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 없이는 정상화도 통일도 불가능
1990년 늦가을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하던 동독의 주민들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들고 나오면서 동독의 평화적 정치혁명이 민족혁명으로 발전했다. 이후 독일의 통일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물결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민족 또한 하나의 민족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는 아직까지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동유럽에서, 특히 동독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변화가 없이는 한반도의 통일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그러한 변화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변화 변혁을 향한 움직임은 먼저 북한 내부에서 시작되고 북한 주민들이 그러한 변화를 요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외부에서 북한의 체제에 가해지는 압력은 그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심과 현재의 열악한 상태라도 유지하려는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통일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한반도에서 북한 체제가 붕괴되어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통일 한국은 북한 엘리트의 일부와 협력하지 않고는 북한 지역에서 통일된 체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가정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 지역에서 통일된 새로운 체제에 협력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별하는 적절한 틀을 마련하는 일이다. 독일의 경험에서 특기할 점은 군대 경찰과 같은 민감한 부분에서 그러한 협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순수하게 전문 직업인의 차원에서 의무를 따르고 명령에 따라 잘 협력하는 것을 그들의 직업윤리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군대 경찰과 동일한 전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지도층과 국민은 통일 이후에도 북한의 어떤 요소들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또는 심지어 어떤 것들을 통일 한국에서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임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만일 북한 내부에서 어떤 정치적인 변화가 발생해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를 해방했을 때 이후의 발전과정이 남한에 의한 북한의 식민지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협력, 비용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점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이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주민들의 삶은 모든 영역에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반면에 구서독지역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믿었다. 그 이유는 단지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서독인들이 보기에 체제 변화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서독의 체제가 동독에 전반적으로 수용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거대한 ‘서독체제’를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아주 새로운 독일을 탄생시켰다.
독일의 경험이 분명히 보여준 것은 적대적인 두 국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적은 비용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더욱이 통일 이후 독일이 지출한 항목 중에는 한국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아주 많은 비용이 들었던 부분들도 한국에서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