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일찍 입신했으나 50년대생에 쫓기게 된 4.5세대 3인의 운명은?

  • 하종대│동아일보 사회부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1-03-23 09: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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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더밍 상무부장
    • 멍젠주 공안부장
    • 두칭린 당 중앙통전부장
    이번에 소개하는 세 사람은 모두 4.5세대 인사다. 4.5세대란 중국의 부장급(장관급) 이상 인사 가운데 1945년 1월1일부터 1949년 12월31일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내년 가을에 열릴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개최되는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25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정치국 위원이나 9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다 해도, 5년 뒤인 2017년 가을에 열리는 제19차 당 대회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차세대 지도부로 거론되는 시진핑(習近平·58) 국가부주석이나 리커창(李克强·56) 국무원 부총리와 크게 다른 점이 바로 1940년대 출생자라는 점이다.

    이들이 부장급 이상으로 승진한 시기는 1950년대에 출생한 5세대 지도부보다 훨씬 이르다. 두칭린(杜靑林·65) 당 중앙통전부장은 무려 13년 전인 1998년 정(正)부장급으로 승진했다. 멍젠주(孟建柱·64) 공안부장 역시 10년 전인 2001년 3월 정부장급으로 승진하면서 장시(江西)성 서기로 취임했다. 세 사람 중 나이가 가장 젊은 천더밍(陳德銘·62) 국무원 상무부장도 5년 전인 2006년 5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을 맡으면서 정부장급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당 중앙정치국 및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오를 가능성이 5세대 선두주자들보다 높은 것은 아니다. ‘신동아’ 2월호에 소개한 장바오순(張寶順·61) 안후이(安徽)성 서기와 선웨웨(沈躍躍·54)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쑹슈옌(宋秀岩·56) 중화전국부녀연합회 부주석, 자오러지(趙樂際·54) 산시(陝西)성 서기, 왕민(王珉·61) 랴오닝(遼寧)성 서기 등 공청단 출신 5인방이나, 무당파로 분류되는 장춘셴(張春賢·58)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 당위 서기 겸 신장생산건설병단 제1 정치위원, 루잔궁(盧展工·59) 허난(河南)성 당 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왕이(王毅·58) 중국 공산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의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양제츠(楊潔?·61) 국무원 외교부장 모두 이들보다 나이는 젊지만 중앙정치국 진입 가능성은 되레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이미 국무위원인 멍 공안부장을 제외한 2인은 내년 가을에 열릴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최소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지 못할 경우 은퇴해야 한다. 멍 부장 역시 승진하지 못하면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내년 가을 열리는 당 대회는 이들에게 정치적 진퇴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인 셈이다.

    ▼ 천·더·밍



    ‘쑤저우(蘇州) 발전 모델의 창시자’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 하면 중국인들이 곧바로 떠올리는 것은 ‘쑤저우 발전 모델의 창시자’라는 별명이다. 자칫 잘못하면 실패할 뻔했던 쑤저우공업원구를 그는 연간 무역액 500억달러가 넘는 최첨단 기술공업단지로 바꿔놓았다.

    쑤저우시는 1992년 서부에 국가급 개발구를 설치했다. 이어 1994년 5월부터는 싱가포르 정부와 합작으로 동부에 쑤저우공업원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시에 2개의 개발구가 존재하다 보니 기업과 자금의 유치경쟁이 불붙었고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되자 싱가포르는 1997년 12월 철수를 선언했다.

    당시 쑤저우시장이던 천더밍은 양측의 협상이 1년을 끌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접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천 부장의 집요하고도 저돌적인 담판 자세에 싱가포르는 결국 철수 의사를 접었고, 매년 40%가 넘는 성장을 거듭한 끝에 쑤저우공업원구는 이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6000달러가 넘는 개발구로 발전했다. 그는 쑤저우공업원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쑤저우시 당 서기이면서 동시에 쑤저우공업원구 당 서기와 중신(中新·중국과 싱가포르)쑤저우공업원구개발유한공사 이사장을 1년6개월가량 직접 맡기도 했다.

    하지만 쑤저우공업원구가 유명해진 이유는 눈부신 경제성장률이 아니다. 바로 친상(親商), 애상(愛商), 부상(富商)이라는 친(親) 기업적 3상 서비스 정신과 전혀 중국 관리 같지 않은 쑤저우시 공무원들의 행정서비스 때문이다.

    싱가포르와의 협상 과정에서 싱가포르 행정제도의 우수성을 깨달은 천 부장은 쑤저우시는 물론 산하 현(縣)의 주요 간부들까지 모두 싱가포르로 보내 직접 체험하고 배우게 했다. 그는 후일 당시를 회고하며 이같이 자평했다.

    “국가 간 합작은 어느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쑤저우공업원구 개발을 통해 싱가포르의 선진적인 행정관리 제도와 서비스 정신을 배웠습니다. 정부 차원, 특히 인재 배양 차원에서의 협력은 일찍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경제가 가장 발달한 동부 연해지역인 장쑤(江蘇)성에서 21년 남짓 일했던 그는 2002년 5월 중국 서부인 산시(陝西)성의 상무부(副)성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부의 성공 경험을 서부로 확산시키라는 중앙 지도부의 의도가 담긴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동부의 경험을 그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산시는 쑤저우와 달리 자원과 과학교육, 지리적 위치에 따른 경쟁력이 있었고 이를 잘 살리는 게 중요했다. 그가 동부 경험 중 가장 강조한 것은 관리들의 대민 서비스 정신이었다.

    “정부는 주민들이 스스로 생활을 개선하고 기업을 일으키며 수입을 늘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주민들이 정부를 향해 손을 벌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산시성 관리들에게 이같이 강조했다.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정부의 투명도를 높이는 일도 병행했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본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는 2006년 5월 시안(西安)에 2억5000만달러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설립했다. 영국의 엔진 생산 업체인 커민스는 2005년 12월 산시(陝西)자동차그룹과 합작으로 산시성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했다.

    1949년 3월 상하이(上海)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무선전파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고교를 졸업할 때는 스스로 TV를 조립할 정도였다. 지금도 집에서 쓰는 가전제품이 망가지면 스스로 고친다. 고치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평소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도 있다는 게 천 부장의 설명이다.

    대도시에서 평안한 생활을 누리던 그에게 천지개벽과 같은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문화대혁명 때문이었다. 1968년 12월22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지식청년은 농촌에 가서 빈한한 농민으로부터 재교육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이듬해 그는 다른 267만명의 청년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산간 오지인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현 셰팡(謝坊)진으로 하방됐다.

    매일 농민들과 함께 일했지만 항상 쪼들리고 배고픈 삶에 밤에는 몰래 오이를 훔쳐 먹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쿵이지(孔乙己)처럼 “책을 훔치는 것은 절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5년간 농사일을 하던 그는 1974년 장시 공산주의노동대학(현 장시 농업대학) 농기계과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뒤 장시성 농기국에 배치됐다. 그의 관운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11월 장쑤(江蘇)성 식품공사로 배치되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거의 2년을 넘기지 않고 계속 승진할 정도로 순조롭게 달렸다.

    1988년에는 난징(南京)대 국제상학원에서 수량경제 석사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일과 공부를 함께 하기가 어려웠을 무렵 그의 지도교수인 저우싼둬(周三多) 교수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난징대 중미문화센터에서 매일 외국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영어실력이 부쩍 는 것도 이 기간이었다. 1996년 그는 관리학 박사까지 취득하며 몇 안 되는 박사 관원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는 일할 땐 집중하지만 근무시간이 끝나면 홀로 자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산시 성장 시절에도 주말만 되면 부인과 함께 조용히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이 같은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서양 물을 제대로 먹은 중국 관리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역시 조만간 일과 휴식의 조화가 일반화되는 중등 사회로 갈 것임을 감안하면 천 부장은 이런 사회에 걸맞은 중국의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인 셈이다.

    게다가 주위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원원얼야(溫文爾雅·온문이아)’, 태도가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다는 뜻으로 2007년 12월29일 국무원 상무부 수장에 임명된 천 상무부장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은 남에 대한 비판도 천 부장이 하면 ‘화풍세우(和風細雨)’같다고 한다. 산들바람과 보슬비처럼 온유하고 부드러워 상대방이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상무부장에 임명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막대한 무역흑자, 미국 유럽과의 무역 마찰, 위안화 절상, 외국자본의 M·A 등 화약내 풀풀 나는 문제들을 협상과 타협을 통해 원만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를 탈 때마다 운전사에게 “편하게 해. 물 마실래? 담배 피워도 돼. 나 상관하지 말고” 하고 말할 정도로 주위 사람에게도 아주 편안하게 대한다. 새로운 수장을 맞이한 상무부 직원들은 전임자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당 서기와 천 부장을 자주 비교한다. 나이는 같지만 성격은 판이하기 때문이다.

    천 상무부장이 2012년 가을 열릴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25명의 당 정치국 위원에 선출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화권에서 그를 정치국 위원 후보로 꼽는 학자나 언론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역시 한 명의 ‘헤이마(黑馬·다크호스·dark horse)’임에는 분명하다.

    ▼ 멍·젠·주

    상하이서 32년 근무한 토박이 상하이방(上海幇)

    일찍 입신했으나 50년대생에 쫓기게 된 4.5세대 3인의 운명은?

    2월15일 북한을 방문한 중국 국무위원 멍젠주 공안부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중국에서 가져온 선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김 위원장 뒤쪽에 3남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보인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멍젠주를 주저앉혀라(要想富, 留住孟建柱).” 2004년 초부터 장시(江西)성 주민들 사이에서 나돌기 시작한 말이다. 이들이 2007년 10월 공안부장에 임명된 멍젠주 전 장시성 당 서기를 계속 붙잡으려 했던 이유는 그가 성 발전에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멍 서기가 부임한 2001년 장시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221위안. 산시(山西),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등 중부 굴기 6개 성 가운데 꼴찌였다. 하지만 2006년의 장시성 1인당 GDP는 1만798위안으로 그가 당 서기를 역임한 지 5년 만에 두 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처럼 단기간에 GDP가 크게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농촌과 동부지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끈질긴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시성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3개월 만에 장시성의 60개 현 2만5000리(약 1만2500㎞)를 돌며 성내 시찰에 나섰다. 2005년 3월까지 성내 99개 현과 시, 구를 모두 직접 누볐다. 상하이에서 32년 이상 근무한 경험을 살려 상하이는 물론 창장(長江), 주장(珠江) 지역과 푸젠(福建)성 등 인근 동부 성과도 협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 후반 후베이성의 발전을 위해 샤전쿤(夏振坤) 화중(華中)과기대 교수가 제기한 ‘중부굴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후일 “중부굴기는 장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써먹은 말”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고졸 학력의 멍 서기는 당초 상하이 창싱(長興) 섬의 전위(前衛)농장에서 경운기를 모는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하지만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해 1986년 경제관리통신대학을 졸업했고 이어 1991년엔 상하이기계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벼슬길에서도 타고난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13년 만에 농장의 농장장으로 올라섰고, 농장을 우연히 견학했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당시 상하이 시 조직부장)의 눈에 들어 상하이 인근 촨사(川沙)현 서기로 발탁되면서 출세길에 들어섰다.

    1996년 10월 상하이시 부서기까지 올라간 그는 2001년 3월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의 출범을 앞두고 지도부 개편과정에서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 서기(2006년 9월 비리 혐의가 적발돼 구속 수감)에게 밀려 장시성 서기로 전보됐다. 하지만 쩡 부주석은 지난해 10월 지도부에서 물러나면서 ‘상하이방(上海幇) 주자’ 중 한 명인 그를 잊지 않았고 공안부장에 추천해 결국 관철했다.

    그가 전혀 경험이 없는 공안 수장에 임명되자 홍콩 언론들은 후 주석이 검찰과 법원, 공안으로 이뤄진 사법부 전체 권한에서 공안 부문을 억제하기 위한 카드가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전임자인 저우융캉(周永康) 공안부장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일 뿐 아니라 중앙서기처 서기, 중국 공산당 정법위원회 서기, 국무위원 등 당정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이나 최고인민법원 법원장보다도 직위가 높았다. 멍 부장 역시 2008년 3월 부총리급인 국무위원에 임명됐다는 점에서 여전히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이나 최고인민법원 법원장보다 높다.

    200만 경찰을 이끄는 공안 수장에 임명된 뒤 2008년 8월 열린 베이징(北京) 올림픽과 중동의 민주화 바람 속에서도 일부 젊은이들의 민주화 열망을 잘 ‘관리’해온 그가 내년 가을 최소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공안부장 전임자로 내년 가을 물러날 저우융캉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대신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저우 상무위원이 맡고 있는 중앙정법위원회 서기까지 거머쥘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 두·칭·린

    지린(吉林)성의 공청단 대표주자

    두칭린 중국 공산당 중앙통전부(중앙통일전선부) 부장은 리더주(李德洙·68) 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및 두쉐팡(杜學芳·62·여)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상무위원 겸 중앙국가기관공위(工委) 부서기, 기율검사위원회공위 서기와 함께 지린성의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 삼두마차 중의 한 명으로 불렸던 사람이다. 두 부장은 46세이던 1992년 하이난(海南)성 부서기로 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지린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부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1982년 9월 39세의 젊은 나이에 장관급 이상의 직책에 선출될 수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올랐던 리더주 주임은 2007년 10월 열린 제17차 당 대회에서 이미 갖고 있던 중앙위원 자리마저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두쉐팡 위원 역시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에서 후보위원에 오른 뒤 이어 2007년 10월에는 중앙위원이 됐지만, 제17차 당 대회에서는 371명의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에 오르지 못하고 2213명의 당 전국대표대회 대표에 그쳤다. 당과 국가 기관이 사실상 동일시되는 중국에서 당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부장급 이상 직책을 맡지 못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제 한때의 삼두마차 가운데는 두 부장만이 독야청청 남은 셈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통전부장은 그리 잘나가는 자리는 아니다. 당 중앙조직부장이나 중앙선전부장이 모두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에 포함돼 있는 데 반해 중앙통전부장은 204명의 중앙위원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두 부장은 분명 한때 잘나가는 인사였다. 그가 장관급 이상 자리에 임명될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당선된 것은 1992년 가을로 무려 19년 전이다. 제15기 중앙위원회가 출범한 1997년부터는 제17기까지 내리 세 번 연속 중앙위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부장급 인사다. 크게 봐서는 19년간, 엄밀히 보면 14년간 제자리걸음인 셈이다.

    두 부장은 1979년부터 1984년까지 공청단 지린성 부서기 및 서기로 근무하면서 공청단 중앙위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공청단 중앙엔 현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및 제1서기가 있었다.

    후이량위(回良玉·67) 부총리와는 동향으로 지린성에서 같이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두 부장이 농업부장일 당시 후이 부총리는 농업 담당 부총리였다. 두 부장이 지린성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을 맡았을 때도 후이 부총리는 지린성 상무위원 겸 농촌정책연구실 주임과 농공업부 부장을 역임했다. 나이가 두 살 차이에 불과했던 둘은, 그러나 1990년 후이 부총리가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으로서 권력의 핵심부로 자리를 옮긴 반면 두 부장은 1992년 하이난(海南)성의 부서기로 전보되면서 크게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이 차이는 지금도 전혀 극복되지 않고 있다.

    두 부장은 부하나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또 공청단 지린성 위원회 서기일 때는 최고책임자이면서도 절대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걸어서 출퇴근했다. 농촌을 방문할 때는 농가에서 숙박을 한 뒤 꼭 숙박비와 식비를 지불했다. 농업부장으로 재직할 때는 걸어서 11층 사무실까지 다녔다. 이 때문에 농업부 간부들이 줄줄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고 한다.

    지린성 조직부 부장시절엔 ‘일추삼고(一推三考)’ 인사로 호평을 받았다. 일추삼고란 추천을 먼저 받되 일률적으로 시험을 보고 면접을 반드시 실시하며 민주적으로 평가해 간부를 선발하는 방식을 말한다. ‘관시(關係)’를 이용한 부정한 승진과 발탁에 쐐기를 박은 것. 이 과정에서 특히 학력 기준을 명시하고 연령을 엄격히 제한하는 새로운 인사 스타일을 선보였다.

    하지만 통전부장이 된 뒤 그의 스타일은 크게 변한 듯하다. 아니 그가 스스로 변했다기보다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두 부장은 2008년 초 베이징(北京)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달라이 라마와 협상을 벌였지만 시종일관 비타협적 태도를 보였다. 겉으로는 대화의 문이 크게 열려 있다면서도 시종일관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일체의 활동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고, 완전한 독립 대신 행정 분야에서의 자치만 원하는 고도자치 제안에 대해서조차 아예 대화의 여지를 닫아버렸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중국 정부와 티베트 망명정부 간의 협상은 사실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을 무력 진압하지 말고 대화에 나서라는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의 압력을 피해나가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택한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런 중국 공산당의 전술을 잘 활용해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발생한 티베트 소요 사태를 잘 마무리한 두 부장의 정치적 공적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대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공도 크다. 하지만 이미 65세인 그는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된다 해도 5년 뒤에는 나이 제한에 걸려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에게 정치국 위원 진입의 행운이 뒤따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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