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으로 나는 충분하다. 나를 떠받쳐주는 땅은, 무엇으로 나를 떠받쳐주는가를 알려고 하지 않아도 나를 떠받쳐주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모퉁이, 일상적 처신의 세계, 이 도시, 이 지역 또는 이 거리, 내가 살고 있는 이 지평, 이들이 보여주는 외모에 나는 만족한다. 이들에게 나는 폭넓은 체계 속에 설 땅을 제공하지 않는다. 나에게 설 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이들이다. 이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나는 이들을 영접한다. 나는 이 사물들의 세계를 순수한 요소처럼, 떠받쳐주는 이 없는, 실체 없는 성질처럼 즐기고 향유한다.”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여기서는 강영안의 ‘타인의 얼굴’에서 재인용)
이 향유의 개별성을 통해 우리 각자는 사람 일반에서 쪼개져서 ‘나’로서 살아간다. ‘나’와 다른 이질성을 구현하는 타자들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변환시킨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나에게 터전을 주고 나를 떠받쳐주던 세계의 이질성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타자성을 상실한다.……다른 것에 속했던 힘은, 포만(飽滿) 가운데……나의 힘, 내 자신이 된다.”(레비나스, 여기서는 강영안의 앞의 책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이수현의 죽음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마음 안의 고통을 흉내 내면서 우리 자신의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분 나쁘게. 우리는 타인의 부정적인 느낌에 감염되며 이 상태를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을 할 동기를 부여받는다.”(마이클 S. 가자니가, ‘윤리적 뇌’)
타자가 사고를 당해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도 타인의 감정 상태를 공유하며 그에 따라 반응한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다. 여러 심리학적 실험이 이 가설을 증명한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경향은 타고나는 것 같다. 신생아는 태어난 첫날 다른 신생아의 통증에 반응하여 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마이클 S. 가자니가, 앞의 책)
청년 이수현의 아름다운 행동은 분명 우리가 공유하는 계통발생론적 유산, 즉 타인의 고통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살인과 근친상간을 금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본성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섬광의 발현이다. 제 내면의 양심에서 솟구친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윤리적 명령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이타적 행위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맑고 순수한 사람이고, 남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의 실천자라는 증거다. 물론 모든 이타적 행동에는 이기적 동기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생물학자도 있지만, 청년 이수현의 이타적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