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뜨는 사극, 속 끓는 디자이너

거액 스폰서 디자이너 행세, 우후죽순 카피·표절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1-03-23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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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와 스크린에 사극 열풍이 불면서 새로운 한복 디자인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 현대적인 색상과 색다른 소재를 활용하는 디자이너들이 작품의 인기를 발판 삼아 ‘스타’로 부상한 경우도 많다.
    • 하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지 않은 채 마케팅에만 열을 올린다는 뒷얘기가 나온다.
    • 사극 전성시대의 그림자를 취재했다.
    뜨는 사극, 속 끓는 디자이너

    왕자의 평상복 등을 통해 궁중 의상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속살이 비치는 검은색 망사 저고리와 화려한 붉은 패턴으로 장식된 치마.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한지민이 선보인 한복 맵시는 ‘사극 의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파격으로 화제를 모았다. 개봉 두 달 만에 관객 수 500만명을 돌파한 이 영화는 상반기 중 미국·캐나다 스크린에도 상륙할 예정이다. 앞서 세계 시장에 수출된 ‘대장금’ ‘태왕사신기’ ‘성균관스캔들’ 등 이른바 ‘한류 드라마’의 공통점도 세련된 의상. 이들 작품에 등장한 한복은 현대적인 색상과 디자인으로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며 한복 시장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전문가들은 1999년 방송된 MBC 드라마 ‘허준’을 새로운 사극 의상의 등장을 알린 작품으로 꼽는다. 기존의 사극이 조선시대 궁중 정치를 주로 다루던 것과 달리, ‘허준’은 전문직업인과 서민들의 삶을 극의 중심에 놓았다. 그들 나름의 삶과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의상도 다양해졌다. ‘허준’ 의상을 디자인한 이혜란 MBC 미술센터 차장은 “그전까지 사극 의상은 관복 일색이라 붉은색 등 원색을 주로 썼다. 서민 옷은 모두 흰색이었다. 그러나 ‘허준’ 때부터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옷에 반영되기 시작했고, 파스텔톤 일상복 등 개성 있는 의상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요즘 사극 의상은 백화제방 시기를 맞고 있다. 신진 한복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소재와 색상을 이용해 자신의 디자인 창의성을 뽐내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국내외 패션쇼를 열거나 화보집을 발간하며 ‘스타’로 부상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액의 스폰서십으로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사들이는 한복 제작자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한복 디자이너 가운데 일부는 의상 디자인에 관여하지 않고 의상 제작이나 자금 지원만 하면서 디자이너 행세를 한다는 게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극 제작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자 유치를 원하는 제작사와 방송을 이용해 자사를 홍보하려는 한복 업체가 결탁해 생긴 일”이라며 “진짜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는 베일 뒤에 숨고 업체 관계자가 전면에 나서는 일이 빈번하다”고 전했다.

    “내 옷을 내 옷이라 하지 못하고…”



    “분명히 제가 디자인하고, 원단 정하고, 도면 작업까지 해서 넘겼어요. 그분은 재봉만 했죠. 그런데 언론에 대고 ‘내 작품’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더군요. 드라마가 뜬 뒤엔 제 옷 들고 당신 이름으로 패션쇼도 열었어요. 제가 디자인한 거 뻔히 알면서 이러시면 되냐고 따졌더니 제작사랑 얘기 다 끝났다고, 할 얘기 있으면 거기 가서 하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습니다.”

    화려한 의상으로 화제를 모은 한 사극의 의상을 담당한 양모씨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고 분하다”고 했다. 영화 의상을 주로 맡아왔던 양씨는 “드라마 제작자가 의상비 때문에 스폰서가 필요하다며 그분을 소개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라마가 끝날 때 올라가는 자막에는 분명 내 이름이 의상 담당자로 적혀 있다. 그 업체 이름은 ‘한복협찬’이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협찬사 대표가 디자인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내 작품을 통째로 도둑맞은 심정”이라고 했다. 협찬사 대표는 ‘OOO 한복’ 식으로 작품 주인공의 이름을 단 의상을 만들어 예복과 웨딩화보 촬영용 등으로 판매도 했다.

    양씨가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이유는 “까다롭다고 소문나면 다시는 드라마 의상 일을 맡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주위의 충고 때문. 또 “당신이 영화를 주로 해서 모르는 거지, 방송계에선 스폰서가 디자이너인 양 행세하는 게 흔한 일”이라는 설명도 들었다고 했다.

    ‘태왕사신기’ ‘연개소문’ 등의 의상을 디자인한 이혜련 SBS아트텍 부장도 이런 관행을 인정한다. 그는 “연기자들이 스스로 옷을 준비하는 현대극과 달리 의상을 모두 자체 제작해야 하는 사극은 비용 부담이 크다. 괜찮은 스폰서가 원단과 제작비를 지원해주면 디자이너가 마음먹은 대로 예쁜 옷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갈 때가 있다”고 했다.

    뜨는 사극, 속 끓는 디자이너

    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을 일으킨 사극 ‘대장금’의 한장면.

    드라마가 한류 상품으로 부상하고 시각적인 요소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작품 속 의상은 점점 화려해지고 있다. 2005년 방영된 SBS ‘서동요’를 시작으로 2006년 ‘주몽’ ‘연개소문’, 2007년 ‘태왕사신기’ 등이 고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의상 제작비는 더욱 늘었다. ‘주몽’에서 주인공 송일국이 입은 대례복의 제작비는 벌당 1000만원대에 달한다.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의상을 담당한 이진희 ‘옛의상스튜디오’ 대표는 “수준 높은 의상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든다. 우리 드라마의 경우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는데도 정조의 곤룡포 한 벌을 제작하는 데 700만~800만원씩 들었다”고 밝혔다. 이 의상의 어깨 부분에 들어간 자수는 국빈들의 의상을 짓는 업체에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이 대표는 “제작비가 충분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시도를 하겠느냐”고 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사극의 의상제작비는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십수억원에 달한다. 문제는 사극의 경우 PPL(간접광고) 등을 통한 제작비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드라마가 성공하면 가장 주목을 받게 되는 한복 업체 정도를 제외하고는 협찬사를 구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정도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한복 업체도 제한적이다.

    무대 아래 선 디자이너

    그렇다보니 제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스폰서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도 많다. 이혜란 차장은 “한번은 드라마 방영 도중 협찬사가 드라마 의상을 활용한 한복 패션쇼를 하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방송 일정이 빠듯했지만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쇼를 해야 홍보 효과가 크다는 협찬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제작 일정을 조정해 의상을 빌려줬다”고 했다. 협찬사 대표는 1부에는 그들이 디자인한 판매용 한복을 올리고 2부 무대에는 드라마 의상을 소개하는 식으로 쇼를 구별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들이 해당 사극의 디자인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밝히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쇼가 끝나자 대표가 무대에 올라 디자이너 자격으로 인사했다. 이 차장은 “내가 디자이너인데 무대 아래서 바라보고 있다는 게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방송 기간이 아직 몇 달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협찬을 중단할까봐 제대로 항의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날 이후 여러 언론에는 ‘OOO 드라마 의상을 디자인한 OOO 디자이너’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협찬사는 지금까지도 이 경력을 마케팅에 이용하고 있다. 또 다른 디자이너도 “협찬사 대표의 일방적인 패션쇼 홍보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향후에도 계속 사극을 제작해야 하는 제작사와 소속 디자이너들은 해당 협찬사의 협조를 또 받아야 하기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다.

    사극의 의상 협찬사는 대부분 일상 한복 분야에서 기반을 다져온 업체들. 디자이너가 대표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들이 다른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않고 직접 의상을 디자인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현장 디자이너들은 “일반적인 한복 디자이너가 사극 의상을 디자인하는 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디자이너는 “영화·드라마 의상은 스토리와 연출자의 의도, 조명과 무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만들어진다. 소재에 따라 조명 흡수율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샘플을 만들어 테스트해보고, 여러 스태프가 모여 의견을 조율하는 단계도 거친다. 일반 디자이너들이 전적으로 사극 디자인에만 매달린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양씨는 “최근 사극 의상이 주목받는 이유가 기존에 있던 한복과 전혀 다른 독착성 때문 아니냐”며 “전통 한복을 오래 디자인해온 디자이너들은 그런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저는 지금까지 한복에 사용된 적 없는 새로운 소재를 많이 썼어요. 주인공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원단에 화려한 꽃무늬 패턴 같은 것도 넣었습니다. 기존 디자인에 익숙한 협찬사 대표가 처음엔 ‘천박하게 이런 걸 만들라고 한다’며 싫어할 정도였죠.”

    “정구호도 표절당한다”

    독창성이 부족한 대신 한복 업체는 전통 한복 디자인과 바느질 쪽에 특기를 갖고 있다. 현재 방송 중인 KBS 근초고왕 의상 제작 업체의 경우 홈페이지를 통해 “디자인은 KBS아트비전 이민정씨가 했고, 저작권은 KBS에 있으며, 제작은 유경패션이 했다”라고 공지했다. 이렇게 서로 역할을 인정하고 업무를 분담하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드문 편이다. 한 한복 디자이너는 “요즘 한복 숍 매출의 90%는 결혼산업과 관련돼 있다. 젊은 소비자들이 예복이나 웨딩화보 촬영용으로 한복을 구입하기 때문에 ‘누구 디자인’이냐는 것에 민감하다. ‘어느 드라마 의상을 만든 디자이너 작품’이라고 소문나면 매출이 크게 느는데, 그런 부가 효과를 얻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디자이너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 환경이다 보니 특정 디자이너가 만든 창의적인 디자인이 다른 디자이너에 의해 도용되는 사례도 일어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영화 ‘스캔들’ ‘황진이’ 등의 의상을 맡아 새로운 스타일의 한복을 선보인 정구호 제일모직 전무는 2006년 한 패션잡지와 함께 한복 화보를 진행한 적이 있다.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가 오직 이 매체만을 위해 만든 한복’이라는 설명과 함께 공개된 의상은 기존 한복의 틀을 깨는 디자인과 참신한 소재 사용으로 패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문제는 이 중 ‘서양 옷에 쓰이는 프린트, 선홍색 꽃무늬의 실크 레이스를 이용해 만든 저고리와 붉은 레이스 치마가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설명이 붙은 한복과 ‘전체 은박을 장식한 저고리와 플리츠스커트를 덧입은 치마의 모던한 조합. 과감한 은박 프린트와 질감이 다른 스커트를 풍성하게 레이어링한 새로운 시도가 신선하다’는 설명이 붙은 다른 한복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적으로 유사한 의상이 이후 방송된 한 사극에 등장했다는 점. 이 때문에 한때 해당 드라마 의상 제작에 정구호 디자이너가 참여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의상 협찬사 대표가 자사 홈페이지와 화보집 등을 통해 이 의상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소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정 전무는 “해당 디자이너가 화보에 공개한 한복 디자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사실은 사실이다. 나중에 해당 방송사 PD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고 답했다. “디자인 저작권을 침해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내가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한복 디자이너가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이혜련 부장은 “디자인 표절은 참 다투기 힘든 주제다. 2000년쯤 한 드라마 의상을 제작한 뒤 저작권 등록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모든 디자인을 그대로 본뜬 뒤 소매 끝부분을 좀 바꾸거나 색깔만 미세하게 달리 해도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난다더라. 굳이 힘들게 등록할 필요가 있나 싶어 그 뒤부터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디자인권 등록, 계약서 명기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젊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의상 디자인 분야를 떠날 수 있다는 점. 이진희 대표는 “10여 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많이 상처 입고 좌절도 겪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업계 사정을 다 알려주면 과연 후배들이 이쪽 일을 시작할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MBC미술센터는 그 일환으로 드라마 의상디자인을 특허청에 등록하기 시작했다. ‘이산’ ‘돌아온 일지매’ ‘선덕여왕’ 등의 작품에서 인기를 모은 의상 17건을 등록한 상태다.

    MBC미술센터 이기화 총무팀장은 “요즘은 드라마가 뮤지컬이나 연극 등으로 제작되고, 주인공을 형상화한 캐릭터가 제작되는 등 의상의 콘텐츠 활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소속 디자이너의 디자인 저작권을 보호받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들 드라마 의상을 디자인한 이혜란 차장은 “‘이산’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에서 왕이나 왕자가 입는 옷은 붉은색 곤룡포와 잠옷뿐이었다. 세손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하면서 집무복이나 일상복을 새롭게 디자인해보고 싶어서 흑룡포에 은색 수를 놓은 의상을 만들었는데 이후 여러 업체에서 카피해 신랑의 한복 화보 촬영용 의상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저작권을 주장한 적은 없다. 아직 그럴 만한 환경이 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작권 전문가인 홍승기 변호사는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드라마 스태프 중 작가나 음악감독 정도만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미국·영국 등에서는 의상 디자이너도 디자인료와 별도로 저작권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우리도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애초에 계약을 맺을 때 디자인을 2차적으로 활용할 경우 수익 분배 등에 대한 내용을 명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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