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강수<br>●1945년 서울 출생<br>●서울고, 서울대 지질학과, 고려대 지질학 박사 수료<br>●캐나다 퀘벡주 캠벌광산 소장<br>●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나의 부모님은 모두 의사였다. 당연히 환자들이 붐비는 병원이 내 어린 시절 삶의 울타리였다. 남을 돕고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늘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래선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연 속에 파묻혀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서울에서 태어났는데도 숲과 들이 좋았다.
사춘기에 나는 철학에 빠졌다. 독일 니체와 덴마크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책들을 읽었다. 그때 내가 그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사상은 마음속 깊은 곳의 가려운 부분들을 긁어주는 듯했다. 고교시절 나는 대체로 공부를 잘했지만 엉뚱한 소리도 잘하고 좀 추상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다 고교 2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일의 일이다. 나는 해석 1, 2와 기하 수학 시험 세 과목만 제외하고 모든 과목을 백지로 냈다. 화학 담당이신 담임선생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나를 나무랐다.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나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양 거침없이 답했다.
“인생에서 점수가 다는 아니잖아요.”
사실 나는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 수학과 영어를 잘했고, 큰 무리 없이 대학도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고 있었던 데다 그 즈음 철학 책이 가르쳐준 ‘건방진’ 생각들 때문에 한번 엉뚱한 시도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회초리라도 휘두를 듯한 기세였던 선생님이 의외로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셨다.
“야, 주강수. 너 마음에 든다. 그리고 너희들(다른 학생들), 내가 주강수가 마음에 들어서 100점 주려는데 문교부나 교장 선생님에게 일러바칠 놈 있으면 손 들어봐.”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 그때 내 친구들은 모두 선생님의 결정을 거부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우쭐해진 나는 공부를 게을리 했다. 3학년이 되어 모의고사를 보니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다. 겨우내 공부는 하지 않고 ‘벤허’ 같은 영화나 보러 다니고 철학 한답시고 폼이나 잡았던 탓이었다. 성적이 하도 참담했던 터라 나는 스스로 정당화할 필요도 있겠고 해서 끝까지 철학이나 붙들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집으로 가다 집 근처에서 어느 스님과 마주쳤다. 그분이 내게 길을 물었다. 나는 가는 길을 가르쳐드리고 돌아서다 엉뚱한 의문이 들어 다시 스님을 불렀다.
“인생 공부를 하려는데, 절에 가서 한 10년 하면 인생이 뭔지 알 수 있습니까?”
스님은 나의 엉뚱한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허공을 쳐다보더니, 곧 의외로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출가한 지 60년 됐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네.”
실망한 나는 발길을 돌렸다. 몇 발자국 뗐을까. 스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학생, 요즘 중 되겠다고 머리 깎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석 달이면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하는데, 자네 같은 어린 친구가 어떻게 10년을 계산하는가. 나중에 뜻이 있으면 내게로 오게.”
스님은 내게 당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거기 보니 ‘법주사 주지 추담’이라고 적혀있었다. 집에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너 학교 끝나고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뭐 했어”라며 나무라셨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할머니가 오히려 버선발로 뛰쳐나가셨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왜 그러시냐”고 물으시기에 “추담 스님 명함을 보고 뛰쳐나가셨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도 그길로 밖으로 나가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담 스님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승이던 추담 스님은 할머니의 초등학교 은사였다고 했다. 추담 스님은 교사 출신으로 폐병에 걸려 금강산에 들어가서 면벽수도 3년에 병이 나았고, 일본 불교대학을 나와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