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5년 3월 어느 날 기독교 광신도들이 이집트 거리에서 한 여성을 옷을 벗긴 뒤 난도질했다.
- 배후로 지목된 이는 총대주교 키릴로스, 그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간 교회에는 수많은 키릴로스가 있었다.
- ‘히파티아 살인사건’이 오늘의 한국에 뜻하는 바는…
흰 망토를 두른 히파티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여교수 살인 사건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테온은 오늘날의 대학과 견줄 수 있는 무세이온에서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쳤다. 히파티아는 일찍이 아버지를 통해 수학에 입문했다. 그녀는 원추형에 대한 논문을 썼고 고대 수학자들의 저서를 편집하고 주석을 달았으며, 천문관측의와 물비중계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고도의 추상적 사고뿐 아니라 실험과 관찰을 중시한 알렉산드리아의 학풍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히파티아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이끈 철학자였다. 그녀는 철학자의 망토를 두르고 도심을 누비고 다녔으며, 원하는 사람이면-종교와 종파를 불문하고-누구에게나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의 책을 해석해주었다.
히파티아 살해의 배후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지목받았다. 동시대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키릴로스가 살인 사건에 직접 연루됐다는 말은 피했지만, 히파티아가 ‘정치적 시기심’ 탓에 희생됐으며, 히파티아 사건이 키릴로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적지 않은 불명예를 안겨줬다고 보고한다(‘교회사’). 6세기 철학자 다마스키오스는, ‘반대파’의 키릴로스가 도시 전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히파티아에 대한 시기와 증오에 휩싸여 살해를 직접 모의했다고 주장한다(‘철학사’). 한편 7세기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히파티아의 살인을 ‘마녀’의 제거 또는 살아 있는 우상의 파괴로 정당화하며 키릴로스를 영웅으로 치켜세운다(‘연대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라파엘로는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테네 학당’의 철학자들 사이에 히파티아를 되살려놓았다. 이후 히파티아는 종교개혁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주목받았다. 예를 들어, 18세기 개신교 신학자 존 톨란드는 ‘히파티아 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결하고 가장 학식이 높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 그러나 통상적으로 하지만 부당하게도 성인이라고 불리는 대주교 성 키릴로스의 자만심과 경쟁심, 잔인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조각조각 찢겨진 여성의 역사’(1720)라는 긴 제목의 역사 수필을 썼고,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볼링브로그 경의 중요한 조사 또는 광신주의의 무덤’(1736)에서 히파티아의 살해를 종교적 광신주의가 천재를 박해한 사건으로 규정한 뒤 “키릴로스의 삭발한 개들이 저지른 야수적 살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르콩트 드 리즐은 히파티아를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그녀가 대표하는 고대문명의 상실을 안타까워했다. 히파티아를 주인공으로 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최신 팩션 영화 ‘아고라’(2009)는 다시금 기독교 교회의 불편한 기억을 되살렸다. 사실, 히파티아의 삶은 영화보다 훨씬 덜 낭만적이고 그녀의 죽음은 훨씬 더 잔혹했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새로운’ 기독교 문명의 눈부신 도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한다. ‘불안의 시대’로 불리는 고대 후기, 신구(新舊)-문명의 대결이 다른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히파티아의 암살극은 고대문명의 최후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히파티아가 살았던 바로 그 시대에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등대’ 역할을 해온 알렉산드리아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전투적 지도자들이 이끈 ‘새로운’ 종교는 이교신전 사라페이온을 파괴했고, 도시가 생긴 이래 700년간 존속한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시켰다. 히파티아의 암살 이후 오래지 않아 도시의 통치권은 교회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 글에서 우리는 히파티아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신구 문명의 교차지 알렉산드리아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잃어버린 옛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리고 새로운 문명은 어떤 얼굴로 나타났는가? 어떻게 옛 문명은 새로운 문명에서 기억됐는가? 문명의 대전환을 몸소 겪었던 히파티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잃어버린 고대문명
파로스 등대.
정치사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선 기원전 334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기원전 30년까지의 약 300년간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정(東征)으로 출현한 헬레니즘 문명은 고전 그리스문명과 고대 동방문명이 융합돼 창출된 것으로, 문명사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으로 일컬어진다. 헬레니즘은 에게 해 중심의 그리스 세계를 ‘서(西)’로 하고, 이집트를 포함한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동(東)’으로 하는 동서 문명 통합의 산물이었다. 헬레니즘은 철학에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로, 종교에서는 제설통합주의(syncretism)로 대변된다. 실제로 헬레니즘 시기 이름난 철학자의 대다수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시리아, 이집트 및 아랍 출신이었으며, 신들의 이름이 상호 교환되기도 했고, 이집트-그리스 신(神) 사라피스와 같이 하이브리드 신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중해의 진주’로 불린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최대 무역항이었다. 지중해 연안 도처로부터 배가 들어왔다. 어떤 배들은 몬순 바람을 이용해 인도의 서해안에서 홍해를 거쳐 비단과 향료를 들여오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기록에 따르면, 배 한 척이 한 번에 향료 60상자, 코끼리 상아 100t, 흑단 135t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인도와 중국을 ‘동’으로 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서’로 하는 확장된 의미의 ‘동서무역’은 고대인들의 세계 지평을 현저히 확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이 이집트에 세운 ‘그리스’ 도시였지만, 그리스인 외에도 이집트인, 페니키아인, 아랍인, 누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어깨를 비비고 사는 곳이었다. 이처럼 ‘고대의 뉴욕’이라 할 만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사에서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초엽,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을 위해 학자 70여 명에게 히브리어 구약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기도록 요청했으며, 그 결과 유명한 ‘70인역 성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패전과 자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의 유산을 바탕으로 고대 후기 문명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이 도시는 한때 로마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인구가 100만명에 달했다. 이 시기에 성(聖) 마르코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교회를 세운다. 이로써 기독교가 이교(異敎)와 유대교와 함께 치열한 문명의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찬란한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단연 등대와 도서관을 꼽을 수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파로스(Pharos) 등대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40층짜리 고층 빌딩이었다. 이 고대판 마천루는 기원전 283년에 세워져 기원후 1300년대 중반 지진에 의해 쓰러질 때까지 약 1600년간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했다. 우뚝 선 파로스의 맞은편 항구 주변에 왕궁이 있었고, 바로 근처에 무세이온(뮤즈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안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놓여 있었다.
지중해 세계 지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번영을 구가했고, 알렉산드리아를 문화적 황무지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바꾸어놓았다. 더불어 알렉산드리아는 나일강 일대에 자생하는 파피루스를 가공하는 종이산업의 본고장이자 지중해 지역 서적 무역의 중심지로 도약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존재한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책을 사들였다. 특히 호메로스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돼 다양한 종류의 필사본이 수집됐다. 기원전 3세기 초에 활약한 칼리마코스는 도서관 장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정리한 ‘목록’(원제는 ‘전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작품을 기록한 목록’이다)을 편찬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사라페이온’에 두 개의 소형 도서관이 건축됐다. 무세이온의 주도서관에는 50만~70만권의 두루마리 책이, 사라페이온의 부도서관들엔 5만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왕립 대학 무세이온 (‘museum’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의 산하기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로열 아카데미’는 고대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문화적 야심의 산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뮤즈의 신전’을 짓고, 세계의 유수한 작가·시인·과학자·철학자를 불러 모아 높은 봉급과 함께 숙식을 제공하면서 연구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기하학자 유클리드와 지구의 원주를 근소한 오차로 계산해낸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 그리고 해부학의 창시자 헬로필로스가 초빙됐다. 무세이온은 특히 수학과 의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무세이온의 회원으로 알려진 최후의 인물이 바로 테온, 그러니까 히파티아의 아버지다.
고대문명의 보고(寶庫)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소문만큼 이론(異論)도 많다. 7세기 아랍의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됐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슬람을 중상하기 위해 꾸며낸 허구일 소지가 크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술상의 이유로 알렉산드리아 항에 정박 중이던 자신의 함대에 불을 질렀을 때 불길이 번져 위대한 도서관을 태웠다고도 하지만, 도서관 전체가 아니라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도 도서관은 수차 화마를 겪은 것으로 전해지며, 270년경,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왕궁과 함께 주도서관이 파괴된 것으로 간주된다. 늦어도 391년 사라페이온이 완전히 파괴됐을 때 부도서관들도 (그때까지 건재했다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히파티아가 죽기 25년 전의 일이다. 영화 ‘아고라’에서는 도서관이 이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라페이온의 파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여기에서 ‘이교’(異敎)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외한 ‘다른’ 전통 종교를 가리킨다. 다분히 기독교와 유대교를 기준으로 하는 편향된 말이다. 하지만 ‘이교’로 번역되는 원어 ‘paganism’은 이보다 더 심한 말이다. 이 말이 유래한 라틴어 ‘paganus’는 원래 ‘시골뜨기’ 내지 ‘무식한’을 뜻하며, 미신에 빠진 사람이나 범죄자 또는 환자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됐다. 정작 ‘이교도’로 불린 사람들은 기독교의 압제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하나의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정치적 권한이 확대되면서, ‘교회의 파라오’라 불리던 테오필로스 총대주교의 세력도 강화됐다. 흥미롭게도 테오필로스 시대에 성 안토니우스(250~350)가 시작한 이집트 수도원 운동이 절정에 달한다. 히파티아를 흠모한 시인 팔라디스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2000여 명의 수도승이 알렉산드리아 주변에 살았고, 은수자 5000명가량이 니트리아 사막에 은거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총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한꺼번에 엄청난 수의 수도승이 알렉산드리아로 달려왔다는 사실이다. 테오필로스는 수도승들을 자신의 ‘사병(私兵)’으로 활용한 것이다. 수도승들은 사라페이온의 파괴에도 한몫을 했다. 세상의 유혹을 끊고 오직 신을 찬미하기 위해 불모의 사막으로 떠났던 성 안토니우스의 후예들이 주교의 군대가 되어 도시로 되돌아온 것이다. 검은 망토를 두른 수도승들은 테오필로스의 사촌이자 그를 이어 총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성 키릴로스에게도 충성을 바쳤다. 이들이 바로 흰 망토를 두른 철학자 히파티아의 살해 용의자다.
키릴로스의 야심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기록하며,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개인적 감정에 기인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정치적 암살’임을 암시한다.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키릴로스(376~444)는 현재 기독교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교회 박사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412년 키릴로스는 폭도들을 동원해 교회 내부의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선출됐다. 교회 조직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신임 총대주교는 과도한 ‘행동주의’로 자신의 불안감을 상쇄하려 했다. 교회 안으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한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축출됐다. 교회 밖으로는 자신의 권한을 세속 정치의 영역에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월권’으로 인해 키릴로스는 이집트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이 갈등은 유대인 문제를 계기로 폭발한다.
이단 축출 이후 키릴로스는 교회의 내부 세력을 규합하고자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시나고게의 타락에 대하여’를 집필해 반(反)유대인 정서를 조장했다. 마침내 415년 어느 날 오레스테스 총독이 자리한 극장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결국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귀결됐다.
소크라테스는 이 엄청난 사건이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의 ‘극장 열풍’이 그 사소한 화근이었다. 그가 전하는 사건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종종 율법을 듣는 대신 극장에 갔다. 특히 무용수들이 관중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춤 공연에 열광한 유대인들이 장외 질서까지 문란하게 하자, 기독교인들의 항의가 잇달았고, 관(官)에서도 제재 조치에 나섰다. 오레스테스 총독이 규제령을 공포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극장에 소집했을 때, 기독교인들도 들으러 갔다. 그런데 키릴로스의 열렬 추종자 한 사람이 규제령에 환호의 박수를 보내자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를 선동가로 몰아세웠다. 그러자 총독은 ‘선동가’를 체포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고문에 처했다. 이것은 관권을 침해하는 총대주교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했다.
증오에 휩싸인 유대인들은 어느 날 밤중에 교회에 불이 났다는 거짓말로 기독교인들을 집 밖으로 유인해낸 다음 무차별로 공격해서 죽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손가락에 나무 반지를 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기독교인들의 복수전이 시작됐고, 키릴로스가 몸소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7세기 이집트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승자의 입장에서 전쟁의 경과를 기술한다. “기독교인들은 분노에 차서 시나고게로 향했고, 그것을 차지했고, 교회로 만들기 위해 정화했다.”(‘연대기’).
이 사건은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끝나지 않았다. 니트리아 사막으로부터 약 500명의 수도승이 도시로 몰려와서 총독을 ‘이교도 우상숭배자’라고 모욕하며 난동을 피웠다. 총독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기독교이라고 항변했지만, 한 수도승이 그를 돌로 쳤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와서 그의 목숨을 구했고, 그를 친 수도승을 잡았다. 총독은 수도승을 공개적으로 고문했는데, 고문이 극심해서 수도승이 죽고 말았다. 키릴로스는 수도승의 시체를 어느 한 교회에 안치하고, 거기에서 그를 순교자로 추대하는 성대한 미사를 거행했다.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들은 -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 키릴로스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키릴로스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자신을 도시의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의 시대에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되었고, 박해받는 자가 아니라 박해자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가 있은 지 약 10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총독과 총대주교 사이의 권력 다툼은 또 다른 사건에 의해 새로이 불붙는다. 총독과 친분관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유명인사, 즉 히파티아가 살해당한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육신
철학자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수장(首長)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서 짐꾼으로 생계를 잇던 암모니오스 사카스(‘짐꾼’)에서 시작해 로마로 간 그의 제자 플로티누스(205~270)를 통해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지배적 철학사조로 발전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특히 우주의 원리를 논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들의 형이상학적 원리론은 기독교 신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플라톤의 정신에 충실하게 수학 교육을 중시했고, 그들의 형이상학은 피타고라스주의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히파티아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히파티아의 사상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그녀가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플로티누스처럼 종교적 제의를 멀리하고 철학이야말로 신을 모시는 진정한 길이라 여겼을까? 아니면 이얌블리코스와 같은 후대의 신플라톤주의자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종래의 제의를 포용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처럼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이교의 전통을 쇄신하려 했을까? 분명한 것은 히파티아가 기독교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듣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철학을 가르쳤다. 그녀의 문하에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도 있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기독교인으로 주교좌에 오른 키레네의 시네시우스다.
390년대 알렉산드리아로 유학 가서 히파티아를 사사한 시네시우스는 스승을 몹시 존경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 가운데 히파티아에게 보낸 편지가 7통 전한다. 한 편지에서 그는 히파티아에게 “하데스에서는 망자들에 대한 망각이 있다지만, 거기에서도 나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오.”(‘편지’)라고 썼고, 그가 병상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는 그녀를 “어머니, 누이, 선생님, 게다가 은인”(‘편지’)이라고 부른다. 그는 스승에게 자신의 저서를 함께 보내면서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그를 비방하는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과 흰 망토를 입은 자들 양쪽에 대항해 자신의 철학을 옹호하기도 하며, 물비중계를 보내달라는 부탁도 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히파티아가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도 한다. 시네시우스가 히파티아의 죽음을 언급하는 편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먼저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시네시우스와 히파티아의 사제 관계가 예시하는 것처럼, 고대에는 한 철학 학파에 입문하는 것이 ‘평생 친구들’의 서클에 가입하는 것과 같아서, 철학자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서로 간에 친밀한 유대를 유지했다.
시네시우스 주교는 참다운 철학의 길을 모색하며 교회의 ‘정통 교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육체의 부활, 세상의 종말, 영혼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교리에 반대했으며, 교회 내에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히파티아가 길러낸 철학자 주교가 걸은 길이다. 이 길은 ‘다른’ 생각을 용납지 않은 키릴로스가 걸은 길과는 다르다. 키릴로스는 수많은 이단 논쟁에서 승리했고, 수많은 이를 파문했다. 그리고 교회에는 수많은 키릴로스가 있었다. 이처럼 숱한 파문의 역사를 통해 확립된 것이 소위 ‘정통’이다.
다시 히파티아로 돌아가자. 히파티아는 높은 학식과 함께 미모로 유명하다. 한 일화에 따르면, 한 학생이 너무나 아름다운 처녀 교수를 사랑하게 됐다. 그것을 알게 된 선생은 제자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충격요법을 썼다. 그녀는 자신의 피 묻은 생리대를 가져와 보이며 “청년, 이것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라고 말해서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한다(‘철학사’). 그녀의 아름다움이 총대주교의 여성혐오증을 야기했거나 부채질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415년 살해 당시, 그녀는 적어도 40대 중반, 많게는 60대 중반이었으므로, ‘아프로디테의 육신’과는 거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를 차분하지만 자유로운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한다. 그녀는 관료들이 자리한 공식석상에 자주 나타났고, 남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들도 범상한 위엄과 덕을 지닌 그녀를 존경했다고 덧붙인다. 다마스키오스 역시 그녀의 덕을 칭송한다. 특히 그녀를 절제와 정의의 귀감으로 기린다. 이밖에 그녀의 명료하고도 능숙한 언변과 정치적 감각도 언급한다. 이러한 자질들로 인해, 히파티아가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새로 부임한 총독 오레스테스에게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는 시민이었다. 총독은 이 여성 철학자를 정치적 조언자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마녀사냥
히파티아가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보고에 따르면 히파티아가 오레스테스와 자주 회동을 갖자, 기독교도들 사이에 총독과 총대주교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이 그녀라는 악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마침내 성서 낭독자로 일하던 베드로라는 자가 광분해 폭도들을 이끌고 가서 히파티아를 공격했다고 한다.
7세기 니키우의 주교 요한도 그러한 소문을 믿었고, 오레스테스의 반항을 그녀 탓으로 돌렸다. 이 맥락에서 그는 놀랍게도 히파티아를 ‘마녀’로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마법에 종사했고 많은 이를 악마의 술책으로 홀렸으며, 도시의 통치자 즉 오레스테스 또한 마법으로 현혹해서 총독과 불목하게 하고 교회에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묘사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천문관측의와 악기들이 마법과 한통속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천문학이나 화성학과 같은 수학적 학문들을 마법이라고 스스로 오해했거나 또는 남들을 오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학문을 죄악시하는 종교의 광신적 전통과 맞물려 있다(‘연대기’).
요한은 키릴로스가 히파티아 살해에 직접 연루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살해 장면을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쓴다. “그리고 모든 이가 총대주교를 둘러싸고 그를 ‘새로운 테오필로스’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도시에 남아 있는 우상의 마지막 잔재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연대기’). 여기에서 키릴로스의 히파티아 제거는 테오필로스의 사라페이온 파괴에 비교된다. 요컨대, 히파티아의 살해는 우상파괴 내지 ‘마녀사냥’이다.
6세기 신플라톤주의자 다마스키오스는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한다. 그는 히파티아의 살해를 너무나 단순하게도 인간심리를 통해 설명한다. 그가 본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키릴로스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많은 사람이 그 집으로 나고 드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가 수행원에게 무슨 군중에, 웬 소동인지를 묻자, 수행원은 철학자 히파티아가 지금 문안 인사를 받고 있는 중이고, 그 집이 그녀의 집이라고 대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영혼이 미움에 휩싸였다. 그러자 곧 그는 그녀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철학사’). 다마스키오스의 진단에 따르면 키릴로스는 미움 내지 시기 질투라는 마음의 병에 제압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걸려 있는 수많은 디테일을 생략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미움이 히파티아 사건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종교가 다르거나, 종파가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사라페이온도, 유대인 공동체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철학자도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시에 바쳐진 뇌물 덕에, 히파티아 사건의 원인과 주모자에 대한 관(官)의 조사는 없었다. 키릴로스의 교회는 황실까지 매수했다. 오레스테스 총독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됐다. 418년, 마침내 도시의 행정권이 총대주교의 손으로 공식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등대여, 다시 빛나라!
사라페이온의 파괴와 히파티아의 암살이 곧바로 고대문명의 종말을 가져오진 않았다. 440년대 키릴로스가, 죽은 지 80년도 넘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를 논박하는 ‘율리아누스에 반대하여’를 집필할 필요를 느낀 것을 보면 그렇다. 히파티아가 죽은 후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학파는 100년 넘게 지탱했다. 5세기 중반 히에로클레스가 아테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비록 오래지 않아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이교도 철학교수인 올림피오도로스(475~570)는 이교도 철학자로서 기독교 도시에 산다는 것이 야수들에 둘러싸여 그들을 쓰다듬으려고 하는 미치광이 짓과 같다고 썼다(‘고르기아스 주석’). 다마스키오스(460~540)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우고 가르치다가 아테네로 건너가서 아카데미의 학장이 된다.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카데미를 철폐하자 아카데미의 마지막 학장은 동료들과 함께 페르시아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 공식적으로 최후를 맞는다.
훗날 기독교 교회는 히파티아를 마녀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8세기 무렵 생성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전설에 히파티아의 아름다움과 처녀성, 그리고 철학·수학·천문학 분야의 학식이 투영된다. 사실, 전설의 성녀 카타리나와 역사적 히파티아의 연결고리를 시사하는 유적이 있다. 아직도 소아시아의 한 고대도시에는 ‘성 히파티아 카타리나’에게 바쳐진 교회의 폐허가 존재한다. 왜 기독교 교회는 히파티아를 마녀에서 성녀로 만들었을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배운 여자’를 포용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14세기에는 ‘히파티아’가 여성 학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기에 이른다.
2011년 이집트는 현대사를 다시 쓰고 있다. 민주화운동으로 ‘현대의 파라오’라 불리던 무바라크가 30년의 독재 끝에 하야했다. 하지만 1월1일 알렉산드리아 콥트 교회에서 일어난 차량폭탄 테러 사태를 생각하면 이집트가 갈 길은 아직 멀다. 역사는 돌고 돌아 성 마르코의 교회가 무슬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약자 신세가 됐다. 이렇듯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일 수 있음을 역사는 가르친다. 강자든 약자든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느 종교를 가지고 어떤 종파에 속하든지 남과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독단과 독선을 버리고 대화의 장, 아고라로 나와야 한다. 대화하는 정신, 이것이 히파티아를 인도한 고대문명의 등대였다. 등대여, 다시 빛나라.
참고문헌
● Maria Dzielska, Hypatia of Alexandria,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 Manfred Clauss, Alexandria. Eine antike Weltstadt, Stuttgart: Klett-Cotta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