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 유안진│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2010-11-02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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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눈이 붉은 한 사람과 마주 보면 무섭거나 불쾌해진다. 괜히 그렇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미안하고 가엾어진다. 틀림없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것도 그저 며칠을 못 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밤이면 밤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못 잔 나머지 쌓이고 덧쌓인 피곤으로 그런 눈이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란 못 입고 못 먹어서, 혹은 가족이나 친구가 없어서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원인은 불면(不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러 날을 안 먹고 살 수 있지만, 여러 날 계속해서 잠을 못 자면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 자체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고서도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지만, 40일 불면했다고는 쓰여 있지 않다. 나 같은 약골은 4일 연속 잠을 못 잔다면 미쳐버리거나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일까? 단식이나 금식하는 이들도 잠만은 충분히 잔다고 한다.

    아잇적부터 잠버릇이 나쁜 나는 잠들기도 힘들었지만 잠 깨기도 힘들었다. 아잇적의 그 버릇이 내처 지금까지 그렇기 때문에, 잠자는 것은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면의 충분 정도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같은 사람이라도 그때그때의 건강상태에 따라, 더 또는 덜 자도 괜찮을 것이다.

    올빼미 삼신을 타고났다는 지청구를 들으며 자라던 나는 가을밤과 겨울밤에 특히 잠들기가 힘들었다. 문풍지 우는 소리, 울타리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댓돌 밑을 구르는 나뭇잎 소리에서, 뒷벽에 걸린 마른 시래기 타래를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들던 잠이 깨버리곤 했다. 심지어는 무서리가 내리는 소리인지 된서리가 내리는 소리인지도 분간할 것 같았고, 눈 오는 소리도 싸락눈 소리인지 함박눈 소리인지 짐작하기도 했으니까.

    11월은 밤이 좋은 계절이다. 낮에는 눈이, 밤에는 귀가 더 민감해진다. 더구나 가을과 겨울에는 밤이 길어지면서 깊고 긴 어둠 속에서 귀가 더 길어진다. 청력은 천상의 소리까지 염탐할 듯하고, 땅속으로 잦아드는 물소리까지 들릴 듯하다. 고막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서 온갖 소리를 상상으로 듣다가 첫새벽에야 파김치가 돼 잠들 수 있었지만, 벌써 밖에서는 웅성거리곤 했다. 이런 잠꾸러기가 어떻게 학교 다니면서 아침 시험을 칠 수 있었는지 가끔은 스스로 대견할 때도 있다.



    잠 없는 밤 날이 샐 무렵이면, 십리 밖 예배당에서 치는 종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또한 먼 산속 절간에서는 쇠북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오곤 했다. 교회나 절은 마찬가지로 십리 밖 멀리 있는데도, 절간의 쇠북소리는 지표면을 타고 산을 기어오르고 더듬어 내려와, 냇물을 건너고 들길을 천천히 걸어서 오는 것 같았다. 특히 에밀레종에 대한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쇠북이 운다는 범종소리가 그냥 그대로 에밀레종소리라고 여겨졌다. 어린 시절 체험으로 모든 절간의 종소리는 에밀레종소리였는데, 마침 한국시인협회에서 국보를 시로 쓰라고 했을 때 선뜻 ‘선덕대왕신종’ 즉 에밀레종을 골라 썼다.

    너무 깊고 너무 아픈 사연들 모아 / 부처님께 빌었어라

    한 번 치면 서라벌이 평안했고 / 두 번 치면 천리까지 평안했고

    세 번 타종하면 삼천리까지라 / 거기까지가 新羅땅 되었어라

    금수강산으로 繡 놓였어라 / 어지신 임금님의 玉音이 되었어라

    만백성들이 어버이로 섬겼어라 / 끝없이 태어날 아기들을 위하여

    끝없이 낳아 키울 어미들을 위하여 / 한 어미가 제 아기를 공양 바쳐 빌었어라

    껴안고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빌었어라



    에밀레~ 에밀레레~ 종소리 울렸어라.

    종소리가 그립다. 특히 가을 밤 비, 겨울 눈바람과 함께 오는, 종소리이건 쇠북소리이건 들리는 순간 경건해지는 그 자체가 다른 무엇으로도 얻어질 수 없는 평안함이 되곤 했다. 종소리를 따라 귀는 길어지고 유순해졌다. 천상의 신비이든 지상의 신비이든 신비체험으로 이어지곤 했는데, 아득한 어디 먼 데서 들릴 듯 말 듯 바람결에 묻어오는 머언 종소리의 위무(慰撫)가 있어주면 얼마나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어둠과 적막을 누릴 권리를 모두 박탈당한 도시, 밤낮으로 시달리는 빛의 횡포와 소음으로 찌들면서 단잠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아잇적부터 교회당 종소리나 절간의 쇠북소리를 먼 귀로 듣고 나서야, 비로소 베개를 안고 뒹굴고 뒤척이다 잠들 수 있었는데. 물론 잠들자마자 엄마의 성화는 시작됐지만, 어른들이 다 일어났는데 딸애가 자고 있다는 그게 바로 엄마 욕 먹이는 거라고. 성화는 자랄수록 심해져서 늘 혼수상태로 일어나게 돼, 식구들조차 내 눈이 본래 뻘겋다고, 눈이 커서 그렇다고도 했었지. 외국에서 공부할 때도 내 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무리 진한 커피로도 깨워지지 않은 가수(假睡) 상태로 강의실에 들어가면, 가뜩이나 안 들리는 영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고, 더구나 사투리 쓰는 교수이면 소음이거나 자장가 곡조였지.

    늙고 있는 지금도 밤마다 잠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가 눈이 아파서 TV를 보고, 그러다가 가까스로 졸린다 싶으면 얼른 들어가 눕지만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잠은 천리만리 달아나버리고-. 배부르면 잠이 온다 해서 밥을 먹거나 군것질도 해보고, 못 마시는 술도 약 먹듯이 마셔보지만 몸만 녹초가 될 뿐 정신은 몽롱해져도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은 종일 비상 먹은 닭처럼 비실거리다가, 밤이 돼야 다시 제정신이 들곤 하는 반복. 이런 때 옆에서 단잠으로 내는 고른 숨소리나, 깊은 잠에 빠져 코까지 고는 소리가 들리면, 정말이지 미워지다 못해 문득 외롭고 슬퍼지기도 한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잠 못 자는 고통. 거리의 노숙자라도 잠을 잘 수 있으면 외로움은 줄어들 것도 같다.

    내게는 잠자는 것이 먹는 것보다 늘 더 중요하다. 건강도 먹는 것보다는 수면으로 더 좌우되는 것 같다. 낮이라도 좀 눈을 붙이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고 정신도 맑아져, 웃고 수다 떨고 싶다. 하지만 낮잠을 못 잔 날은 종일 매사가 귀찮고 짜증나고 몽롱한 상태로 몸살 앓듯이 전신이 쑤신다. 평생 이런 식이니, 잠보다 더 생존과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밖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잠을 잘 못 자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고, 더 외로운 사람은 몇 날 연거푸 내리 잠을 못 자는 사람이라고, 잠으로 외로움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한다.

    외로운 사람에겐 자기 방이 필수적이고, 또 여러 대의 침대도 필수적일 것 같다. 잠들지 못할 때 뭔가를 읽고 끼적거리기에 편한 침대, 엎드려 멍청해질 수 있는 침대, 꿈꾸거나 상상하기에 좋은 침대, 기다릴 수 있는 침대, 만나서 더불어 놀 수 있는 침대, 헤어져 홀가분하고 편안해지는 침대 등등. 외로운 사람에겐 침대가 많아야 할 것 같다.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柳岸津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교육학과·동 대학원 졸업,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박사(교육심리학)

    現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수필가, 소설가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시집 ‘물로 바람으로’ 등


    그러나 더 외로운 사람에겐 침대보다도 베개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엎드려 턱 받칠 수 있는 베개, 베개 밑으로 머리통을 밀어 처박을 수 있는 크고 묵직한 베개, 뒤통수를 편하게 올려놓을 수 있는 베개, 얼굴에 올려놓아 두 눈에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베개, 가슴에 껴안고 뒹굴 수 있는 베개, 돌아누우면 등때기를 받쳐주는 배게, 두 무릎이나 사타구니 사이에 끼울 수 있는 베개, 엉덩이를 받쳐 무지근한 통증을 달래주는 베개, 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베개, 발등이나 발바닥으로 꼼지락거리며 간질거리는 오돌토돌한 촉감의 베개, 그래도 잠이 안 올 때 벌떡 일어나 앉아, 두세 번쯤은 집어던질 수 있는 베개, 더 나아가서는 발길로 몇 번이고 걷어찰 때 화풀이가 될 정도로 무게가 나가는 베개 등등. 밥숟가락보다 훨씬 필수적인 생필품으로서 베개는, 밤이 긴 가을부터 더 외로운 사람에게 특히나 많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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