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과학 한국’, 노벨상 앞에 당당하라!

  • 이한음|과학칼럼니스트 lmgx@naver.com|

    입력2010-11-02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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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을 한꺼번에 2명씩 받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15명이나 받았는데 왜 한국인은 1명도 못 받나?
    • 이런 식으로 추궁한다면 ‘인류를 위한 공헌’이라는 노벨상의 취지는 무색해진다. 과학 영재를 키우자, 기초 과학을 육성하자는 주장도 개인의 영달과 국가의 영광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속물스럽기만 하다.
    ‘과학 한국’, 노벨상 앞에 당당하라!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가 잇달아 발표됐다. 생리의학상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로버트 에드워즈에게 돌아갔다. 이른바 ‘시험관 아기’를 만드는 체외수정 기술 발명 공로가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의 기술로 1978년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인 루이스 브라운이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400만명이 넘는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수많은 불임 부부에게 축복을 준 것이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은 그의 수상에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어떻게 인류에게 기여한 공로라고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나름대로 이해는 간다. 무엇보다도 에드워즈는 아기를 잉태하고 낳는 신비하고 성스러운 행위를 인간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단순한 물질적 과정으로 전락시켰으니까.

    하지만 당시 온갖 윤리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 기술은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운 부분은 있으나 지금은 윤리적 논란에서 거의 벗어나 있다. 그만큼 친숙해졌을 뿐 아니라, 배아줄기세포나 복제 같은 훨씬 더 큰 논란을 빚는 기술들이 등장한 덕도 있다. 게다가 사실 인공수정을 통하든 자연잉태를 하든 간에 아기를 갖는 행위 자체는 여전히 신비하고 성스럽다. 기술이 개입된다 해도 아기를 갖는 각각의 부부가 느끼는 신비로운 경험 자체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물리학상은 러시아 출신으로 현재 영국 맨체스터대에 재직 중인 안드레 가임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공동 수상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이들은 연필심의 성분인 흑연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흑연은 종이 묶음처럼 탄소로 이뤄진 얇은 판이 층층이 겹쳐져 만들어진다. 각 층의 탄소들은 벌집무늬를 이루는데, 탄소 원자 하나 두께의 이 얇은 층을 그래핀이라고 한다. 그래핀은 지금의 실리콘 반도체를 훨씬 능가하는 소재다. 그래핀은 강철보다 튼튼하면서도 얼마든지 구부릴 수 있으며, 그 안에서는 전자의 이동 속도가 아주 빠르다. 따라서 그래핀을 이용하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면서도 작고 안정된 전자기기를 만들 수 있다.

    스카치테이프로 노벨상 탔다?



    ‘과학 한국’, 노벨상 앞에 당당하라!
    문제는 원자 하나 두께의 얇은 판을 만든다는 것이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것. 그런데 가임과 노보셀로프는 스카치테이프 하나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테이프를 붙였다 떼자 그래핀 한 층이 떨어져 나온 것이다. 정말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이들의 연구는 2004년 ‘사이언스’에 실렸다.

    그로부터 겨우 6년 만에 그들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됐다. 체외수정 기술을 찾아낸 에드워즈는 노벨상을 타기까지 무려 42년이나 걸렸는데 말이다. 아마 최근 들어 그래핀이 꿈의 신소재로 각광을 받으며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데 힘입은 모양이다.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은 1987년 요하네스 베드노르츠와 카를 뮐러가 고온 초전도체 실험 결과를 발표한 지 18개월 후 노벨상을 받은 이래로 가장 빨리 받은 것이다. 가임은 10년 전 자석으로 개구리를 공중 부양시킨 연구로 노벨상을 패러디한 ‘이그노벨상’도 받았다. 이그노벨상은 엉뚱한 연구를 한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그런 내용만 들어도 두 연구자가 얼마나 재미있는 인물인지 짐작이 간다. 그래핀은 아직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지금으로선 그들이 과학은 재미있고 창의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널리 알렸다는 측면에 더 높은 점수를 줘도 될 듯싶다.

    화학상은 미국 델라웨어대의 리처드 헤크, 퍼듀대의 네기시 에이이치, 일본 홋카이도대의 스즈키 아키라가 각자 독자적으로 탄소 원자들을 효율적으로 결합시키는 연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했다. 탄소는 유기물의 주성분이며, 다른 원소들과 결합해 온갖 복잡한 분자들을 만든다. 생물은 체내에서 복잡한 생화학 단계를 거쳐 수많은 탄소 화합물을 만들지만, 인공적으로 그런 화합물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반응이 복잡한 데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순물도 많다. 이들은 금속인 팔라듐을 촉매로 삼아 그 반응의 정확도와 속도를 높였다. 덕분에 각종 화학약품, 의약품 등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크게 줄었다.

    노벨상은 ‘목표’가 아니라 ‘부산물’

    ‘과학 한국’, 노벨상 앞에 당당하라!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가임(왼쪽)과 노보셀로프.

    화학상 공동 수상자 중 2명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인이다. 그 점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에겐 경쟁 심리가 발동한다.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의식의 전면으로 나선다. 일본인은 한꺼번에 2명씩 노벨상을 타는데, 우리는 1명도 못 타다니? 여기에 그래핀 연구에서 가임·노보셀로프 연구진과 경쟁 중인 미국 컬럼비아대의 한국인 김필립 교수가 안타깝게 제외되고,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라는 고은 시인도 고배를 마셨다는 소식이 더해지자 이런 감정은 더 고조된다.

    왜 일본은 타는데 우리는 못 타나. 노벨상을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구자라는 개인 자체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일본, 한국, 중국이라는 아시아 3대국의 경쟁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시각은 언론매체를 보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일본은 이번에 화학상 수상자를 2명이나 배출한 것을 비롯해 국적 변경자까지 포함하면 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15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기사가 줄줄이 실렸다. 상세한 분석도 따라붙는다. 과학 분야 수상자로 보면 일본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스위스에 이은 세계 7위 강국이고, 외국 ‘물’을 먹어본 적이 없는 토종 과학자, 학계에 몸담고 있지 않은 기업의 연구원까지 수상할 만큼 기초과학의 저변이 튼튼하며, 그것은 국가가 기초과학 연구에 아낌없이 지원과 투자를 한 덕분이라는 등등.

    그런 반면에 우리에겐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한 우물을 팔 수 있는 여건이 미비할 뿐 아니라 가임 같은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기는커녕 주입식 암기 교육에 치중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을 외면하고 홀대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등의 비판과 반성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양한 해결책도 제시된다.

    요즘 노벨상을 다룬 기사에서 눈에 띄지 않는 내용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노벨상의 취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생략하는 모양이다. 알다시피 노벨상을 만든 노벨은 폭발물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인물이다. 그래서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렸고, 자신이 죽고 난 뒤에 그런 별명으로 기억될까 두려워서 인류 발전과 평화에 기여한 인물에게 줄 상을 제정했다.

    노벨은 국적 따지지 말라고 했건만…

    노벨은 사실 바로 전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제공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했지만, 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얼마나 혜택을 줬는지는 시간이 좀 흘러야 드러날 테니까. 노벨도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겠지만, 굳이 유언장에 ‘전해’라는 말을 쓴 것은 젊은 학자를 지원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참신한 아이디어는 젊은 두뇌에서 나오게 마련이며, 젊은 학자가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면 곧 눈에 띌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젊은 학자에게 거액의 상금은 후속 연구를 하거나 생활 기반을 잡는 데 아주 유용할 테고. 그러나 노벨상은 젊은 학자보다는 그 학자가 세월이 흘러 학계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은 뒤에 수여되는 경향이 강하다. 시간이 흘러야 인류에게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 게 아닌가.

    노벨재단의 마카엘 솔만 사무총장은 노벨상이 오늘날과 같은 명성과 권위를 지니게 된 데에는 최초의 국제적인 상이라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전까지는 나라마다 자국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상을 줬다. 국적을 가리지 말라고 명백히 밝히며 상을 제정한 것은 노벨이 처음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국왕까지 나서서 이에 반대했다. 남의 나라 학자에게 굳이 상과 상금을 줄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벨상은 그런 우려를 불식하고, 오히려 스웨덴의 국격을 높이는 데 가장 큰 힘이 됐다.

    노벨은 국적을 따지지 말라고 했건만, 지금 우리 사회는 노벨상을 국가 차원의 상으로 보고 국격을 높이려는 쪽으로 이용하려는 듯하다. 본래의 취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로지 한국인이 받느냐 만 중요한 듯하다. 수상자가 어떤 연구를 했으며 인류에게 어떻게 얼마나 공헌을 했느냐는 질문은 조그맣게 다뤄지거나 아예 다뤄지지 않는다. 왜 우리는 못 받는가라는 부정적인 질문만이 난무한다.

    지금과 같은 풍토라면 노벨상을 한번 받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한번 받았으니 됐지 뭐…’라는 식으로 썰물 빠지듯 관심이 식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연구자에게 목표가 아니며, 국가 차원의 목표도 아니다. 우리는 노벨의 취지를 잊고 있다. 인류에게 어떤 기여를 할 것인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잊고 있다.

    노벨상의 기준은 인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느냐이므로 역대 수상자의 업적을 살펴보면 인류가 얼마만큼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물리학상은 그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1901년 노벨상이 처음 수여되기 시작했을 때 물리학은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돌턴의 원자론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중이었다. 뢴트겐이 엑스선 연구로 첫 수상자가 된 이래로 물리학상은 대개 원자보다 점점 더 작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규명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더 나중에는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 밝혀낸 것들을 드넓은 우주에 적용해 별의 탄생과 진화를 밝혀내는 일을 한 연구자들에게도 상을 줬다.

    세상을 바꿔놓다

    ‘과학 한국’, 노벨상 앞에 당당하라!

    1978년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루이스 브라운이 어린 시절 아빠에게 안겨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듯했지만, 이윽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 텔레비전, 컴퓨터, 무선통신, 인공위성, 각종 전자기기 등은 모두 그런 연구의 산물이다.

    화학상은 화학물질의 특성을 밝힌 연구자에게 주어져왔다. 화학반응의 근본적인 특성과 한계를 설명하는 열역학, 생체를 이루는 각종 유기물질의 구조와 특성을 밝혀내는 유기화학, 갖가지 화학물질을 찾아내고 분리하는 분석화학, 갖가지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분야 등에서 골고루 수상자가 나왔다.

    우리가 늘 접하면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준 혜택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분야가 아마 화학 아닐까. 우리는 식품, 의약품, 세제, 비닐 등 온갖 합성 화학물질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런 물질의 발명과 합성에 노벨상 수상자들은 크게 기여했다. CFC라는, 널리 쓰이는 냉매가 인류를 비롯한 지구 생물들을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알림으로써 그 물질의 합성을 금지하는 데 기여한 수상자들도 있다.

    생리의학상은 범위가 다양하다. 지금은 금지된 DDT처럼 생명을 살상하는 살충제를 발명한 공로로 수상한 연구자도 있고, 페니실린 같은 생명을 구하는 물질을 발견한 공로로 수상한 연구자도 있다. 초창기에는 몸에 침입하는 병균이나 그것을 막는 면역 체계, 치료법, 인체의 기능 등을 연구한 사람이 많이 수상했지만,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는 생체 분자 연구 쪽에 상이 수여되는 경향이 있다. 생리의학상 수상자들은 의학과 약학 분야의 발전을 이끌며 인류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노벨상은 이런 연구 성과를 널리 알리고 연구자의 영예를 드높이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수상자는 강연 등을 통해 후대에게 과학이 무엇이며, 과학자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알림으로써 교육에 크게 기여한다.

    또한 노벨상은 과학자들을 모으고, 잇는 일종의 허브 노릇을 한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를 뽑기에 앞서 전세계의 과학 분야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연구자에게 수상 후보를 추천해달라고 의뢰한다. 그런 뒤 추천받은 후보들의 업적을 권위자들이 심사해 추린다. 이 과정을 통해 과학자들은 서로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고 평가할 기회를 갖는다. 그런 인맥 활용 과정이 노벨상의 권위를 유지시키고, 뛰어난 업적을 이룬 연구자를 찾아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벨상은, 인류에게 공헌했다는 기준은 아직 충족시키지 못했어도 뛰어난 업적을 이룬 과학자들에게 애써 상을 줌으로써 과학 발전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했지만, 그 이론은 아직 검증이 안 된 상태였다. 그래서 노벨위원회는 이것 대신 광전효과를 발견했다는 업적을 인정해 아인슈타인에게 상을 줬다. 그래핀이나 상온 초전도체의 발견을 인류에게 혜택을 준 업적으로 인정한 것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직 인류에게 실질적으로 혜택을 주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으니까 인정해 널리 알리자는 태도다. 노벨상은 그렇게 세상을 바꿔왔다.

    과학 발전은 양날의 칼

    ‘과학 한국’, 노벨상 앞에 당당하라!

    1945년 8월6일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하지만 무엇이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답하기 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DDT는 발명자에게 노벨상을 안겨줬고, 해충을 박멸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을 줄이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새의 알껍데기 두께를 줄여서 조류의 수를 줄이는 등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데에도 한몫했다.

    올해의 생리의학상을 받은 업적은 또 어떠한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체외수정 같은 보조생식술을 통해 태어나는 아기가 한 해 2만명은 된다. 체외수정으로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는 쌍둥이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트 에드워즈는 인류에게 큰 혜택을 안겨준,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하지만 교황청은 체외수정이 없었다면 난자를 생명이 아닌 상품으로 사고파는 시장도 없었을 것이고, 수많은 수정란이 장기간 냉동 보관되다가 쓸모없어져 버려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과학 발전은 양날의 칼이다.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발견이나 업적은 그늘진 이면을 지닐 때가 많다. 모든 화학물질은 적절히 쓰면 약이 되고 유용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되거나 쓰레기를 남긴다. 오존층 파괴처럼 대책을 세우기도 쉽지 않고 원상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여러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준 핵물리학 연구 성과는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그런 폭탄은 전쟁 억제력을 역설하는 이들에게는 혜택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류의 몰락을 가져올 위험덩어리다.

    왜 우리만 상을 못 타는가 하는 자괴심과 조바심을 떨치고 좀 넓게 보면, 노벨상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까. 국격이 아니라 사람의 품격을 높이는 기회 말이다.

    노벨상이라는 말만 나오면 으레 기초과학을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과학 교육이 활기를 띠고 있는 듯도 하다. 각종 과학 캠프가 열리고, 과학 동아리도 많다. 요즘 학교 앞에선 어느 대학교에 몇 명 합격이라는 현수막뿐 아니라 어느 과학 경시대회 입상 같은 현수막도 자주 본다.

    과학자가 되고 싶니? 왜?

    그런데 그것이 과학기술을 즐겁게 배우고 호기심을 부추기고 충족시킴으로써 과학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긍정적인 답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우리 사회에서는 기초과학 육성이라는 말이 왠지 과학 영재를 어릴 때 찾아내 집중 육성하자는 주장과 연결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제2의 아인슈타인, 스티븐 잡스, 빌 게이츠를 찾아라!’는 식이다. 많은 이가 이런 풍토를 보고 구시대의 엘리트 체육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초과학의 육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면 올바른 인간, 인류에 공헌하는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아닐까.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위한 영재 육성, 교육 환경 조성 등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어디에도 개인의 영달이나 국가의 영광이 아닌 인류를 위한 공헌이 목표라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다. 노벨상 기사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저급한 속물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먼저 ‘과학자가 되고 싶니?’ ‘왜?’라고 묻는 것부터 시작하는 편이 낫다. 그 질문이 빠진 순간, 노벨상이 획일적 교육의 산물이라고 만천하에 선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심심하면 한 번씩 내뱉는 “한국 교육 최고예요! 본받으세요!”라는 말에 힘입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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