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숙진 CEO와 존 하워드(오른쪽) 전 호주 총리.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실제로 장학금이 입금되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지금 전세계를 상대로 신청자를 받고 있는데 아주 쟁쟁한 분들이 응모해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현재 시드니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는 한국 교수분은 저한테 ‘놀랍고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e메일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호주에는 인터뷰어(기자)가 인터뷰이에게 차나 식사를 대접하는 관례가 있다. 필자는 인터뷰가 끝난 다음 이 사장과 함께 애버리진의 전설이 깃든 바라문디 생선요리를 먹을 작정이었다. 로즈메리 허브를 곁들인 버섯 소스를 듬뿍 뿌려서. 거기에다 ‘포잇 코너(Poet Corner)’ 적포도주를 곁들이면 왕후장상의 식탁이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장은 술 체질이 아니다. 아쉬운 대로 인도의 향기가 그윽한 ‘딜마 티’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유리창 밖으로 오른쪽 눈썹 모양의 그믐달이 보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약속장소에 도착해보니 이숙진 CEO가 도착해 있었다.
“서부호주 퍼스에 갔다가 공항에서 바로 왔습니다. 시드니와 퍼스 간의 3시간 시차를 이용해서 출장 시간을 최대로 활용했습니다. 퍼스가 시드니보다 3시간 늦으니까 그곳에서 3시간 더 활동하고 밤 11시 비행기를 타는 방식이지요. 뉴질랜드 출장도 같은 방식으로 다녀옵니다. 오늘은 예외가 되고 말았지만….”(웃음)
필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시드니에서 퍼스 출장을 ‘1박 3일’ 일정으로 다녀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택시-비행기-여러 차례의 미팅과 현장방문-비행기-택시로 이어졌을 출장 일정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보통사람 같으면 파김치가 되었을 상황이었지만 이 사장은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고 내 앞에 앉아 있다. 문득 저런 강인함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궁금해졌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그녀의 과거로 돌아가본다.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
32년 전 ‘지구에 남은 마지막 낙원’으로 불리던 호주에 도착한 17세 소녀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이민은 전적으로 아버지가 결정한 것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에서 고교3년을 다니다 호주로 이주한 그녀는 처음엔 뿌리 뽑힌 나무처럼 여러 가지 결핍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숨 가쁜 나날이었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할 틈도 없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늘 발밑에 천길 낭떠러지를 두고 사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단호한 삶의 자세가 절실했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학교에서 직업현장으로 바로 건너뛰었지요. 마치 고대와 중세를 경험하지 못하고 근대와 함께 식민지국가로 출범한 호주처럼.”
그녀는 낮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밤에는 청소일하는 아버지를 도왔다. 그녀는 세인트조지TAFE칼리지(St. George TAFE Collage)에 입학해 비서학과 속기를 공부했는데, 속성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었지만 어휘력이 부족해 많은 고충을 겪었다. 어느 정도 영어가 습득된 후에는 경영학과 회계학을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서 취직시험을 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좋게 해석했다. 그때 자신이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경영자 이숙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당시 열정적으로 했던 공부도 지금 그녀에게 가장 쓸모가 있는 ‘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제마이홀딩스그룹 창업자인 이재경 회장은 경기 동두천시의 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 1976년 호주로 이주했다. 서부 호주 댐피어에서 광산노동자로 2년을 일하며 정착 비용을 마련한 이 회장은 한국에 있던 가족을 불러들였다. 광부 외의 다른 직업을 찾고 있던 그는 한국 이민자로서는 처음으로 상업용 건물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업은 이민자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드문 직종이었다. 직업에 귀천을 따지지 않는 호주에서도 이 직업은 3D(dirty, dangerous, difficult) 업종에 속했지만 이민자가 도전해볼 만한 직종이었다. 이 업종은 호주의 역대 이민자 그룹이 아일랜드계-이탈리아계-동유럽계-터키계-한국계-베트남계-중국계 등으로 승계된 분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