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앞세운 新한류…중년에서 젊은층으로 확대
- 일본 언론도 ‘한국 따라잡기’ 열풍
- 경제규모 13위, 교역규모 7위 한국, 일본과 경제협력 나서야
- ‘박태준式 경제협력’ 모델이 시행착오 줄인다
- 원칙 고수, 신뢰 구축, 헌신이 포스코 성공비결
- 公私 구분, 청탁 거절로 유명…“고향에 국회의원 나오면 떨어졌을 것”
(작은사진) 간부사원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1977)
또한 지난해는 한국의 준비된 ‘걸그룹’들이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며 신한류의 붐을 일으킨 해이기도 하다. 기존 한류의 대상이 일본의 중년 남녀였다면 신한류는 일본의 젊은이로 그 범위를 넓혔다. 한국의 걸그룹은 일본 젊은이들의 아이돌(idol·본래 우상(偶像)을 뜻하지만 근래 들어 인기가 높은 연예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의미가 확장됐다)이며 닮고 싶어하는 표상이 됐다.
일본 가치관의 중심은 경제다. 2009년 12월 한국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를 놓고 일본과 경합을 벌이다 결국 수주에 성공했다. 이 사건은 일본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가전이나 자동차, IT, 조선 분야 등에서 한국의 약진과는 달리 기술 집약산업으로 일본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원전 분야에서조차 한국에 밀린 것을 보며 일본인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일본인이 한국의 실력을 피부로 느끼면서 이제 한국을 대등한 눈높이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전이나 조선 자동차 분야에서 여러 차례 ‘잽’을 허용한 일본에 한국의 원전 수주는 그들의 얼굴에 정면으로 날아든 강력한 스트레이트 펀치였다.
“한국을 배우자” 일본에 부는 신한류
두번째 싱글 ‘지(Gee)’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른 소녀시대.
일본 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일본인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경기침체가 가속화하고 있다. 백화점이 문을 닫고 있고, 금융위기에서도 호황을 보인 한국의 신기한(?) 백화점 경영방식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려던 때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갑자기 몰아닥친 엔고 바람은 지금까지 일본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 1990년대 버블이 붕괴되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경제가 언제 회복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불안정한 리더십과 고령화에 있다. 일본은 65세 이상 인구가 25%나 되는 노인대국이자 초고령사회다. 사회의 활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다.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총리가 5년여 집권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년 총리가 바뀐다.
최근 국제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일본의 신용등급을 1단계 하향조정했다.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조치를 현재의 일본 정치권에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이 하향평가의 배경이다. 일본은 오늘날 세입예산의 절반을 국채 발행으로 메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언론은 2010년 들어 한국을 배워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일본 경제산업성에서는 한국을 연구하는 ‘한국실’을 따로 만들었다. 공영방송인 NHK를 비롯한 언론들이 앞 다투어 한국특집을 제작하며 한국 배우기 열풍이 몰아쳤다. 지금 일본 언론의 논조는 ‘모든 면에서 한국을 배우자’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니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다. 한국을 비아냥거리거나 비난하는 보도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 설날을 앞두고는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직설적으로 한국과의 협력을 희망하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감정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직접적인 표현을 좀처럼 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자국민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한국을 실제보다 과장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사히신문의 사설에서는 일본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韓日 FTA 진지하게 검토할 때
흔들리고는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다. 일본의 제조업 특히 부품산업 경쟁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우리는 일본과 자본재 부품 분야를 중심으로 매년 300억달러 규모의 무역적자를 내고 있지만 양국이 협력하면 윈윈(win-win)할 수 있는 분야는 여전히 많다. 함께 고민하며 해결해나가야 할 공통과제도 많다. 한국과 일본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화하면서 새로운 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1965년 한일 양국이 우여곡절 끝에 국교를 정상화한 이후 본격 추진된 한일경제협력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현재와는 정반대다. 말이 협력이지 우리는 그들의 선의에 의존해온 일방적인 협력이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듯이 기술과 자본 그리고 산업화 경험을 제공했다.
일본은 자국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해 조금씩 ‘협력’했고, 대부분 자국의 환경에 맞지 않는 이른바 사양산업을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했다.
1965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산업시설이라고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남긴 것이 전부로, 그것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돼 산업 불모지에 가까웠다. 휴전 후 미국은 한국의 공산권 편입을 막기 위해 많은 경제지원을 했지만 원조물자의 80%가 민생안정을 위한 생필품이나 소비재였다. 미국은 한국의 산업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과의 경제협력과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바탕에는 식민지시대의 산업구조라는 물리적 유산뿐 아니라 지식, 경험, 제도 등 규범적인 유산이 있었다. 여기에 지리적인 이점과 언어·문화적인 유사성,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한 국민적인 열망 등도 일본과의 협력에 유리한 바탕이 됐다. 그러고 보니 이런 바탕이 한국의 산업화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는 경제규모 세계 13위에 교역규모 7위의 경제대국이자 강소국이다. 2010년 11월에는 G20 서울정상회의 의장국으로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새해 국정연설에서 다섯 차례나 언급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됐다.
늘 돈을 꾸러 오고 물건을 빌리러 오는 귀찮은 이웃나라 한국의 국력과 위상이 크게 향상되자 그동안 위에서 내려다보던 일본이 어느새 협력하자고 손을 내미는 상황이다.
이제 그동안 중단된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의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잠재력이 큰 동아시아의 경제공동체를 만든다는 비전을 가지고 일본과의 협상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한일 FTA가 체결되면 일본은 우리에게서 에너지와 활력을 얻고 그들의 침체되고 폐색감이 감도는 시장에도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리로서는 앞서 선진화에 성공하고 실패와 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을 교훈 삼으면 시행착오를 줄여나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세계시장이 좁다 하고 뛰어다니는 개척정신과 아프리카 오지에도 과감하게 뛰어드는 용기와 도전정신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젊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헝그리 정신’이 있다. 잘살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다. 반면에 일본에는 ‘이 정도면 됐다’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조립산업 분야의 경쟁력과 상대적인 정치안정은 우리의 강점이다.
일본과의 FTA 체결로 신뢰관계를 구축-지금 일본과의 사이에 가장 부족하고 또 시급한 것이 신뢰관계 구축이다-하고, 이어서 중국을 포함한 한중일 FTA 구축은 3국 간의 역내 안보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한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는 북한의 개방과 산업화, 생산력의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일본의 경제협력으로 북한에 산업화가 추진될 때 일본과 협력한 경험이 풍부한 우리의 노하우와 우수한 노동력을 제공한다면 북한의 산업화는 한층 빨라질 것이다.
한일경제협력의 심벌, 포항제철과 박태준
필자는 일본 경제가 절정을 구가하던 1982년 12월 와세다대에서 1년간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모 일간지 칼럼을 통해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현 포스코 명예회장)을 처음 만났다. 제철보국에 대한 그의 신념과 애국심, 그리고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는 그의 청렴한 기업경영방식에 감명 받고 그가 회장을 맡고 있던 (사)한일경제협회에 입사했다.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일경제협력의 현장을 뛰어다니며 청춘을 보냈다. 헤아려보니 일본 출장 횟수만 200회가 넘는다.
나는 한일 경제협력 현장의 소중한 경험을 정리해 이를 후배들에게 전하고자하는 마음으로 2009년 여름 공직에서 물러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일본학 박사과정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일본을 다시 공부하며 오랜만에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있다. 주 두세 차례 학교에 가 주경주독하고 있다. 한일 신협력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협력 경험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한일 경제협력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중심에 포항제철(2002년 포스코로 사명 변경)을 만든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한민국 산업화와 공업화의 시동을 건 기업이 포항제철이며, 포항제철은 일본과의 경제협력 성공 모델이기도 하다. 한일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뢰관계 구축이 우선되어야 하며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경 그리고 도움에 대한 감사를 느끼며 이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실감한다.
박태준이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1960년대 산업 황무지 한국 땅에서 일관종합제철소인 포항제철을 세운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이것은 대통령 박정희의 비전과 결단, 박태준의 신념 그리고 일본의 전폭적인 협력이라는 삼위일체가 조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다.
포항제철의 탄생과 발전에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격려가 있었지만, 박태준은 일본의 주자학 양명학의 대가인 야스오카 세이도쿠(安岡正篤)와 신일본제철의 회장과 ‘경단련’ 회장을 지낸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1987년 작고)의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최근 인터뷰에서 술회했다.
야스오카는 박태준이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존경하던 학자로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도 일본의 재계와 정계에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공교롭게도 박태준의 포항제철 탄생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1950년대 자유당 정부 시절부터 다섯 차례나 시도됐지만 번번이 무산되었고, 국내외 전문가와 언론들도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가 중 박태준이 가장 존경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도 한국에서 제철소는 안 된다고 했다. 제철소를 짓기에는 한국의 경제기반이 취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67년 장기영(한국일보 사주·1977년 작고)이 부총리로 있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로 포항제철 건설사(史)가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미국 코퍼스(Koppers)사를 간사로 한 대한국제차관단(KISA)이 구성되기는 했으나 자본과 기술 공여 문제에 진척이 없었다.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이 자금 확보가 어렵다고 결론 내리는 바람에 박태준은 결국 KISA의 멤버가 아닌 일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69년 세계은행(IBRD)이 내놓은 보고서의 결론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인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17년 후 박태준이 런던 출장길에 당시 IBRD 보고서를 쓴 J. 지퍼 박사를 찾아가 만났다. “그 보고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박태준의 질문에 그는 “지금 보고서를 쓰더라도 결론은 같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박태준이라는 변수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태준이 마음을 훔쳤던 철강 기업 CEO들
“일본과 손잡으면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박태준의 건의를 박정희가 전폭 지지하자, 박태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사장(훗날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역임),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赤坂武) 사장 등 일본철강연맹 주력사 사장들을 두루 방문해 교섭을 벌였다. 이때 야스오카는 일본 재계의 실력자들에게 박태준을 도와줄 것을 권유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동원해 관계(官界) 대신들을 만날 수 있게 일정을 잡아주었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해 박태준은 일본철강연맹으로부터 한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으며 자본과 기술지원을 하겠다는 약정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약정서가 1969년 8월27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경제각료회담에 제출돼 양국 정부 차원에서도 한국이 제철소를 짓는 데 일본이 지원한다는 원칙에 합의를 보게 된다.
당시 김학열 부총리는 이 약정서에 쓰여 있는 ‘일응 타당성을 인정한다’는 조항에서 ‘일응’을 삭제하라고 하는 바람에 박태준은 각료회담을 불과 10여 일 앞두고 휴가 중이던 이나야마 사장 등에게 전화로 연락해 승낙을 얻어냈다. 이때에도 야스오카가 측면지원했음은 물론이다.
박태준은 “물건을 훔치면 도둑이고 나쁘지만, 마음을 훔치면 좋은 것이고 전략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마음을 얻어야 원하는 것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한다.
100만t급 용광로를 완공하고 나서 도쿄에 있는 이나야마 회장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박태준은 당시 유행하는 일본 엔카를 많이 외우고 있었다. 지금도 박태준은 엔카를 좋아하며 곧잘 부른다. 이나야마가 자기 차에 박태준을 동승시키고는 유행가를 불러보라고 하자 박태준이 당시 최신 유행가를 불렀더니 “잘했다”면서 노트에 가사를 옮겨 적었다. 그만큼 둘 사이의 유대는 끈끈했다. 아버지뻘 되는 이나야마와 박태준은 국적과 세대를 뛰어넘는 깊은 유대를 맺은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훔쳐야 기술이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져올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다.
포항제철은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졌다. 제철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규정집, 도면설계, 기계의 성격 등 일본의 거의 모든 것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 과정은 머리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나야마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당시 제철소 현장소장은 어떻게든 적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위에서 시켜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 최고인 자기 기술을 왜 남한테 주느냐는 것이다.
박태준은 꾀를 내 공장 안을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 포항제철의 엔지니어들이 ‘어미 닭 뒤를 병아리 떼가 쫓아가듯’ 박태준의 뒤를 따라가며 머릿속에 사진 찍듯 공장 내부를 다 외워버렸다. 과거 필자가 현역시절 일본의 공장을 견학했던 때가 생각난다. 같이 간 기술자들에게 메모를 하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기록하는 사람이 없어 불만스러웠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둘러보며 머릿속에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이렇게 하자 결국에는 현장소장도 웃으면서 항복했다고 한다.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단기간에 완공하자 일본 철강업계에서는 “한국에 너무 많은 기술을 넘겨준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이에 이나야마는 “많이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경단련 회장도 맡고 있었던 이나야마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천왕(天王) 못지않은 위세를 떨쳤다.
1978년 여름 중국의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을 찾아왔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덩샤오핑은 “중국에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신일본제철에 요청했지만 이나야마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中 덩샤오핑, “박태준을 수입해야겠군요”
“제철소는 사람이 짓습니다.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포항제철은 기적입니다.”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긴 덩샤오핑은 “그렇다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응수했다 한다. 1987년 작고한 이나야마는 생전에 박태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중국이 당신을 납치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박태준은 이나야마를 부모 대하듯 했다. 1985년 경주에서 제15회 한일경제인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의 일이다. 일본 고베에서 개최된 유니버시아드대회의 대회장을 맡고 있던 이나야마는 박태준이 주최하는 회의 개회식을 빛내주기 위해 대회 개막 하루 전날임에도 한국으로 날아왔다. 박태준은 대한항공에 간곡히 부탁해 이나야마를 위해 소형 제트기를 마련해 개막식 참석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했다.
이때 이 회의에 참석한 양측 대표단 200명을 위해 박태준은 포항제철 영빈관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이날은 마침 비가 내렸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영빈관의 현관까지 포항제철 직원들이 우산을 들고 긴 터널을 만들어 양측 대표단이 비에 젖지 않고 입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것을 박태준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고 전해 들은 대표단은 그의 세심함에 감탄했다.
박태준은 포항제철의 성공비결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제철소 건설 당시 건설 공기 단축, 건설단가 최소화, 그리고 부실공사 불허라는 3가지 원칙을 세웠으며 이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포스코(POS CO)가 있었다.
둘째, 신뢰를 얻으면 모두를 얻는다. 포스코를 짓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하기 위해 그는 일본인들의 영혼과 신뢰를 얻었다고 했다.
셋째, 사심 없이 헌신한다. 박태준은 포항제철의 성공에 목숨을 걸었다.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포항제철의 건설자금은 지금도 치욕이라고 말하는 대일청구권 자금에서 출자된 것이다. 말없이 전쟁에 끌려갔던 조상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조상들이 흘린 눈물과 억울함을 무마해주는 대가로 받은 푼돈 같은 위로금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포스코를 국민기업이라고 말한다. 그 치열했던 창업정신이 현재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포스코가 그와 같은 고난을 딛고 현재와 맞닿아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주목한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말해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장은 전쟁터, 전쟁터 소대장에게 인격은 없다”
“현장에 나오면 나는 사장이 아니라 전쟁터의 소대장이다. 전쟁터의 소대장에게는 인격이 없다.”
박태준 회장이 전투화로 직원들의 ‘조인트를 깠다’는 소문이 도는 데 근거가 된 말이다. 그 시절은 사회에 비리가 만연했기에 당찬 기준 없이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제철소를 지을 수 없었다. 작가 조정래 선생이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을 편집하며 생존한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박태준을 선정한 것도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한국은 국내 저축 부족으로 산업화를 전적으로 외자(外資)에 의존했다. 외자를 눈먼 돈이라 여기며 달려드는 파리떼로 정경유착이 극심했다. 통계수치를 보니 1969년에 외자기업 85개 중 45%가 부실판정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업의 타인자본 의존율은 무려 95%에 달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차관기업의 85%가 파산해 큰 사회문제가 됐다.
포항제철 건설책임을 맡은 초대 사장 박태준은 청탁을 받지 않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정치인은 물론이거니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통령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이 친필로 보내오는 청탁 편지도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어린 시절부터 와세다대 2학년까지 일본에서 교육받은 그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올해 1월1일 청계산 해돋이를 보고 내려오다가 박태준과 동향(부산 기장군)인 친구와 우연히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박태준이었지만 기장군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면 떨어진다고 고향사람들이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고향 출신이라고 해서 특별히 박태준 덕을 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부실덩어리 외자기업이 허다한 가운데 포항제철은 별종이었다.
포항제철 성공에 자신을 얻은 박정희는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고, 이것이 오늘날 선진 대한민국의 기반이 됐다. 포항제철을 비롯한 중화학공업 추진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왔다. 우리가 포항제철과 제2제철인 광양제철을 합쳐 통산 2000만 t의 세계적인 철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상의 오너와 같은 주인의식으로 포항제철을 이끌어왔던 박태준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박태준은 1968년부터 1992년까지 24년간 포항제철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는데 이는 공기업 CEO중 최장수 기록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화 속에는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희생을 넘어서는 불굴의 신념과 원칙이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을 군사독재의 잔재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민주적 절차에 의해 ‘포스코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면 아마 현재의 포스코 그룹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결과를 가지고 가정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가정을 가지고 결과를 추론하는 것도 때론 위험한 발상이 된다.
경제4단체 한일 FTA 대토론회
양국 국민과 언론의 시각차
박태준에 대한 자료를 공부하며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포스코와 광양제철의 기공식, 준공식 같은 각종 기념식이 수차 있었지만 일본 관계자나 기술자를 적극 초청한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행사를 보도하는 국내 언론에서도 일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일본의 수많은 기술자가 현장인력으로, 그리고 기술고문의 형태로 참가했으며 박태준의 열정에 감복해 한국 기술자들과 혼연일체가 돼 포스코를 건설하는데 피땀을 흘렸다. 포스코 건설에 참여했던 일본인 기술자들은 보람과 감동에 가득 찬 경험담을 엮어 1999년 ‘포항제철의 건설회고록’이라는 책자로 발간했다.
국내 언론은 포스코 건설과정에서 일본의 협력에 대한 보도에 인색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의 한일 협력에 관한 보도에도 드러난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은 포스코가 박정희와 박태준 그리고 우리의 기술과 힘으로 건설한 자랑스러운 국민기업으로 생각한다. 이런 일들이 한일 간의 신뢰나 협력을 저해하는 불신의 요소로 쌓여왔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언론은 일본의 협력은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이것이 국민의 대일감정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본이 원죄가 있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하등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국 언론의 보도를 보자.
“한국 독자 기술로 건설한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의 고로에서 용선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 4월의 착공 이래 3년3개월이라는 세월에 걸쳐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성을 올렸다. 황무지에서 공사를 시작한 지 5년, 박 대통령이 1966년 방미에서 미국의 제철공장을 시찰하고 나서 7년 뒤의 일이었다. 공사비만 1215억원,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비용의 3배나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단일사업으로는 사상최대 규모였다.”(조선일보 2003년 7월2일자 보도)
하지만 일본 언론의 보도와 위키피디아 ‘포스코’ 검색 결과는 다음과 같다.
“포항제철소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축하금으로 1970년대 전반에 완공된 것이다. 포항제철소도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원조와 기술협조가 있어서 완성됐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는 탈황설비(이온을 제거하는 설비), 80년대에는 용액처리장치(녹아 있는 철을 취급하는 설비)라든지 분쇄탄 투입설비가, 그리고 90년대에는 주조기와 전기아연도금설비가 일본으로부터 도입됐다.”
이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의 시각차는 크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은 도와주어도 고마운 것을 모르는 예의 없는 사람이고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다수 일본인의 한국민에 대한 인식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신뢰 부족 속에서 박태준이 일본의 전폭적인 협력을 끌어내며 포항제철을 세계적인 제철소로 만들어낸 것을 필자는 인간승리이자 대한민국의 복(福)이라고 생각한다.
박태준의 남은 꿈
2004년 출간된 박태준 평전 ‘세계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북한의 원산에 포스코 제3 제철소를 짓고 싶습니다. 돈은 포스코의 국제신인도로 마련하고 북한군인 100명쯤 뽑아 포항과 광양에서 훈련을 시키면 됩니다. 포스코에는 역전의 노병들이 많아요. 한 가지 더, 북한도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돈으로는 안 주고 물자를 보낼 것이에요. 이 물자를 북한은 도로, 발전소, 항만, 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투자해야 합니다. 이게 현실이 되면 내가 일본에 가서 적극적인 역할도 하고, 평양에 가서 코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젊은이들의 취업난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을 하고 싶다는 청년실업자가 넘치고 있다고 하는데 참 딱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세상을 너무 쉽게 살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이런 젊은이들에게 경제성장, 민주화의 혜택을 그런 식으로 즐기려는 건 자기 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발밑만 내려다보지 말고 10년 뒤 자기 모습을 그려보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10년 후의 자기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이나 수치심은 사라지고 용기와 자부심이 샘솟을 것입니다.”
2011년 간 나오토(管直人) 일본 총리는 새해 국정연설에서 ‘올해는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태준의 꿈이 현실이 되는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