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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 명사의 버킷 리스트

심영섭 영화평론가 · 대구사이버대 교수

딸아이와 빈둥거리기 · 아줌마 야구단 창단

심영섭 영화평론가 ·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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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버킷 리스트. 도끼 주워 얻은 세 가지 소원이든 삼신할머니의 치매로 얻은 행운이든 죽기 전에 이룰 수 있는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동네 아줌마 야구단을 창단하고 싶다. 사실 나는 대학 때 홍일점 야구 선수였다. 포지션은 포수. 야구가 좋았다. 물론 연애하던 첫사랑 ‘머스매’가 야구단에 있긴 있었다.

사람들은 야구를 힘으로 하는 줄 알지만, 축구에 비해 야구는 오히려 여자들이 하기 좋은 측면이 있다. 일단 공격을 매번 하는 것이 아니라 쉴 기회가 많다. 게다가 포지션이 있어서 축구처럼 많이 뛸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도 야구공이 배트의 한가운데 좌악 맞아 흰 빨랫줄처럼 운동장 한가운데로 죽 뻗어나갈 때, 그 놀라움은 해본 사람만 안다. 그건 생의 최절정으로 가는 하얀 포물선의 축제다. 그 손맛이 정말 그립다.

사실 1980년대 학번으로 야구반 선수를 하기 쉽지 않았다. 키 150cm가 겨우 넘는 내가 야구 방망이를 들고 연습한다고 하면, 남자애들은 실실 웃거나 공을 살살 던졌다. 어떤 애들은 만약 계속 그렇게 야구를 하다간 ‘쓰리랑 부부’의 개그우먼 김미화처럼 일자 눈썹이 생길 거라고도 위협했다. 나는 그 모든 비웃음에도 소프트볼 반으로 가진 않았다. 나는 극심한 ‘운동권’이었으니까.

영화 ‘그들만의 리그’를 보니 거기에 내 꿈과 똑같은 지문을 가진 여자가 무수함을 목도하고 놀란 적이 있다. 전쟁통에 남자들이 야구장을 떠나자 메이저 리그를 대신 했던 멋진 그녀들. 난 들의 빈 볼[野球], 야구가 하고 싶었다. 아니 하고 싶다. 다시 한번 손에 글러브를 매고, 먼지 풀풀 나는 운동장에서 ‘울울창창’ 고함지르며 금속 배트를 휘두르고 싶다. 오호. 배트맨 대신 ‘배트걸’. 그렇게 불려도 아줌마 야구단의 뜻을 꺾진 못하리.

그렇다 나의 버킷 리스트. 물론 죽기 전에 안젤리나 졸리와 수다 떨며 브래드 오빠를 어떻게 꼬드겼는지, 수학여행에서 갓 돌아온 것 같은 제니퍼 애니스톤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물어보며 반나절을 보내고 싶기도 하다. 와인을 좋아하니 성긴 자갈길을 걸으며 보르도 와인 투어도 가고 싶다. 그러나 안젤리나 졸리보다 딸과 한 달 더 있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보르도 와인 투어 대신 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가장 깊은 이과수와 가장 높은 히말라야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쪽을 택할 것이다. 깊고 높은 곳을 찾고, 직선으로 날아가는 야구공을 사랑하는 나는 본시 직선형의 사람이다. 그 깊은 직선의 소망이 내 삶을 이끌었다. 늘 자연 앞의 경이로움이 신에게 한발 더 가까이 가게 만들었다.



이 세 가지의 소원. 간단한 그러나 결코 간단하지 않은 바람이 나의 버킷 리스트다. 이 세 가지 버킷 리스트를 다 이루고 나면, 영화 ‘버킷 리스트’ 카터의 대사처럼 “또 누구는 인생이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도 하지. 하지만 나한테 생은 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느냐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만의 버킷 리스트가 완성되는 날, 내 인생은 날 알아준 사람이 있었던 행복한 소풍이 되리라. 이 뽀얀 봄날 훌쩍 이과수로 떠날까. 인터넷에 아줌마 야구단 아니 결국엔 할머니 야구단 모집 광고라도 내볼까. 아니면 잠든 딸아이의 볼을 비비며, 이대로도 행복하다고 마음을 쓸어볼까. 꿈이 지속되는 한, 그것은 현실이다. 빅토르 위고의 말대로 죽는 것과 살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쁘겠는가. 버킷 리스트가 있는 한 내 인생도 살만하게 흘러갈 것이다. 인생을 믿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의 최종적인 버킷 리스트의 버킷 리스트이기도 할 터이므로.

신동아 201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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