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br>폴 오스터 지음, 열린책들, 333쪽. 1만800원
나는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브루클린을 추천했고, 그래서 바로 이튿날 아침에 나는 그 지역을 한바퀴 둘러볼 셈으로 웨체스터에서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섰다. 지난 56년 동안 거기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탓에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세 살 때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이사를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전에 우리가 살던 곳 근처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마치 상처 입은 개가 그러하듯 태어난 본거지로 기어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현대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The Brooklyn Folies, 2005)의 첫 대목이다. 첫 문장부터 주인공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명제가 ‘죽는 일’임을 밝히고 있는 이 소설은 내가 뉴욕에 갈 때면 그의 또 다른 소설 ‘뉴욕 삼부작’(The New York Trilogy, 1985~86)과 함께 챙겨가는 필수품인데, 이는 나만의 여행법과 관계가 깊다. 곧 뉴욕에 갈 때에는, 더욱이 브루클린에 갈 때에는 폴 오스터의 소설과 함께할 것! 혹자는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는 일’이 주인공의 중요한 화두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장소로 지목된 브루클린이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나는, 어쩌면 청춘시절이 도래하기도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왔는데, 요체는 살고 싶은 곳과 마찬가지로 죽고 싶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래서인지 소설가가 막 되었던 20대 중반에 이런 문장을 당돌하게 소설에 부려놓기까지 했다.
언젠가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지요.(중략) 우리 집 그분이 저 벌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답니다, (중략) 죽을 때는 꼭 예 와서 죽고 싶으이, 그 한마디였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자기가 죽을 자리를 찾아 평생을 떠도는 것이 아닐까, 이사 온 첫날 밤 그분과 나란히 누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쓰는 순간에는 분명 찰나적이면서도 오롯이 잡히는 성찰 속에 한 문장 한 문장 공들여 빚어낸 문장이지만,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쓴 글(소설)을 읽을 때면, 치기(稚氣)로 뭉쳐진 열정의 산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젊은 날에는, 죽을힘을 다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폴 오스터처럼,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으면서도,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해나가며 닥치는 대로 글쓰기에 자신을 내맡겨야 함을, 그것은 신인시절에만 허용되는 특권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중략) 작가가 되는 것은 (중략)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자전적 에세이집을 출간할 당시 폴 오스터의 나이 쉰. 명문 컬럼비아 대학 출신이 세속적인 어떤 직업도 마다한 채 글쓰기의 골방에 처박힌 이야기. 이 산문집의 원제(原題)는 ‘Hand to mouth’. ‘그날 벌어 그날 먹기’라는 뜻인데, 번역 출간 과정에서 ‘빵 굽는 타자기’라는 기발한 제목으로 태어났다. 작가로서의 절정기에 오른 쉰 살의 폴 오스터는 하루살이처럼 그날 글을 써서 벌어 그날 먹어야 했던 작가 지망생 시절의 초심을 이 책을 통해 치열하게 되새긴 셈이다. 힘든 시기를 거쳐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입지를 부여한 작품은 ‘뉴욕 3부작’과 ‘고독의 발명’(The In-vention of solitude, 1982). 어느 날 한 통의 잘못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되는 ‘뉴욕 3부작’은 폴 오스터 소설의 특질인 우연의 미학과 추리 기법의 정석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다. 그보다 3년 먼저 발표한 ‘고독의 발명’은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와 ‘기억의 서(書)’로 이뤄져 폴 오스터 식 소설 법칙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초기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소설 배면에 스며 있는 한 남자, 곧 유대인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형성된 작가적 자의식을 반추한다.
인생이라는 한 편의 퍼즐
어느 날에는 삶이 있다. 이를테면 건강도 아주 좋고 늙지 않고 병력(病歷)도 없는 한 남자가, 모든 일은 예전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업을 염두에 두고 오로지 자기 앞에 놓인 삶만을 꿈꾸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다음에는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 한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앉은 채로 무너져 내린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되는 이 산문집의 백미는 ‘가족(아버지)과 나’에 대한 건조한 듯 마음을 잡아끄는 문체와 회고적 진정성을 뛰어넘는 절묘한 ‘제목’에 있다. 한국어의 ‘고독’과 ‘발명’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조합으로 보이고, 그 때문에 그 둘의 결합은 생경하면서도 신선한 공명(共鳴)을 일으킨다. 그러나 영어의 발명은 Invention, 고안(考案), 나아가 본질적으로는 창작(創作)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의 발명’은 고독을 질료로 빚어낸 ‘창작’인 것이다.
1940년대에 애틀랜틱시티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찍은 속임수를 쓴 사진 한 장. 그 사진에는 테이블 주위로 그가 서넛 앉아 있는데, (중략)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안 그 남자들이 모두 같은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중략) 하나하나의 모습은 계속해서 허공을 응시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지만 마치 다른 사람들의 눈길 아래에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고 절대로 어느 것도 볼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의 사진 ,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이다.
30대 중반의 폴 오스터가 ‘고독의 발명’에서 ‘보이지 않는 남자’, 곧 아버지의 초상화를 사실과 기억을 오가며 그려냈다면,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오늘, 그는 아예 제목을 ‘보이지 않는’으로 잡고 컬럼비아 대학 재학생이자 시인 지망생인 애덤 워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청년시절을 회고한다. 이야기는 1967년 어느 봄밤의 파티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1967년 봄에 그와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당시는 나는 컬럼비아 대학 2년생으로 책만 좋아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훌륭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믿음(혹은 망상) 하나만은 굳건했다.
나는 파티에서 따분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우연히 구석에서 보른과 마고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을 만난다. 그, 그러니까 보른과 악수를 하면서 나는 그가 프랑스인이며 컬럼비아 대학의 방문교수로 국제정치, 특히 역사적인 대참사를 강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 마고는 ‘미인은 아니었으되 미인을 연상시키는 얼굴’로 스무 살의 청년의 눈에는 매혹적으로 보이는 20대 후반의 프랑스인이다. 소설은 그날로부터 40 년 뒤, 우리의 주인공 애덤 워커가 60세 되는 해에, 1967년 봄밤의 파티와 그곳에서 만났던 두 인물과 맺었던 관계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인간 나이 60세 즈음에 이르면 과거의 길고 짧은 순간들이 ‘실제(현실)’였던가, 아니면 마음속 욕망으로 품었던 ‘환상(헛것)’이었던가 싶은, ‘사이의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일까. 소설의 제목 ‘보이지 않는’이 가리키는 곳은 이 세 사람의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부유하는 어떤 실체, 즉 환상(幻想)이다. 서사의 기본 줄기를 순차적으로 구성하지 않은 점,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話者)를 나로 일관성 있게 제시하지 않고 나에서 그로 이행시킨 점 등, 예순을 넘긴 폴 오스터는 이번 신작에서 ‘인생이라는 한 편의 퍼즐 작품’을 입체적으로 완성시켜나가듯 시간과 인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성을 취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세계)란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보이는 세계 또한 그 역(逆)을 전제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작가로서의 새로움(내용의 확장과 형식 실험)과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 찾기에 대한 작가의 원숙한 성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산 밑 가까이 다가갈 때, 나는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는 소리, 혹은 떼 지어 몰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략) 나는 계속 걸었지만, 장벽은 내가 산의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산 밑에 도착하자 나는 멈춰 서서 오른편을 돌아봤고 마침내 그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내 귀가 내게 말해준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