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1-03-22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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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자기 생존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 원칙을 따른다. 생명을 보존하고 자기 닮은 후손들을 퍼뜨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청년 이수현이나 혁명가 체 게바라 같은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자기를 죽여 남을 고통과 죽음에서 해방시켰다. 인간의 본성으로 알려진 이기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전우의 목숨을 살리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이타적 행동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래의 세계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할 것이다. 더 많은 이타주의자와 더불어 사는 삶이 기다려진다.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늑대는 변해서 개가 되고, 들소는 변해서 소가 되었다. 거세하거나 길들이기 같은 인위적 방법으로 야생동물의 본성을 바꿔 가축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자연은 가공과 변형이 가능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하빌리스, 그 다음 호모 에렉투스, 그 다음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오늘의 인류에 이른 뒤, 사람은 항상 사람이다. 사람 하나하나는 우주에 버금갈 만한 복잡함을 머금은 존재들이다. 사람은 하나의 유적(類的) 동일성에 묶어둘 수 없는 까닭에 하나의 본성론에 귀속되지 않는다. 뇌라는 ‘수억 광년의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1.5㎏짜리 작은 덩어리’(매리언 다이아몬드)를 가진 자연의 종(種)이면서 항상적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 일반이 아니라 고유한 성, 나이, 문화, 인격을 가진 개별자로 엄연하고, 제 인격의 현실태(現實態)이며 미래 가능태(可能態)로 살아간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삶을 향유한다는 뜻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 향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으로 나는 충분하다. 나를 떠받쳐주는 땅은, 무엇으로 나를 떠받쳐주는가를 알려고 하지 않아도 나를 떠받쳐주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모퉁이, 일상적 처신의 세계, 이 도시, 이 지역 또는 이 거리, 내가 살고 있는 이 지평, 이들이 보여주는 외모에 나는 만족한다. 이들에게 나는 폭넓은 체계 속에 설 땅을 제공하지 않는다. 나에게 설 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이들이다. 이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나는 이들을 영접한다. 나는 이 사물들의 세계를 순수한 요소처럼, 떠받쳐주는 이 없는, 실체 없는 성질처럼 즐기고 향유한다.”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여기서는 강영안의 ‘타인의 얼굴’에서 재인용)

    이 향유의 개별성을 통해 우리 각자는 사람 일반에서 쪼개져서 ‘나’로서 살아간다. ‘나’와 다른 이질성을 구현하는 타자들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변환시킨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나에게 터전을 주고 나를 떠받쳐주던 세계의 이질성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타자성을 상실한다.……다른 것에 속했던 힘은, 포만(飽滿) 가운데……나의 힘, 내 자신이 된다.”(레비나스, 여기서는 강영안의 앞의 책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이수현의 죽음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사람은 추악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한 존재다. 사람 안에 짐승과 신이 함께 있는 까닭에서다. 2001년 1월26일 저녁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고 뛰어든 청년이 전동차에 치여 죽는다. 취객은 그 청년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청년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 생명을 희생하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똑같은 상황에 있을 때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한 살인이고 제 생명과 자유를 빼앗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향한 이 살인이자 폭력 행위는 일본 주류사회에 큰 감동과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그 청년을 추모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이 많았다. 일본에서 그의 아름다운 행위를 기려 여섯 해 뒤에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도 충분히 기적이다. 제 생명을 버려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보다 더한 기적이다. 이수현은 그런 기적을 실현한 인간이다. 많은 사람이 그 기적에 놀라고 감동한 것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유한한 제 삶을 타자를 위해 남김없이 씀으로 그는 타자를 영접한다. 죽음이라는 무의미를 향한 존재를 의미의 존재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한 청년 이수현(1974~2001)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을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이입 이타주의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 우리 내면의 마음도 반응하고 그 반응은 원형적인 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마음 안의 고통을 흉내 내면서 우리 자신의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분 나쁘게. 우리는 타인의 부정적인 느낌에 감염되며 이 상태를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을 할 동기를 부여받는다.”(마이클 S. 가자니가, ‘윤리적 뇌’)

    타자가 사고를 당해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도 타인의 감정 상태를 공유하며 그에 따라 반응한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다. 여러 심리학적 실험이 이 가설을 증명한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경향은 타고나는 것 같다. 신생아는 태어난 첫날 다른 신생아의 통증에 반응하여 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마이클 S. 가자니가, 앞의 책)

    청년 이수현의 아름다운 행동은 분명 우리가 공유하는 계통발생론적 유산, 즉 타인의 고통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살인과 근친상간을 금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본성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섬광의 발현이다. 제 내면의 양심에서 솟구친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윤리적 명령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이타적 행위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맑고 순수한 사람이고, 남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의 실천자라는 증거다. 물론 모든 이타적 행동에는 이기적 동기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생물학자도 있지만, 청년 이수현의 이타적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던져준다.

    도덕성의 실천자

    생물학에서 사람은 지구 위의 많은 생물 중에서 하나의 종이다. 종이란 개념은 어떤 편의를 위해서 형태학적 차이에 따라 지정한 임의적인 범주, 즉 ‘연속적인 계통발생 계열을 임의적으로 절단시켜 놓은 단편’(로저 트리그,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생물학은 종을 ‘상호 교배가 가능한 자연 개체군 집단으로, 그와 유사한 다른 집단으로부터 번식적으로 격리된 집단’(로저 트리그, 앞의 책)이라고 설명한다. 인류는 동일한 생물학적 종이고, 그에 따라 ‘인간 형질의 원천으로서의 공통적인 유전자 풀’(로즈 트리그, 앞의 책)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동일한 유전적 형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각각 다른 문화를 일구고 똑같은 상황에서 제각각 다른 행위를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구는 자기 이익을 위해 살인을 하고, 누구는 자기 이익과 무관한 타자를 위해 생명을 희생한다. 이 행위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떤 생물학자들은 고정된 인간 본성은 없다고 말한다.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도, 인류학자 애슐리 몬태규도,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도 불변하며 고정적인 인간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다만 사람은 각기 다른 시공간적 연속성에 따라 나타난 역사상의 실재들이며, 개체에게 발현되는 인격은 환경과 같은 우연적 산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존재이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인격들 하나하나는 단순한 유전자나 환경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은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존재로 태어난다. 우리 안에 각인된 도덕 감각이 우리를 동물보다 더 많은 이타적 행위를 하도록 한다. 사람은 자연에 작용하는 생물학의 법칙을 넘어서서 도덕과 종교를 발명하고, 그에 따라 더 높은 도덕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사람은 유전자 이상이고, 사회적 환경을 넘어서서 제 고유한 인격을 발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수현과 같은 사람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수현과 더불어 우리는 이타성을 실현한 사람으로 체 게바라(1928~67)를 기억한다. 볼리비아 정부군에 생포된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9일 볼리비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학교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사살되었다. 올리브그린색 전투복과 별이 그려진 베레모 차림, 그리고 깡마른 체구와 어깨까지 닿는 장발과 턱을 뒤덮은 수염을 한 사나이. 제 자식들이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가르친 아버지. 20세기가 낳은 혁명의 아이콘, 의사, 게릴라 대장, 대사, 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재무장관, 외교관, 뛰어난 저술가. 그게 모두 한 사람이 20세기에 수행한 직책들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른 이들처럼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유명한 발견자가 되는 꿈도 꾸었고, 인류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를 위해 지치지 않고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그런 것은 개인적인 승리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들처럼 환경의 부산물이었던 것입니다.”(장 크로미에, ‘체 게바라 평전’)

    그를 바꾼 것은 여행이다. 그는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한다. 그 여행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그의 꿈은 의사에서 혁명가로 바뀐다.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의사로서 나는 빈곤과 기아, 질병을 목격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일이 우리 아메리카의 기층 민중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현실임을 바라봐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의학상의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민중을 직접 돕는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장 크로미에, 앞의 책)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쿠바에서 혁명의 영웅이 되었고,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죽었다. 그에게 영달과 권세는 지겨운 것들이었다. 그는 항상 혁명의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런 현실에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이라는 존재로 하여 혁명가는 행복을 느낀다. 적은 근본적인 변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창출한다.”(장 크로미에, 앞의 책)라고 말한다. 누군가 불의와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그도 함께 아팠다. 그는 혁명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이 그로 하여금 혁명가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체 게바라의 혁명

    체 게바라가 평화롭고 안정된 미래가 약속된 삶의 행로를 벗어나 거칠고 위험한 미래를 선택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 민중이 빈곤과 기아, 질병에 허덕이는 것을 목격한 뒤였다. 그가 그런 ‘인간’이 되도록 도운 것은 ‘책’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많은 책을 지치지 않고 읽는 독서가였다. 1961년 2월24일 체 게바라는 산업부 장관직에 임명되자 부르주아 거주지역에 집을 마련하고 모처럼 자신만의 서재를 꾸몄다. 그가 읽었던 책들, 그 서재를 채운 것은 어떤 책들일까?

    “약 2000권의 장서들을 그는 벽을 따라 기다랗게 늘어선 5층짜리 선반에 꽂았다. 그곳에 그는 시몬 볼리바르의 흉상을 올려놓는 걸 잊지 않았다. 책꽂이 맨 위 칸에 그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저작을 비롯하여 쿠바 역사를 다룬 책들을 꽂았다. 그 아래로는 트로츠키와 가로디의 ‘자유론’과 마오쩌둥과 중국, 그리고 19세기 쿠바혁명에 관한 저서들이 차지했다. 그 아래 칸 역시 라틴 아메리카 정치 지도자들의 저서들과 더불어 문학작품들이 도열하였다. 맨 아래 칸에는 물리학과 수학 계통의 저서들이 로맹 롤랑과 막스 폴-푸셰의 ‘프랑스 시선’, 마젤란, 에라스무스, 루이 14세, 그리고 볼리바르의 전기들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 외에 그가 자신의 흰색 소파 곁에 두고 있던 책들은 르네 뒤몽의 ‘잘못 나누어진 검은 아프리카’, 쥘르 로이의 ‘디엔 비엔 푸의 투쟁’, 허버트 마르쿠제의 ‘소련의 노멘클라투라’ 등이었다. 한편 그는 집무실에 늘 놓여 있던 마테차 잔 곁에 그의 애독서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와 두툼한 네루다의 시선집이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런 다양한 독서야말로 체라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장 크로미에, 앞의 책)

    체 게바라는 혁명가답게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를 이끈 정치지도자들의 책, 쿠바혁명에 관련된 책들을 즐겨 읽었다. 그런 도서목록은 그의 이력과 부합한다. 그가 물리학과 수학 책들, 프랑스 시와 네루다의 시들을 애독했다는 사실은 좀 의외의 일이다. 뒷날 많은 사람이 증언하고 있듯 그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교조적 관점에 갇힌 사람이 아니다. 게릴라 생활을 할 때도 그는 배낭 속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과 더불어 프로이트의 책들을 함께 갖고 다니며 읽었다. 그는 인류학과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책을 읽으며 삶과 세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 유연한 사유, 더 높은 수준의 도덕 감정으로 진화한 사람이었다.

    이타주의, 인류의 꿈

    모든 생물은 자기 생존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 원칙을 따른다. 이런 행동 원칙에 따르는 것은 그게 생명을 보존하고 제 유전자를 닮은 후손들을 퍼뜨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게 종족 보존과 번식의 숭고한 사명을 띠고 태어난 생명체의 숙명이니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수현과 체 게바라는 자기를 죽여 남을 고통과 죽음에서 해방시킨 사람들이다. 즉 이기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이타주의는 자기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한다. 이타주의(altruism)라는 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51년에 오귀스트 콩트가 처음 만들어 썼는데, 그 뿌리는 이탈리아어 ‘altrui(다른 사람)’이다. 이타적 행동은 자기 이익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행해진 행동 일반을 가리킨다. 타자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자에게 이익이 돌아온다면 그것은 엄격한 뜻에서 이타주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전우의 목숨을 살리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건 이타적 행동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자신의 생존에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게끔 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되고 후대에 전달된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반면에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행동을 하도록 촉진하는 유전자는 불가피하게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사회생물학에서 이타성에 대해 “행동하는 생물에게는 분명하게 해가 되면서, 동시에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은 또 다른 생물에게는 이익을 주는 행동”(로저 트리그, 앞의 책)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어떤 생물 개체군에서 자신의 생존 이익에 부합하는 이기적 행동을 이끄는 유전자들이 자신의 생존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도모하는 이타적 유전자보다 그 개체군을 선점하고 후대에 전해질 가능성이 보다 높아지는 게 당연할 것이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드킨스는 유전자의 층위에서 이기주의와 개체 수준의 이기주의를 분리해서 받아들인다. 그는 “개체 수준의 이타성이 유전자 수준의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일 수 있다”(리처드 도킨스, ‘무지개를 풀며’)고 말한다.

    이런 이타주의는 다른 동물에게서는 희귀하고 상대적으로 사람에게서 자주 출현하는 특질이다. 사람은 어떻게 포식자와 피식자들이 경쟁을 하는 이 지구 생태계에서 일반적인 생물학적 본성, 즉 남을 죽여 자기를 살리는 행동을 넘어서서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만이 생물학적 본성을 넘어서는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어떤 종의 개체들이 종종 저와 같은 종의 개체들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종의 생물들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데, 그게 제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이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동과 선택들이다. 이것을 사회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이것들은 저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항상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다. 다른 곤충이나 동물들에게 자기 종에 전혀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 행동과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종의 번식이라는 주어진 본성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수현과 체 게바라의 의로운 행동의 삶을 회고하며, 진정한 이타주의에 관해 생각 한다. 그들의 이타주의는 생물학적 본성론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 본성으로 모든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과 인간 본성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어떤 행동도 그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주장은 팽팽하게 맞서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생물학적 본성론으로 풀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수현은 제 조국도 아닌 일본에서 생판 모르는 한 일본인을 구하려는 행동 때문에 제 생명을 잃는다. 그는 분명 그런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자발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했다. 체 게바라는 자기를 위해 살기보다 자신도 잘 모르는 라틴 아메리카의 고통받는 민중을 위한 삶을 선택한다. 그들은 진정한 이타적 행동을 한 것이다.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장석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이타주의는 분명 인류의 유전자에 있는 형질이고, 그것은 살아남아 복제되고 진화되어야만 할 우성 형질이다. 나는 더 많은 이타주의자와 함께 살고 싶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미래의 세계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한다고 예언한다. 이타주의 인간은 더 진화된 인류의 꿈이자 꼭 와야만 할 당위적 미래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마이클 S. 가자니가 | 윤리적 뇌 | 김효은 옮김 | 바다출판사, 2009

    ● 강영안 | 타인의 얼굴 | 문학과지성사, 2005

    ● 장 크로미에 | 체 게바라 평전 |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2000

    ● 로저 트리그 |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 | 김성한 옮김 | 궁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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