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선<br>●1966년 서울 출생<br>●세화여고, 서울대 외교학과, 컬럼비아대 법학석사<br>●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 한나라당 대변인<br>●‘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등
봉사하는 젊은이들과 함께하기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인생이 100m 달리기인 줄로만 알았다. 결승점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 믿었다. 왜 뛰는지도 모르고 그저 신호가 울리면 남 따라 뛰는 트랙. 거기서 남보다 출발이 늦거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영영 낙오되는 줄 알았다. 나에게 치열한 삶이란 한 번도 트랙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으며, 한 번도 남을 앞서 보내지 않는 것만을 의미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인생은 남과 일렬로 서서 뛰는 겨루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인생은 단지 광야에 홀로 서서 걸어내는 것이었다. 빨리 가면 즐거움을 놓치고, 멀리 간다 한들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다. 인간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 인류의 외연을 넓히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데 최근 수많은 젊은이가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오지를 찾아 금쪽같은 시간을 아깝다 하지 않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참 창피했다. 나는 젊음을 벗어나서야 알게 되었던 것들을 요즘 젊은이들은 기특하게도 일찍 깨달았다. 지난 1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에티오피아에 가서 헌신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한 곳이었지만 그들은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정성을 쏟았다. 말이 아닌 체온으로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이들의 행군에 동참하고 그들이 있는 곳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이 가는 길을 더 넓게,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역사에 이름 남길 거장들 생전에 만나기
역사에 이름이 남은 예술가에게는 성인(聖人)과 다를 바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지난해에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거장 게오르규 바젤리츠를 만났다. 팝아트의 쓰나미 속에서도 정통 회화성을 지켜낸 대가임에도 그는 마치 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았다. 처음 만난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화폭 위의 표현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이미 표현의 방법과 매개가 끝도 없이 확장되는 현대미술에서 한 작가에 대한 평가는 곧 그의 인생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화폭에 담긴 작가의 인생이 얼마나 절절하고, 진실되고, 창의적인지에 의해 그 작가의 가치가 매겨진다. 그래서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작가의 삶, 작가라는 인간 자체가 예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세계는 그림과 화집만으로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을 인간으로서 만나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해 바젤리츠를 만나고 난 후 그와의 만남에 대해 짧은 글을 한 편 썼다. 지금 여든 안팎의 거장들.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셀름 키퍼, 알렉스 카츠, 로베르토 인디아나…. 더 늦기 전에 이들을 만나 나와 동시대에 호흡한 천재들의 ‘기’와 ‘끼’를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을 나의 글에 가두어 간직하고 싶다.
음악, 미술, 역사, 문학, 음식과 술이 어우러진 여행
남동생이 대학 입시에 떨어졌을 때 나는 사법시험에 떨어졌다. 향토사학자가 무색할 정도로 역사 유적 답사를 좋아하셨던 친정아버지와 절을 찾아 기도를 다니셨던 친정어머니는 그 무렵 자주 함께 절에서 주말을 보내셨다.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위해 절에서 주무셨지만, 애주가인 아버지는 절집 근처에서 민박을 하셨다. 절에 다녀오면 아버지는 늘 절의 역사에 대한 장황한 설명과 함께 민박집 음식이며 술맛 얘기를 하셨다. 몇 년이 지나 그 시절 이야기가 가족들의 ‘안줏거리’가 되었을 때 내가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셋이서 우리나라 산사와 그 앞의 민속주에 대한 책을 하나 쓰자고.
한때 산사를 찾아가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손에 들고 저자의 궤적을 따라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은 곳곳의 예인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기행문이다. 복원된 민속주를 찾아다니며 술 담그는 이야기, 술 빚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책도 있다. 틈으로 본 우리 건축, 명묵(明默)의 건축, 풍경을 담은 그릇, 정원, 고택 이야기도 각각 책으로 엮여 나왔다. 이런 책들을 길잡이 삼아 아름다운 곳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느끼며 오감을 다 동원한 입체적인 여행을 차근차근 하고 싶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힘 되어 주기
예술의 변방에서 태어난 우리의 예술가들은 그 중심 무대로 나가기 위해 참으로 고단하고 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국경이 없는 예술의 세계에서 국내에만 안주했다가는 아무도 그 존재를 기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의 예술가들과 똑같은 재능을 가졌음에도 나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해 잊힌 예술가가 숱하게 많다. 젊은 미술가들이 해외의 거장과 함께 전시를 하고, 해외 미술관에서 그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젊은 음악가들이 해외의 거장과 한 무대에 서고, 우리 작가가 쓴 시나리오나 만화가 할리우드에서 영화가 되도록 돕고 싶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인맥과 재력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사실 이런 일은 어느 한 사람이 전부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꺼이 후원해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촉매가 되고 허브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건 나의 버킷 리스트이면서 지금 조금씩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국제음악제(SIMF)의 준비를 맡아 해외의 거장과 국내의 젊은 음악가가 협연할 수 있는 자리를 꾸미고 있다. 문화예술 부문에 기부하는 기업에 세제혜택을 주어 굳이 정부의 재정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민간의 두둑한 후원을 늘려나갈 수 있는 메세나법도 다시 준비하고 있다(이 법안은 지난해 세수(稅收) 감소 문제로 폐기돼버렸다). 태동한 지 100년이 되도록 법 하나 없는 만화계를 위해 만화진흥법을 발의하려 한다. 많은 사람이 이 길에 동참하면 좋겠다.
왕오천축국전과 직지심경 모셔오기
오래전 프랑스에서 갖고 있는 우리 유물이 돌아올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반환을 약속했지만 담당자인 도서관 직원이 끝까지 반대해 오지 못했다. 그 유물을 보는 우리 측 고위인사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전문가도 대동하지 않고 그 유물을 보통 책장 넘기듯 훌렁훌렁 넘기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규장각 시설을 둘러본 프랑스 담당자는 그 열악한 보존 환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유물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논리는 먹히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귀한 유물일수록 잘 보전할 수 있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애정이 뜨뜻미지근하기만 하다. 보존 설비는 수준에 오른 것 같은데 사랑을 쏟을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는 탓이다. ‘한국에 있으면 저렇게 사랑받을 것이 여기 있어 뒷전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도록 할 길을 찾자.
이렇듯 긴 호흡의 버킷 리스트를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숙제는 묵직하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받을 수 없는 충만을 얻을 내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해 낼 수 있는 더 큰 행운을 감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