으나 왕양은 그런 인연이 없어 후 주석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양이 후 주석의 배려와 후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안후이성에서 중앙으로 올라와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과 국무원 부비서장을 맡게 된 1990년대 말부터다. 특히 후 주석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우뚝 선 2003년 이후 왕 서기와 링지화 중앙서기처 서기가 후 주석의 ‘은덕’을 많이 입었다고 한다.

    왕양은 안후이성에서 태어나 1999년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베이징에 올라오기 전까지 안후이성에서만 27년을 근무한 정통 안후이방(安徽幇)이다. 안후이방의 주요 인사로는 후 주석을 비롯해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리 부총리, 왕 서기, 왕민(王珉) 랴오닝(遼寧)성 당 서기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후 주석, 리 부총리, 왕 서기는 ‘안후이 3인방’으로 불린다.

    후 주석은 안후이성 남쪽 끝자락인 지시(績溪)현, 리 부총리는 안후이성 중북부의 딩위안(定遠), 왕 서기는 최북단인 쑤저우(宿州) 출신이다. 지시에서 딩위안은 한국의 서울에서 광주, 딩위안에서 쑤저우는 서울에서 대전 거리지만, 국토가 넓은 중국에선 이 정도 거리에 사는 사람을 타지에서 만나면 ‘고향 까마귀 본 듯’ 반긴다.

    얼굴은 귀공자 타입이지만 왕양의 업무자세는 누구보다도 친서민적이다. 충칭시 당 서기로 일하던 2006년 여름 농촌의 채소시장을 방문해 그가 채소 파는 농민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는데, 옆에 있던 수행원이 농민에게 일어서서 대답하라고 여러 차례 재촉했다. 그러자 그는 수행원에게 화를 내며 “말 몇 마디 하기 위해 일어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호통을 쳤다. 한번은 그의 현지시찰을 위해 교통경찰의 차량 통제로 차들이 줄지어 선 것을 보고 “당장 시민에게 길을 터주라”고 지시했다.

    “한국을 배우자!”

    그는 공리공담보다 실제 행동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책상머리에서 일하는 때보다 밖으로 시찰을 나가는 때가 더 많았다. 2006년 충칭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그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장을 뛰며 가뭄 극복에 진력했다.

    2007년 11월30일 광둥성 당 서기로 발령 나 충칭을 떠날 때 많은 사람이 그를 눈물로 전송했다. 충칭시민들은 그가 서기로 재직하면서 충칭시를 농공병진의 모범지역으로 만든 데 감사했다. 그 역시 충칭을 떠나면서 “나는 영원한 충칭인”이라며 뜨거운 애정을 표현했다.

    왕 서기는 광둥성 서기로 임명받은 뒤 ‘사상해방’과 등롱환조(騰籠換鳥·새장을 들어 새를 바꾼다는 뜻) 정책을 강력 추진했다.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치자 이를 주장(珠江) 삼각주 지역의 저임금·저효율 산업구조를 탈피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 이는 후 주석이 줄기차게 외쳐온 ‘유하오유콰이(又好又快)’전략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량 실업이 발생하자 한때 경제 총책임자인 원 총리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자 원 총리는 왕 서기의 산업구조 조정을 위한 개혁 드라이브에 지지를 보냈다. 멀리 내다보는 왕 서기의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왕 서기는 “2007년 광둥성의 총생산이 4050억달러로 3669억달러에 그친 대만을 따돌렸다”고 선언한 뒤 “앞으로 20년 안에 한국을 추월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한국에서 먼저 배워야겠다”며 지난해 11월 정·재계 인사 700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아 산업시설은 물론 청계천 복원 현장, 새마을운동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돌아갔다.

    이런 행보에선 ‘중국 개혁개방의 1번지’인 광둥성을 다시 ‘산업구조 전환의 모범 성’으로 만들어 2012년 10월 구성될 차세대 지도부의 핵심을 차지하겠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읽힌다. 2년 뒤 왕 서기의 목표는 단순히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왕·치·산

    부모 중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도 없는데 태자당으로 불리고, 칭화(淸華)대에 다닌 것도 아닌데 칭화방(淸華幇)이고, 역사 연구에 12년, 농촌 연구에 7년을 근무했는데 ‘금융통’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왕치산(王岐山) 중앙정치국 위원 겸 부총리다.

    태자당이란 권력 실력자인 부모의 후광으로 중국 정치권력의 핵심 요직에 포진한 4000여 명의 당정 간부를 일컫는 말이다. 칭화방이란 칭화대를 졸업한 동문을 지칭하는 말이다. 왕치산 부총리의 부친은 칭화대 교수로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가족 모두가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으로 하방(下放)됐다. 여기서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 일가를 알게 돼 왕치산은 야오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다. 장인이 고관대작인 덕택에 태자당이 된 셈이다.

    그는 하방 시절 산시성 시안(西安)에 위치한 시베이(西北)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배려로 칭화대에서 경제학원 교수를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장인 역시 칭화대 출신이다. 이러다 보니 칭화대를 나오지 않고도 칭화방으로 분류된다.

    1971년 산시성 박물관 근무를 시작으로 역사와 인연을 맺은 그는 1973년 시베이대에 들어가 역사를 전공했고, 졸업하고 나서도 산시성 박물관에서 1979년까지 근무했다. 이어 1979년부터 1982년까지 3년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역사연구소에서 실습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장인의 후광으로 1982년 중국 공산당의 핵심 싱크탱크인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들어가면서 농촌 전문가로 변신했다. 공산당원도 아닌 그가 장인의 후원이 없었다면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이곳에서 근무하던 1983년 2월에야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2012년 10월 구성될 18기 중앙위원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으로 확실시되는 ‘6마리의 호랑이(六虎)’ 가운데 왕 부총리는 1948년 7월생으로 나이는 가장 많지만 공산당 가입 시기는 가장 늦다. 그가 1955년생인 왕양 서기나 리커창 부총리, 시진핑 부주석보다 나이가 5살 이상 많지만 경력이 이들보다 적잖이 뒤처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연구가에서 농촌연구원으로 직업을 바꾼 그는 1988년 중국농촌신탁투자공사 총경리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이번엔 금융통으로 변신했다. 이어 중국인민건설은행 부행장, 중국인민은행 부행장, 중국인민건설은행장, 중국건설은행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2008년 3월 물러난 쩡페이옌(曾培炎) 부총리에 이어 금융 담당 부총리로 임명된 것도 이 때문이다.

    “승부는 끝나봐야 안다” ‘4대천왕’ 압박하는 ‘2虎’
    왕 부총리는 ‘행운의 사나이’로도 불린다. 2002년 11월 제4세대 지도부가 출범하면서 그의 후원자인 주룽지 총리는 그를 다이상룽(戴相龍) 인민은행장의 후임에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주 총리는 측근인 저우샤오촨(周小川)을 미는 장쩌민 당시 주석에 밀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왕치산은 하이난(海南)성 서기로 밀려났다. 하지만 다음해 초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가 터지면서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막 권좌에서 물러난 장 전 주석과 막 정권을 잡은 후 주석이 정치적 타격을 공유하기로 하면서 장 전 주석의 측근인 장원캉(張文康) 위생부장과 후 주석의 측근인 멍쉐눙(孟學農) 베이징 시장이 한꺼번에 물러나고 왕치산이 하이난성으로 내려간 지 5개월 만에 베이징 시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 장인 및 주 전 총리의 후원과 행운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중화권 매체는 그의 일하는 자세가 착실하고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놓고 자랑하기 싫어하며 서민을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세심하다고 평가한다. 또 절대 허풍을 떨지 않으며 실질을 중시하면서도 사람들과 만나면 걸출한 입담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불 끄는 소방대장’으로 불린다.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휩쓸면서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광둥성이 흔들릴 때 광둥성을 위기에서 구출했고, 사스로 하룻밤에 수백만명이 탈출하는 혼란에 빠진 베이징의 시장으로 임명돼서는 차분하게 사태를 수습했다. 베이징 시장에 임명된 첫날 그는 “1은 1이고 2는 2다. 군중(軍中)에서는 농담을 하지 않는 법(軍中無戱言)”이라며 “절대 사태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려 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보고하라”며 혼란사태의 근본이 사스 자체보다 당국에 대한 시민의 불신에 있다고 강조했다.

    ‘불 끄는 소방대장’

    그는 베이징의 골칫덩어리인 교통 문제도 해결했다. 1200만명의 상주인구와 500만명의 유동인구가 함께 살아가는 베이징은 하루 교통인구만도 800만명이 넘는다. 따라서 교통 문제는 아프리카 48국의 정상급 인사가 참가하는 2006년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가장 큰 난제였다. 하지만 그는 언론매체와 문자메시지를 통해 시민들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경쟁계파인 퇀파이도 그의 이러한 업적을 인정한다. 2007년 11월29일 그가 베이징 시장을 궈진룽(郭金龍·63) 안후이성 당 서기에게 물려줄 때 선웨웨(沈躍躍)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은 “왕치산 동지는 2003년 사스 발생 당시 베이징 시장을 맡아 5년간 베이징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지혜와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선 부부장은 공청단 출신으로 후 주석의 여성 측근 중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역과 금융을 담당하는 왕 부총리 앞에는 위안화 국제화와 미국과의 무역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둘 다 난제다. 특히 최근엔 미국과의 무역 불균형에 따른 갈등과 위안화 환율 문제가 점차 미중관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평범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을 통해 일약 태자당으로 변신한 뒤 역사, 농촌 연구에 이어 금융과 지방 제후에 이르기까지 10년마다 업무 영역을 완전히 바꿔가면서도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해온 왕 부총리. 많은 전문가가 2년 뒤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에 무난히 진입할 것으로 보지만, 여전히 그의 앞날엔 시험대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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