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하는 세 사람은 모두 4.5세대 인사다. 4.5세대란 중국의 부장급(장관급) 이상 인사 가운데 1945년 1월1일부터 1949년 12월31일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내년 가을에 열릴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개최되는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25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정치국 위원이나 9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다 해도, 5년 뒤인 2017년 가을에 열리는 제19차 당 대회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차세대 지도부로 거론되는 시진핑(習近平·58) 국가부주석이나 리커창(李克强·56) 국무원 부총리와 크게 다른 점이 바로 1940년대 출생자라는 점이다.
이들이 부장급 이상으로 승진한 시기는 1950년대에 출생한 5세대 지도부보다 훨씬 이르다. 두칭린(杜靑林·65) 당 중앙통전부장은 무려 13년 전인 1998년 정(正)부장급으로 승진했다. 멍젠주(孟建柱·64) 공안부장 역시 10년 전인 2001년 3월 정부장급으로 승진하면서 장시(江西)성 서기로 취임했다. 세 사람 중 나이가 가장 젊은 천더밍(陳德銘·62) 국무원 상무부장도 5년 전인 2006년 5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을 맡으면서 정부장급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당 중앙정치국 및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오를 가능성이 5세대 선두주자들보다 높은 것은 아니다. ‘신동아’ 2월호에 소개한 장바오순(張寶順·61) 안후이(安徽)성 서기와 선웨웨(沈躍躍·54)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쑹슈옌(宋秀岩·56) 중화전국부녀연합회 부주석, 자오러지(趙樂際·54) 산시(陝西)성 서기, 왕민(王珉·61) 랴오닝(遼寧)성 서기 등 공청단 출신 5인방이나, 무당파로 분류되는 장춘셴(張春賢·58)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 당위 서기 겸 신장생산건설병단 제1 정치위원, 루잔궁(盧展工·59) 허난(河南)성 당 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왕이(王毅·58) 중국 공산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의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양제츠(楊潔?·61) 국무원 외교부장 모두 이들보다 나이는 젊지만 중앙정치국 진입 가능성은 되레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이미 국무위원인 멍 공안부장을 제외한 2인은 내년 가을에 열릴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최소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지 못할 경우 은퇴해야 한다. 멍 부장 역시 승진하지 못하면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내년 가을 열리는 당 대회는 이들에게 정치적 진퇴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인 셈이다.
▼ 천·더·밍
‘쑤저우(蘇州) 발전 모델의 창시자’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 하면 중국인들이 곧바로 떠올리는 것은 ‘쑤저우 발전 모델의 창시자’라는 별명이다. 자칫 잘못하면 실패할 뻔했던 쑤저우공업원구를 그는 연간 무역액 500억달러가 넘는 최첨단 기술공업단지로 바꿔놓았다.
쑤저우시는 1992년 서부에 국가급 개발구를 설치했다. 이어 1994년 5월부터는 싱가포르 정부와 합작으로 동부에 쑤저우공업원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시에 2개의 개발구가 존재하다 보니 기업과 자금의 유치경쟁이 불붙었고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되자 싱가포르는 1997년 12월 철수를 선언했다.
당시 쑤저우시장이던 천더밍은 양측의 협상이 1년을 끌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접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천 부장의 집요하고도 저돌적인 담판 자세에 싱가포르는 결국 철수 의사를 접었고, 매년 40%가 넘는 성장을 거듭한 끝에 쑤저우공업원구는 이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6000달러가 넘는 개발구로 발전했다. 그는 쑤저우공업원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쑤저우시 당 서기이면서 동시에 쑤저우공업원구 당 서기와 중신(中新·중국과 싱가포르)쑤저우공업원구개발유한공사 이사장을 1년6개월가량 직접 맡기도 했다.
하지만 쑤저우공업원구가 유명해진 이유는 눈부신 경제성장률이 아니다. 바로 친상(親商), 애상(愛商), 부상(富商)이라는 친(親) 기업적 3상 서비스 정신과 전혀 중국 관리 같지 않은 쑤저우시 공무원들의 행정서비스 때문이다.
싱가포르와의 협상 과정에서 싱가포르 행정제도의 우수성을 깨달은 천 부장은 쑤저우시는 물론 산하 현(縣)의 주요 간부들까지 모두 싱가포르로 보내 직접 체험하고 배우게 했다. 그는 후일 당시를 회고하며 이같이 자평했다.
“국가 간 합작은 어느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쑤저우공업원구 개발을 통해 싱가포르의 선진적인 행정관리 제도와 서비스 정신을 배웠습니다. 정부 차원, 특히 인재 배양 차원에서의 협력은 일찍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경제가 가장 발달한 동부 연해지역인 장쑤(江蘇)성에서 21년 남짓 일했던 그는 2002년 5월 중국 서부인 산시(陝西)성의 상무부(副)성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부의 성공 경험을 서부로 확산시키라는 중앙 지도부의 의도가 담긴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동부의 경험을 그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산시는 쑤저우와 달리 자원과 과학교육, 지리적 위치에 따른 경쟁력이 있었고 이를 잘 살리는 게 중요했다. 그가 동부 경험 중 가장 강조한 것은 관리들의 대민 서비스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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