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년(辛卯年) 봄, 한국사회를 시끄럽게 한 ‘상하이 스캔들’은 발가벗은 욕망의 종합판이다. 스캔들의 여주인공은 서른세 살의 중국인 여성 덩신밍씨. 덩씨는 자신이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의 손녀라고 말했다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덩씨는 2001년 한국인 J씨와 결혼하면서 자신을 ‘홍콩의 몰락한 사업가 딸’이라고 했다고 한다. 2007년에는 “외삼촌이 상하이 당서기로 새로 부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녀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다만 상하이 한국총영사관에서 그녀가 중국 권부의 실력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숨은 실세’로 인정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탈북자 및 국군포로 송환에서부터 한국 고위인사들과 중국 권력실세의 면담은 물론 중국세관에 적발된 우리 공무원의 통관문제 해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고 한다. 우리 총영사관 측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전화 한 통으로 척척 해결했다고 하니 영사들이 그녀를 ‘막강한 권력가 출신’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을 만하다. 그런 만큼 총영사관 측이 그녀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려 노력했으리란 정황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누가 무엇을 어떻게 주었을까(또는 흘렸을까)? 그것이 우리 정부 합동조사단이 밝혀야 할 핵심 사안이다. 그러나 정부조사단이 나선다고 명확한 진상이 밝혀지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 사건의 핵심인물인 덩씨를 조사할 수 있을 텐데 중국 정부는 그럴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밝혀진 내용은 언뜻 식상한 ‘3각 불륜드라마’처럼 보인다. 유부녀 덩씨와 상하이 한국총영사관 K· H· P 전 영사의 부적절한 관계와 치정극. 그 내용이 명확하지는 않다. 덩씨에게 “제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을 어기면 한국 돈 6억원과 손가락 하나를 잘라주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던 K 전 영사(42·지식경제부 소속)는 덩씨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부인했다. 덩씨가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해 그녀가 불러주는 대로 서약서를 써줬을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협박을 당했다고 해도 한 나라의 외교관이 별 약점도 없는데 손가락까지 잘라주겠다는 서약서를 쓸 수 있나?
외교부 소속으로 2009년 8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P 전 영사(48)는 덩씨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의혹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상하이를 방문하는 한국 고위인사들과 중국 실력자들의 면담을 주선하는 과정에 덩씨의 도움을 빌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법무부 소속이던 H 전 영사(41)는 지난 1월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찾아 중국으로 출국했다. 그는 ‘전생의 인연’인 덩씨를 찾아가 함께 살겠다고 했다고 한다. 덩씨와의 불륜 소문이 상하이 교민사회에 알려지면서 지난해 말 조기소환돼 법무부 감찰조사를 받은 그는 덩씨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이중발급해준 사실이 드러나자 사표를 제출했는데 법무부는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당시 법무부는 덩씨 남편의 제보로 상하이 총영사관의 정보 유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불법 비자발급 혐의에다가 정보유출 정황까지 겹쳐 있는 상황에서 법무부가 H영사의 사표를 받고 끝낸 것은 서둘러 사건을 덮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쉬쉬하기는 외교통상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난해 11월 상하이 총영사관의 스캔들과 비자 부정발급 문제 등이 불거졌는데도 관련 영사들에 대한 해임, 전보, 본부대기 등 경미한 조치를 취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최고책임자인 총영사는 제대로 문책하지 않았다. 국무총리실의 조사에서도 총영사는 빠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덩신밍씨의 개인금고와 컴퓨터에는 대통령 부인의 휴대전화번호를 비롯해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한 정치인 200여 명의 휴대전화 번호와 상하이 총영사관의 내부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정부여당 정치인의 전화번호는 김정기 전 총영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 전 총영사가 기밀자료를 덩씨에게 넘겨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김 전 총영사는 펄쩍 뛰었다. 그는 “자료를 유출하고 중국 여성과의 사진까지 결부해 나를 모함하려 한 정황으로 볼 때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나와 불화가 심했던 모 정보기관 인사가 배후일 것”이라며 국내 정보라인의 소행 가능성을 시사했다. 자신과 알력이 있던 상하이 총영사관의 국가정보원 소속 J 부총영사를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 보도(3월10일자)에 따르면 덩씨가 그 자료를 김 전 총영사에게서 빼냈을 개연성이 높다. 지난해 6월1일 오후 6시56분, 당시 총영사인 김씨와 덩씨가 상하이 힐튼호텔 컨벤션 홀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두어 시간이 지난 9시19분에 같은 기종의 카메라에 MB 선대위 비상연락망 등 정부 여당 실세 연락처가 줄줄이 찍힌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전 총영사는 사진 정보가 조작됐을 것이라고 둘러댔다.
김 전 총영사는 궁지에 몰리자 언론에 덩씨가 국군포로와 탈북자 송환에 역할을 한 사실을 비롯해 국가정보원 측과의 갈등, 심지어 부하 영사들의 비행 등도 서슴지 않고 털어놓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중국과의 외교관계나 차후 영사관의 활동 등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아야 했을 사안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면서 해야 할 말, 안 해야 할 말을 가리지 않았다. 외교관은 물론 고위 공직자로서 자질이 의심될 수밖에 없는 언행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씨는 2007년 한나라당 원외위원장으로 이명박 후보 캠프에 들어갔고, 그해 7월 ‘글로벌리더 200인 지지선언’을 주도했다. 대선 때에는 서울시 선대위 조직본부장을 했다. 그러나 2008년 총선에서 홍정욱 의원에게 밀려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대신 상하이 총영사란 자리를 얻었다. 그에게 미안해 한 MB의 배려였다고 하니 전형적인 보은인사라 하겠다.
물론 해외 공관장에 반드시 외교관 출신이 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인이 영사관 업무를 더 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관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질과 공직자로서의 덕목은 있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공직자가 갖춰야 할 첫째 덕목으로 ‘칙궁(飭躬·스스로를 바르게 하고 삼)’을 들었다. 김씨는 총영사로서 영사관 업무에 도움이 되는 ‘숨은 실세’ 덩씨를 어떡하든 잘 관리하려 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처신이 올바른 공직자, 유능한 외교관의 그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상하이 총영사관의 공직기강을 바로잡지 못했고, 그 자신 정체가 불분명한 덩씨에게 지나치게 밀착했다. 그는 상하이 현지 총영사관 업무보다는 상하이를 찾는 국내 정치인들의 의전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는 문제가 된 주요인사 전화번호 유출은 국내 정보라인의 소행일 거라고 하면서 “경기 성남 분당을 보궐선거에 나가려던 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그가 총영사 업무보다는 국내 정치 복귀에 애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대통령의 보은인사가 망신살이 뻗치는 외교재앙을 초래하는 참담한 결과를 빚은 셈이다. MB 인사는 왜 늘 이 모양인지, 권력을 사익(私益)추구의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을 오로지 충성도의 잣대로 발탁하고 유능하다면(일 열심히 하고 팀워크에 맞는다면) 공직자로서의 도덕성 따위는 별 상관없다는 MB의 인식이 바뀔 것도 같지 않으니 새삼스레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만 그 부메랑이 끝내 대통령과 국정에 돌아가고, 그 피해를 나라와 국민 모두가 감당해야한다는 것이 답답한 노릇일 뿐이다.
한국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분명하다. 빈부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어떻게 대비하고 풀어나가느냐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관리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당장은 다락같이 오른 물가를 잡는 일이 서민중산층을 위한 긴급과제다. 장기적 과제든 현안이든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이들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장기적 과제에는 비전을 제시하고 현안에는 효율적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나라 안은 ‘상하이 스캔들’ 같은 수준 낮은 사건으로 시끄럽고, 정권 실세인 인사에게 연봉을 더 주기 위해 국책은행장의 연봉을 올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나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대통령이 국정과제에 집중하고 국민의 협조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야 어떻게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사회에 국민이 공감할 것이며, 권력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제1야당마저 제 잇속 챙기는 일에나 열심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래저래 불쌍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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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가 일본열도를 초토화했다. 그러나 ‘민심의 쓰나미’는 지진해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은 ‘상하이 스캔들’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정부가 합동조사를 한다 해도 그러려니 한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신뢰를 잃은 권력은, 정치는 ‘민심의 쓰나미’를 맞을 수밖에 없다. 두려워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