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주강수 한국가스공사 사장

다 함께 이루고 싶은 큰 꿈

  • 입력2011-03-25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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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강수 한국가스공사 사장

    주강수<br>●1945년 서울 출생<br>●서울고, 서울대 지질학과, 고려대 지질학 박사 수료<br>●캐나다 퀘벡주 캠벌광산 소장<br>●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나에게는 좀 큰 꿈이 있다. 그 꿈이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하자니 좀 에둘러 가야겠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의사였다. 당연히 환자들이 붐비는 병원이 내 어린 시절 삶의 울타리였다. 남을 돕고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늘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래선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연 속에 파묻혀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서울에서 태어났는데도 숲과 들이 좋았다.

    사춘기에 나는 철학에 빠졌다. 독일 니체와 덴마크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책들을 읽었다. 그때 내가 그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사상은 마음속 깊은 곳의 가려운 부분들을 긁어주는 듯했다. 고교시절 나는 대체로 공부를 잘했지만 엉뚱한 소리도 잘하고 좀 추상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다 고교 2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일의 일이다. 나는 해석 1, 2와 기하 수학 시험 세 과목만 제외하고 모든 과목을 백지로 냈다. 화학 담당이신 담임선생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나를 나무랐다.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나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양 거침없이 답했다.



    “인생에서 점수가 다는 아니잖아요.”

    사실 나는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 수학과 영어를 잘했고, 큰 무리 없이 대학도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고 있었던 데다 그 즈음 철학 책이 가르쳐준 ‘건방진’ 생각들 때문에 한번 엉뚱한 시도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회초리라도 휘두를 듯한 기세였던 선생님이 의외로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셨다.

    “야, 주강수. 너 마음에 든다. 그리고 너희들(다른 학생들), 내가 주강수가 마음에 들어서 100점 주려는데 문교부나 교장 선생님에게 일러바칠 놈 있으면 손 들어봐.”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 그때 내 친구들은 모두 선생님의 결정을 거부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우쭐해진 나는 공부를 게을리 했다. 3학년이 되어 모의고사를 보니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다. 겨우내 공부는 하지 않고 ‘벤허’ 같은 영화나 보러 다니고 철학 한답시고 폼이나 잡았던 탓이었다. 성적이 하도 참담했던 터라 나는 스스로 정당화할 필요도 있겠고 해서 끝까지 철학이나 붙들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집으로 가다 집 근처에서 어느 스님과 마주쳤다. 그분이 내게 길을 물었다. 나는 가는 길을 가르쳐드리고 돌아서다 엉뚱한 의문이 들어 다시 스님을 불렀다.

    “인생 공부를 하려는데, 절에 가서 한 10년 하면 인생이 뭔지 알 수 있습니까?”

    스님은 나의 엉뚱한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허공을 쳐다보더니, 곧 의외로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출가한 지 60년 됐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네.”

    실망한 나는 발길을 돌렸다. 몇 발자국 뗐을까. 스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학생, 요즘 중 되겠다고 머리 깎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석 달이면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하는데, 자네 같은 어린 친구가 어떻게 10년을 계산하는가. 나중에 뜻이 있으면 내게로 오게.”

    스님은 내게 당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거기 보니 ‘법주사 주지 추담’이라고 적혀있었다. 집에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너 학교 끝나고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뭐 했어”라며 나무라셨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할머니가 오히려 버선발로 뛰쳐나가셨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왜 그러시냐”고 물으시기에 “추담 스님 명함을 보고 뛰쳐나가셨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도 그길로 밖으로 나가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담 스님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승이던 추담 스님은 할머니의 초등학교 은사였다고 했다. 추담 스님은 교사 출신으로 폐병에 걸려 금강산에 들어가서 면벽수도 3년에 병이 나았고, 일본 불교대학을 나와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러다 나는 고교 3년 늦은 봄에 결국 절로 들어갔다. 절에서 철학이나 공부하고 편하게 지낼 줄 알았더니 스님이 학교에서보다 공부를 더 시켰다. 절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절 생활을 지겨워하고 있는데 친구 이경준(전 서울대 산림자원학과 교수)에게서 편지가 왔다.

    ‘네가 평생을 절에서 보낸들 삶을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마도 평생을 삶이 뭔지 헤매다 죽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나와서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떠냐.’

    그 길로 나는 절을 나섰다. 그러나 내 삶의 길은 이미 그때 정해졌다. 종교와 철학, 자연이 내 뒷덜미를 잡았다. 추담 스님은 내가 종교학과나 철학과에 들어가길 바라셨고, 아버지는 내가 철학을 전공하는 걸 원치 않으셨다. ‘살면서 인생을 공부해라’는 게 아버지의 뜻이었다. 대학 입학지원서를 쓸 때 아버지와 나는 우연히도 지질학과에 의견이 일치했다. 나는 산에 가서 자연을 벗하면서 철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질학은 우주의 근본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지구가 어떻게 생성됐는지, 어디에 광물이 있는지를 연구한다. 광물은 우리 몸에 생긴 혹 같은 것이다. 즉 특정 물질이 비정상적으로 농축된 것이 광물이다. 의사인 아버지는 사람의 맥을 보았지만 나는 우주의 맥을 본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몸도 작은 우주 아닌가. 넓은 시야를 갖고 학교 생활을 하니 대학 생활이 흥미로웠다. 졸업할 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세계를 돌아다니는 지질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1968년이었으니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란 사실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대학원을 나오고, 현대그룹의 자원개발 사업에 일조하면서 나는 정말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원 전문가가 됐다.

    그리고 내 나이 66세인 지금 나는 그 연장선에서 큰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자원을 통해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일이다. 좀 난데없는 꿈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은 좀 우연한 기회였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 주씨 가문 어른 몇 분이 성(姓)의 시조(始祖)인 주자(朱子) 묘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주자의 31대손으로, 내게 한족(漢族)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들은 주자묘에서 주자의 선대에 대한 기록을 메모해왔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주자의 뿌리는 지금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 지역의 동이(東夷)족이었다. 선대의 한 무리는 산둥반도를 따라 중국 쪽으로 남하했고, 또 다른 무리는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고조선 시절 우리 조상들은 중국 대륙을 호령하며 살았다. 그러다 고구려 크기로, 또 삼국통일이 되면서 한반도, 다시 남북 분단으로 남한만한 크기로 줄어든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해 말 서울에서 열린 G20정상회의의 ‘G’에서 고조선, 고구려를 연상했다. 수천 년 만에 다시 우리가 세계의 대국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국이 되려면 그 기초인 자원이 확보돼야 한다. 한국가스공사 사장으로서 해외 자원 확보에 공을 들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스를 수입해서 국민에게 공급하는 역할뿐 아니라 제3국에도 팔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가스 파이프라인이 설치되기를 바라고 있다. 통일이 되어야 파이프라인을 설치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극적인 합의를 통해 파이프라인을 설치한 뒤 통일이 될지 그건 알 수 없다.

    물질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는 논의가 있다. 나는 물질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동이족인 말갈, 예(濊)·맥(貊)·한(韓)족 등이 살던 지역을 관통하는 파이프라인이 설치되면 그곳으로 자원만 흐르는 게 아니라 우리 역사가 함께 흐르고 문화가 몰려들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에 막혀서 반도라기보다는 섬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정말 죽기 전에 큰 나라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내가 기여하는 힘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후배들을 양성해 그런 꿈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을 느끼며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릴 때는 초등학교 자연책에 ‘우리나라는 지하자원의 보고’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은 그 말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인구와 경제규모로는 우리나라에도 자원이 충분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자원이 너무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나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나의 세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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