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자의 평상복 등을 통해 궁중 의상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전문가들은 1999년 방송된 MBC 드라마 ‘허준’을 새로운 사극 의상의 등장을 알린 작품으로 꼽는다. 기존의 사극이 조선시대 궁중 정치를 주로 다루던 것과 달리, ‘허준’은 전문직업인과 서민들의 삶을 극의 중심에 놓았다. 그들 나름의 삶과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의상도 다양해졌다. ‘허준’ 의상을 디자인한 이혜란 MBC 미술센터 차장은 “그전까지 사극 의상은 관복 일색이라 붉은색 등 원색을 주로 썼다. 서민 옷은 모두 흰색이었다. 그러나 ‘허준’ 때부터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옷에 반영되기 시작했고, 파스텔톤 일상복 등 개성 있는 의상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요즘 사극 의상은 백화제방 시기를 맞고 있다. 신진 한복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소재와 색상을 이용해 자신의 디자인 창의성을 뽐내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국내외 패션쇼를 열거나 화보집을 발간하며 ‘스타’로 부상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액의 스폰서십으로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사들이는 한복 제작자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한복 디자이너 가운데 일부는 의상 디자인에 관여하지 않고 의상 제작이나 자금 지원만 하면서 디자이너 행세를 한다는 게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극 제작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자 유치를 원하는 제작사와 방송을 이용해 자사를 홍보하려는 한복 업체가 결탁해 생긴 일”이라며 “진짜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는 베일 뒤에 숨고 업체 관계자가 전면에 나서는 일이 빈번하다”고 전했다.
“내 옷을 내 옷이라 하지 못하고…”
“분명히 제가 디자인하고, 원단 정하고, 도면 작업까지 해서 넘겼어요. 그분은 재봉만 했죠. 그런데 언론에 대고 ‘내 작품’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더군요. 드라마가 뜬 뒤엔 제 옷 들고 당신 이름으로 패션쇼도 열었어요. 제가 디자인한 거 뻔히 알면서 이러시면 되냐고 따졌더니 제작사랑 얘기 다 끝났다고, 할 얘기 있으면 거기 가서 하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습니다.”
화려한 의상으로 화제를 모은 한 사극의 의상을 담당한 양모씨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고 분하다”고 했다. 영화 의상을 주로 맡아왔던 양씨는 “드라마 제작자가 의상비 때문에 스폰서가 필요하다며 그분을 소개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라마가 끝날 때 올라가는 자막에는 분명 내 이름이 의상 담당자로 적혀 있다. 그 업체 이름은 ‘한복협찬’이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협찬사 대표가 디자인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내 작품을 통째로 도둑맞은 심정”이라고 했다. 협찬사 대표는 ‘OOO 한복’ 식으로 작품 주인공의 이름을 단 의상을 만들어 예복과 웨딩화보 촬영용 등으로 판매도 했다.
양씨가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이유는 “까다롭다고 소문나면 다시는 드라마 의상 일을 맡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주위의 충고 때문. 또 “당신이 영화를 주로 해서 모르는 거지, 방송계에선 스폰서가 디자이너인 양 행세하는 게 흔한 일”이라는 설명도 들었다고 했다.
‘태왕사신기’ ‘연개소문’ 등의 의상을 디자인한 이혜련 SBS아트텍 부장도 이런 관행을 인정한다. 그는 “연기자들이 스스로 옷을 준비하는 현대극과 달리 의상을 모두 자체 제작해야 하는 사극은 비용 부담이 크다. 괜찮은 스폰서가 원단과 제작비를 지원해주면 디자이너가 마음먹은 대로 예쁜 옷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갈 때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