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아버지와의 대화

  • 입력2011-03-25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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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김동연<br>●1957년 충북 음성 출생<br>●덕수상고, 국제대,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br>●기획예산처 산업재정단장 재정정책국장<br>●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국정과제비서관

    항상 꿈을 꾸었다. 그 많던 꿈 중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그래서 더욱 절실한 꿈이 하나 있었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버킷 리스트 중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꿈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아버지는 서른셋 젊은 나이에, 당신보다 한 살 어린 젊은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장남이었고 열한 살이었다. 사업을 제법 크게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살던 큰 집에서 쫓기듯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으로 이사했다. 그 판잣집은 몇 년 뒤 강제 철거돼 우리 가족은 구 성남 지역으로 강제이주하게 됐고 한동안 천막에서 살아야만 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다. 학업은 물론 때로는 끼니도 걱정이었다. 나는 인문계 고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가정 형편상 상업고교에 진학했고 졸업하기 몇 달 전부터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은행에 취직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어렵게 공부하고 일찍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비교적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철이 들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 가슴에 사무친 꿈 하나는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단 하루, 아버지와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내 수명을 일 년쯤 단축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중에 이 꿈에 대한 기도를 수십 년 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소망이 너무도 간절해서 이 생각을 할 때마다 항상 코끝이 찡했다.

    만약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젊디젊은 아내와 자식 넷을 두고 그리 빨리 가셨냐고, 장남인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냐고, 제 좁은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얹어서 힘에 겹다고, 왜 이렇게 우리 가족을 고생시키느냐고….

    한참 뒤에는 아버지가 도대체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학력이 짧지만 젊어서 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분. 어려운 사람 도와주길 좋아하셨던 분. 수해가 나면 늘 어린 나를 앞세워 모 신문사에 가서 수재의연금을 내곤 하시던 분. 고모 말씀에 따르면 혼자되신 할아버지를 어린 나이 때부터 극진히 모신 더없는 효자라는 분. 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했던 분….



    그런 그분이 어느 몹시 추운 날 등굣길에 내가 너무 추워하자 “춥지? 춥지 않게 해줄게” 하며 불러줬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본 젊은 아버지의 고민들. 그 분을 만나면 나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냐고.

    또 한참 뒤에는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해드리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직장생활 하면서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고. 은행 다니며 야간대학에도 진학했다고. 죽도록 공부해서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합격했다고.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국비와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서 박사까지 공부했다고. 자리나 승진보다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를 신조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바꾸고 싶었던, 본관(本貫)이 잘못 기재된 호적도 정정했다고. 동생 셋 모두 가정을 이루게 했다고. 늙어가는 어머니 잘 모시려고 애쓰고 있다고….

    그리고 그보다 한참 뒤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인생을 이야기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담담하게, 사는 이야기와 죽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 어떤 사진 속에서도 아버지는 나보다 20년도 더 젊다. 그 준수한 젊은 청년과 지난 이야기뿐 아니라 인생을 관조(觀照)하며 할 수 있는 이야기,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5년 되던 해 고향에 있던 산소를 이장했다. 길이 확장되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산소를 부득불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소 자리 물색 등 이장작업을 하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성을 기울였다. 주초부터 시작한 작업은 금요일에야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고 금요일 이른 오후 산소 세 기(基)를 파묘하며 유골을 수습했다. 봉분을 어느 정도 허문 뒤 일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동생과 나는 직접 손으로 땅을 파며 유골을 수습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연장으로 땅을 파다가 유골을 손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직접 손으로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작업을 다 마치고 준비한 깨끗한 상자에 유골을 모셨다. 그런데 세 분의 유골을 당일로 새로 준비한 산소에 옮겨 모시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 오후 1시에 유골을 입관하기로 했다. 그날 오후 나는 세 분의 유골을 차에 모시고 당시 내 임시 거처였던 친척 형님 댁으로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유골은 뒷자리에, 아버지 유골은 조수석에 모셨다. 나는 조금 떨어진 거처로 바로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오래 사셨던 동네와 집을 돌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주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옆에 모신 아버지 유골을 향해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 사셨던 집 쪽으로 갑니다. 25년 만이시지요. 그동안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절히 지니고 있던 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 내 수명이 일 년 단축되더라도 단 하루 아버지와 대화를 했으면 했던 꿈.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아버지는 25년 만에 햇빛을 보셨고 나는 아버지와 만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 하루 대부분 시간 내내 나는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응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던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어릴 적부터 꿈이 많았다. 젊은 시절을 비교적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어려움들은 ‘위장된 축복’이었고 그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때그때 내 처지에서는 달성하기 어려워 보였던 많은 꿈이 이루어진 것에 또한 감사한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에 새로운 한 줄을 추가했다. 나는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 몇 해 전 개인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스스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야 할 때에 대한 경구(警句)의 글이었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 비전이 없어질 때.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할 때.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할 때. 문제의 해결방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무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안(老眼)처럼 느끼게 될 때. 잘못된 정책을 국민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집하는 확신범이란 생각이 들 때.

    언제든 공직을 그만두면 나는 인생의 새 장(章)을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일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제는 오랫동안 가졌던 ‘아버지와의 대화’의 꿈을 거꾸로 가져본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식들과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 버킷 리스트의 맨 윗줄에 올린다. 나는 누구였고 무슨 꿈을 갖고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또 두 아들과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아버지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두 아들과 나누고 싶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하지 못했던 뜨거운 포옹을 이야기 끝자락마다 나누고 싶다. 아, 돌아가신 아버지도 어쩐지 그 대화의 장(場) 어디에선가 나타나실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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