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눈짓 한 번 주먹 한 방으로 영화계를 평정한 사나이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1-03-22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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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70년대는 액션 영화 전성시대였다. 수많은 전쟁과 피가 튀는 격투, 사내들 사이의 배신 복수 의리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박노식의 ‘용팔이 시리즈’는 전국에 전라도 사투리를 유행시켰고, ‘미국에서 날아온 태권스타’ 한용철은 ‘외다리 시리즈’로 동네 꼬마들을 달뜨게 했다. 영화 ‘킬리만자로’로 한국 액션 영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든 오승욱 감독이 이소룡과 할리우드 웨스턴이 우리 스크린을 정복하기 전, 짧지만 뜨거웠던 한국 액션 영화 전성기를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첫 순서는 ‘팔도 사나이’의 김두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분대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1세대 액션 스타 장동휘다. 눈썹을 조금 움직이거나 눈매를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시대와 사회의 어둠을 표현했던 매력적인 악당, ‘절대적 큰형’ 장동휘를 추억한다. <편집자 주>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1978년작 ‘경찰관’에서 자긍심 넘치는 경찰을 연기한 장동휘. 그는 개성 있는 연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액션 스타였다.

    옛날 옛적 종로의 밤거리.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거리 한복판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내가 서 있다. 하얀 목장갑을 낀 사내는 꽁꽁 얼어붙은 종로 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다.

    “나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인디, 서울 종로에서 제일 센 놈이 뉘기여! 얼릉 나와서 나랑 한번 붙어보자고!”

    행인들은 사내의 위세에 눌려 힐끔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도망치고, 술집 창문 사이로 사내를 훔쳐보던 술꾼들은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치자, 얼른 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건방진 사내의 도발에 못마땅해 하던 종로의 깡패 똘마니 두엇이 덤볐다가 쌍코피를 흘리며 도망친 뒤라 나서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불어 사내의 저고리 옷깃이 날리고, 그가 서울 종로 거리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돌아서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난다. 사내는 말없이 검은 가죽장갑 낀 손을 단단히 여미고 주먹을 쥔다.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며 쉴 새 없이 지껄이던 용팔이는 상대가 지금까지 맞붙었던 여느 똘마니와는 격이 다른 무시무시한 기세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문다. 마주 선 두 사내 사이로 바람이 분다. 꼼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내. 고함을 지르며 용팔이가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에게 달려든다.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는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번개같이 주먹을 뻗는가 싶었는데, 큰소리 치던 용팔이는 단 한 방에 종로 거리에 큰 대자로 나뒹군다. 그는 자신이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덤벼들지만 검은 가죽장갑을 낀 사내의 주먹에 또 나가떨어진다. 임자를 만난 것이다. 용팔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검은 장갑의 사내에게 넙죽 큰절을 하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그러자 검은 장갑의 사내는 미소를 짓고, 용팔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다.

    “좋은 동생이 생겼구나.”

    영화 ‘팔도 사나이’(김효천 감독, 1969)의 한 장면.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는 영화 속에서 김두한을 연기한 장동휘이고, 전라도에서 올라왔다는 용팔이란 사내가 박노식이다.



    한국 영화 최고의 주먹

    어린 시절,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동네 극장 드나든 경력을 과시하면서 하는 말이 액션 영화 최고의 주먹이 누구냐는 것이었는데, 이때 항상 1, 2위를 다투는 인물이 장동휘와 박노식이었다. 물론 이대엽을 이야기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바로 무시당하곤 했다. 누가 더 센지를 놓고 다투다가 ‘팔도 사나이’에서 장동휘, 박노식의 종로 거리 대결 장면을 기억해낸 아이들은 장동휘의 주먹이 더 센 것으로 합의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박노식을 더 좋아했고, 박노식이 한국 영화 최고의 주먹이라는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았으며, 장동휘는 너무 폼만 잡아서 별로라 생각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나는 어린 시절 장동휘와 영화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 초반,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의 사무실에서 한국 액션 영화에 대한 잡담을 나누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한국 액션 영화배우 중 가장 매력적인 남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기자들은 본 영화가 없으니 입을 다물었고, 어려서부터 한국 영화를 무지막지하게 섭렵한 40대 여자 편집장과 내가, 영화광들이 서로의 혈액형을 탐색하는 그들만의 놀이를 시작했다.

    소설 ‘살인자들의 섬’으로 유명한 데니스 루헤인의 범죄 소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중 한 편에는 이런 상황이 나온다. 탐정인 켄지가 사건의 핵심을 알고 있는 자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반신불수에 투박한 심성을 지닌 정보 제보자는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정보 제보자가 말끝마다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다가, 켄지에게 남자 배우 중 최고는 누구냐고 묻는다. 켄지가 대답을 않자, 정보 제보자는 “랭커스터. 절대적으로”라고 한다. 켄지 역시 “절대적으로 미첨”이라 답한다. ‘절대적으로’라는 말은 오직 그 하나만을 최고로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 이외에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결국 두 사내는 상대방의 배우 취향에 경의를 표하고 서로 친해진다.

    나는 ‘절대적으로’ 두말할 나위 없이 박노식이었는데, 여자 편집장은 ‘절대적으로’ 장동휘라는 것이다. 의외였다. 최무룡을 지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폼만 잡는 배우 장동휘에게 여자가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여자 편집장은 그를 좋아하는 이유로 “다른 남자 배우들과 달리 그의 연기에서는 허무주의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는 점을 들었다. 장동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다니, 여자라서 남자들이 못 보는 면을 보는 건가 싶었고, 그 후 영상자료원에서 장동휘 주연의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나와 장동휘 영화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눈으로 연기하는 배우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임권택 감독, 1971)를 보자. 장동휘가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박노식과 문희, 그녀의 아버지가 일어나 인사를 한다. 결혼 전 양가의 상견례 자리다. 아름다운 여인 문희와 그녀를 사랑하는 청년 박노식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신사 장동휘. 그 옛날, 전쟁통에 고아가 된 박노식이 깡통 하나 달랑 들고 명동 거리를 배회하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를 거둬주고 친자식처럼 아끼고 돌봐준 이가 바로 장동휘다. 그는 박노식에게 친아버지 이상의 존재다. 그런 박노식이 아름다운 문희를 아내로 맞이하는 자리에서 장동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다. 사랑하는 딸 최지희가 박노식을 짝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날, 최지희는 꿈에 부풀어 박노식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고, 장동휘는 자기 딸과 믿음직한 박노식이 가정을 꾸미기를 바랐다. 그런데 박노식에게 최지희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었고, 그에게는 문희가 있었다. 실연한 딸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박노식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문희를 바라보는 아비 장동휘. 그가 감정에 휩싸여 있을 새도 없이 위기가 닥친다. 장동휘와 박노식은 암흑가의 깡패들이다. 양가 상견례 자리는 공교롭게도 라이벌 조직의 구역이다. 라이벌 조직은 장동휘와 박노식이 자신들의 구역에 온 것을 도발이라 보고 그들을 치려고 한다. 이때 장동휘가 나서서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눈감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승냥이 같은 라이벌 조직의 깡패들은 대가를 요구하며, 장동휘의 배에 칼날을 깊이 박아 넣는다. 칼에 찔린 몸으로 문희와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둘의 사랑을 축복하는 장동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는 1970년대 초 수없이 만들어진 깡패 영화들 중 주인공들의 증오와 사랑의 감정이 가장 첨예하게 스파크를 일으켰던 흔치 않은 영화였고, 장동휘는 양아들 박노식과 김희라, 그리고 딸 최지희가 사랑과 증오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아버지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배우 장동휘가 매우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표정을 과장되게 만들거나,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배우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고, 그의 감정 표현은 눈썹이 조금 움직이거나 눈매가 비틀어지는 것 정도다. 그래서 당시 평론가들은 그에게 ‘눈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찬사를 바쳤다.

    매력적인 니힐리스트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한국 액션 영화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후 장동휘는 ‘만무방’(사진, 1994) 등 멜로 영화에서 노년 연기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

    장동휘가 연기를 극도로 자제해 더욱 매력이 드러나는 괴작으로는 ‘암살자’(이만희 감독, 1969)가 있다. 테이블 위에 사진이 한 장 놓여 있고, 야비한 미소를 시종일관 입가에 달고 있는 남궁원과 사나운 매의 눈을 가진 신경질적인 사내 오지명이 그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유명한 킬러 장동휘. 남궁원과 오지명은 장동휘에게 암살을 의뢰하러 가는 조직의 똘마니들이다. 장면이 바뀌면, 커다란 창문이 있는 어두운 방 안. 창밖에는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친다. 그리고 그 화면 위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른다. 침입자가 인기척을 내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칼이 날아간다. 방안에 불이 켜지고 침입자의 코앞에 칼이 꽂혀 있다. 칼을 던진 이는 바로 킬러, 장동휘다. 죽음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표적의 마지막 얼굴을 보고 싶어 킬러 일을 한다는 장동휘는 옛날에 자신이 죽인 자의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 정말로 괴상망측한 자다. 시종일관 관념적인 대사를 읊조리며 자신이 죽여야 할 자를 찾아가는 장동휘는 라스트 신에서 남궁원에게 배신을 당해 쓰러지면서 자신도 죽음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이만희 감독이 장 피에를 멜빌의 ‘사무라이’(1967)를 보고 그것에 필적하는 킬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만들었음이 분명한 이 영화에서 장동휘는 알랭 들롱의 고독한 킬러와 대비되는 니힐리스트 킬러 역을 해낸다.

    편의상 장동휘의 영화를 네 시기로 구분해보면, 데뷔작부터 이만희 감독과 만나기 전, 즉 1957년부터 1962년까지가 첫 번째 시기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하며 악역 조연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시기가 두 번째 시기. 그리고 그의 연기가 무르익고,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 제작을 하는 말 그대로 전성기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를 세 번째 시기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액션 영화가 시대의 조류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후, 멜로 영화에서 노년 연기를 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시기를 네 번째로 보자. 그러면 ‘암살자’와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는 그의 연기가 무르익었던 세 번째 시기에 속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한국 누아르 전성시대

    장동휘가 데뷔한 때는 6·25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 한국 영화가 ‘춘향전’(1955) ‘자유부인’(1956)의 흥행 성공으로 점차 활기를 찾던 시기였다. 인천에서 태어난 장동휘는 중국에서 연극 단원 생활을 하다 광복 후 귀국, 전쟁을 겪고, 악극단과 연극단 생활을 하다 김소동 감독의 권유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그의 데뷔작은 1957년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 나운규의 ‘아리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 영화 첫 출연작임에도 장동휘는 나운규가 연기했던 영진 역을 맡는다. 오랜 악극단과 연극단 경험으로 그의 연기는 데뷔 당시에 이미 인정을 받았다. 미남형이 아닌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우리는 그를 성격파 배우라고 한다. 장동휘는 데뷔와 동시에 성격파 배우로 이름을 알리며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50년대 말, 6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액션 영화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의 무용담을 그린 전쟁 영화와 범죄 스릴러다. 특히 ‘한국 누아르의 시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여러 편의 범죄 영화가 만들어진다. 미국과 프랑스의 누아르 영화에 영향을 받은 범죄 영화들이 스릴러라는 상업적 꼬리표를 달고 수십 편 만들어진 것. 음울한 청춘 범죄 영화의 걸작 ‘지옥화’(신상옥 감독, 1959)를 시작으로 한국 누아르 영화의 걸작이라 부를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0)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다.

    당시 누아르 영화의 제작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그로테스크한 취향으로 성(性)과 권력의 관계를 파헤치는 걸 즐기던 김기영 감독까지 장동휘가 자신을 형무소로 보낸 형사 김진규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몸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하고 김진규의 집으로 돌진하는 ‘아스팔트’(1964)를 만들고, 평론가들이 “쏟아져 나오는 범죄 영화들이 스릴러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아쉽다”며 “왜 이렇게 범죄 스릴러가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을 정도였다. 성격파 배우 장동휘는 이 시기에 주로 악역 조연으로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해 한국 액션 영화의 악역 3인방 중 한 자리에 오른다.

    한국 액션 영화의 악역 삼인방은 장동휘 허장강 황해, 이 세 사람을 말한다. 허장강이 유들유들한 사기꾼 기질의 사악한 악당이라면, 황해는 제임스 케그니를 연상케 하는 정신분열적인 악당 역을 주로 했다. 그에 비해 장동휘는 하드 보일드. 이 한마디로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투박하고 선이 굵은 악당 역을 전담했고 ‘파멸’(1961) ‘지상의 비극’(1960)에서 지긋지긋한 악종을 연기해 상찬을 받았다.

    품격 있는 맏형

    모든 배우가 그렇듯 배우는 감독과의 만남에서 그의 행로가 결정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셀지오 레오네, 존 웨인과 존 포드, 알랭 들롱과 장 피에르 멜빌이 그렇다. 좋은 감독을 만나지 못한 배우는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장동휘는 운명적으로 한국 최고의 감독 이만희를 만나 자신의 캐릭터를 확립하는 두 번째 시기를 연다. 장동휘와 이만희의 첫 만남은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였다. 문정숙을 괴롭히는 잔혹한 전 남편으로 출연해 첫 호흡을 맞춘 장동휘는 이듬해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한다. 수륙양용정 안에 한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에는 검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적의 폭탄이 바다에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륙양용정을 뒤흔든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치르게 될 전투에 대한 불안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자신의 분대원들을 바라본다. 그는 말이 없다. 다만 자신의 분대원들을 바라볼 뿐이다. 인천 해안에 수륙양용정이 다다르면 적의 총알과 폭격으로 수륙양용정 안의 분대원들은 반 이상 죽을 것이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의 공포를 이해해주고 그들을 격려한다. 과묵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분대장. 그가 바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장동휘다. 장동휘는 단호하지만 너그럽고, 사병들의 애환과 고통을 잘 알지만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전쟁광이라는 오해를 받고 부하들 사이에 증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사실 그는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프로페셔널이며, 그의 가슴속에는 부하들의 죽음과 고통을 괴로워하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장동휘는 최고의 스타가 되고, 미남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 조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갖게 된다. 가진 것 없는 비천한 출생이지만, 덕이 있고 품격이 있는, 그래서 수하 누구나 그에게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는 맏형이라는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안성기가 ‘무사’(김성수 감독, 2000)에서 고향을 떠나 수년간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포졸 고참 역을 인상 깊게 해낼 때까지 장동휘만이 유일하게 관객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캐릭터였다.

    고뇌하는 악당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영화 속에서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품격 있는 맏형’이었던 배우 장동휘.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듬해 장동휘는 지금까지 그가 해냈던 악역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영화에 출연한다. 바로 ‘검은 머리’(이만희 감독, 1964)다. 악당 두목 장동휘는 자신의 패거리들에게 엄혹한 규율을 세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부하 장혁의 얼굴에 길게 새겨진 상처 자국이 바로 그 증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장동휘의 엄혹한 규율을 그의 아내 문정숙이 어긴 것이다. 과거에 죗값을 치른 장혁이 나서서 규율대로 처단해야 한다고 한다. 장동휘는 자신이 만든 덫에 빠졌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 문정숙은 부하 장혁의 칼에 의해 얼굴에 흉측한 칼자국을 새기고 쫓겨나게 된다. 문정숙은 마약 중독자 정부(情夫)의 협박에 의해 길거리의 창녀로 전락한다. 자신이 세운 규율에 의해 자신이 몰락하는 악당 장동휘는 아내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규율을 스스로 어기고 부하들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된다. 이 영화에서 장동휘는 한국 액션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 악당을 탄생시킨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스카페이스’(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1984)의 알 파치노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오해는 마시라. 영화광들의 과장벽은 세상의 그 어떤 특효약으로도 고칠 수 없으니. 이 영화를 찾아보고 나에게 돌을 던지지는 마시라는 말이다. 어쨌든 단세포의 재미없는 악당들만 날뛰던 한국 액션 영화에 장동휘와 이만희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오셀로 같은 고민하는 악당,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비극적인 악당을 탄생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광 편집장이 매력을 느낀 니힐리스트 장동휘가 바로 이 시대의 장동휘인 것이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과 새로운 유형의 인간상을 창조해내던 한국의 범죄 영화들은 아쉽게도 걸작을 만들어내기 전 군사정권의 영화 탄압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다. 1965년 장동휘가 출연한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 필름이 압수되고, 이만희 감독이 북괴찬양·반공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교도소에서 실형을 산 때부터 한국의 범죄 영화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인기 절정의 장동휘는 그 시기 수많은 영화에서 비슷비슷한 분대장 역이나 악랄한 인민군 간부 역, 미치광이 같은 일본군 장교 또는 헌병대장 역을 연기한다. 장동휘가 한국 액션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면서 시작된 그의 두 번째 시기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시대의 종말

    장동휘가 그와 자웅을 겨루던 악역 삼총사 허장강, 황해와 의기투합해 ‘동인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만들고, 1966년 ‘영화인 고액 납세자 리스트’ 10위 안에 이름을 올린 때부터 그의 최고 전성기인 세 번째 시기가 시작된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액션 영화, 그것이 바로 ‘팔도 사나이’다. 김두한이라는 살아 있는 전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두한 역으로 출연한 장동휘는 맏형이 돼 조선 팔도의 난다 긴다 하는 주먹들을 규합해 일본 야쿠자들과 종로 바닥을 놓고 겨룬다. 이것은 총과 말이 없을 뿐 할리우드 웨스턴의 신화와 같은 세계였다. 장동휘는 훗날 이대근에게 김두한 역을 물려주기 전까지 오랫동안 1대 김두한으로 이름을 날린다. 사실 김두한 역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깡패 영화 ‘팔도 사나이’는 흥행에 성공해 속편에 속편을 거듭 만들었으며, 그 여파로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우락부락 사내들이 판치는 깡패 영화가 수십 편 만들어졌다. 그 영화들에 장동휘는 꼭 감초처럼 출연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비슷비슷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이거다’ 싶은 걸작은 앞서 말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게 된 이상한 시기였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홍콩의 무협 영화와 할리우드 액션 영화와 비교할 때 한국 액션 영화의 만듦새는 형편없는데 관객의 눈이 높아진 것이다. 이소룡 영화와 홍콩 쿵푸영화. 007 시리즈, 아메리칸 뉴시네마 등 홍수처럼 몰려들었다. 수준 높은 이들 외국 영화 앞에서 저예산으로 졸속 제작된 한국 액션 영화는 맥을 못 췄다. ‘절대적 큰형’ 장동휘의 이름도 서서히 잊혔다.

    1978년 ‘경찰관’(이두용 감독) 이후 장동휘를 영화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그 나이에 걸맞은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 주기에 한국 영화계는 각박했다. 결국 1990년대 ‘만무방’(엄종선 감독, 1994) ‘말미잘’(유현목 감독, 1998) 등을 끝으로 그의 파란만장하던 영화인생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아쉬운 것은 장동휘가 한창 일을 해야 할 50대 무렵, 개성적인 캐릭터를 살릴 수 있는 영화를 만나지 못한 점이다. 1960년대에 그와 함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던 이만희 감독은 권력에 의해 사사건건 자신의 영화가 만신창이가 되는 것에 울화병이 도져 세상을 뜨고 말았고, 1970년대에는 위장 한국·홍콩 합작 영화와 호스티스 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쓰느라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악역으로 출발한 어니스트 보그나인이나 리반 클립이 50대와 60대 때에 젊은 시절과는 다른 멋진 캐릭터로 왕성하게 활동한 것과 비교하면 그는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다.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오승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조소학 학사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 및 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


    장동휘는 영화 안에서 큰형이었지만 현실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1960년대 초. 김지미와의 스캔들로 간통죄를 선고 받고 교도소에 들어갔던 최무룡이 출감하자마자 괴롭고 피곤한 몸을 의지한 곳이 어디였는가? 바로 장동휘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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