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호<br>●1950년 전남 장흥 출생<br>●고려대 법과대, 한양대 언론대학원 언론학 박사<br>●지훈상(芝薰賞) 상임운영위원<br>●고려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금씩 성장하면서 자신의 공간을 넘어오지 말라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도편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륜을 바탕으로 한 훈수에도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효도의 마음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다고는 했지만 슬하의 자식이 아니라 이젠 또 다른 자신의 세계로 비상하는 날갯짓을 이미 시작한 뒤였다. 핏줄로 튼튼하게 연결된 듯한 고리가 끊기고 다시 혼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 허허로움을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적당한 긴장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한 30년 질풍노도의 험한 세상의 질곡을 헤쳐 살아남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길에서 흔들릴 때마다 앞선 이들의 흔적을 찾아 미륵불이나 큰 바위 얼굴로 삼아 나름대로의 해석을 붙여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는 채찍질이 필요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한 단계씩 쌓아올리다 보면 하늘이 너를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길을 찾아 자신의 뜻을 세워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 박수를 받는 일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지만, 폐를 끼치지 않고 이 공동체에서 나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이뤄진 성취감이나 그 과정에서 희생된 욕망의 뿌리들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나 안타까움도 지나고 보면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일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무 심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아직도 분명하진 않다. 큰 뜻이 아니라 우연히 스치는 생각에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막 입주한 황량한 개포동 아파트 입구에, 별난 사람 다 본다는 관리인의 지청구를 들으면서, 거금을 들여 커다란 느티나무를 심었다. 20년 세월에 자식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도 이젠 거목으로 자라 가끔씩 그 옆을 지나치면서 웃음을 짓기도 한다.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사회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서 출판언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천둥벌거숭이의 문화운동론자에게 상인들의 질서는 더욱 냉혹했다. 도시의 사냥꾼들이 격돌하는 콘크리트 숲에서 인간의 탐욕에 실망할 때마다 태고의 원시적인 바람과 향기가 넘실대는 거대한 나무의 숲을 만들어 그곳에 포근히 안기고 싶은 야무진 희망을 꿈꾸었다. 가야 할 길의 중간에도 오지 않았는데 출판언론에 이만큼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부추김에 건방진 마음이 들거나, 정치권력이 몇 번씩 바뀌면서 사회개혁은 외면하고 그 잘난 책장수만 계속할 거냐면서 손에 잡힐 듯한 작은 권력의 자리에 동참하자는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으려고 묘목밭을 일구는 노동으로 자신을 학대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우주도 없어지겠지만 한 지식인이 묻히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데, 눈앞의 이익에 핏발 선 탐욕의 눈동자들을 외면하는 길은 밀린 원고더미 속에 푹 파묻히거나, 자라는 나무들과 대화하는 일에 자신을 내몰 수밖에 없었다.
책에 파묻혀 30년을 보내는 동안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원고를 읽는 최초의 독자로서 기쁨이 컸고, 창조적 지식인을 지향하는 독자군이 형성돼 내가 느낀 책의 향기를 공유하는 이들의 소리 없는 환호성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원고는 내가 읽어야 한다는 원칙은 체력의 한계가 오면서 과욕이 되고 말았다. 출판언론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의 길에 인위적으로라도 쉴 수 있는 다른 활력소를 마련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생겼고, 그 실천방법이 나무 심는 일이었던 것 같다.
쓸모없는 생명이 있겠는가. 생명은 그 스스로 존재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가죽나무나 참죽나무의 운명에서 배우는 바가 많다. 작은 나무일 때는 뒤틀려서 서까래로 쓰기에도 적당하지 않아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커서는 울퉁불퉁해서 대들보 감이 아닌 것이 확실해서 사람의 도끼날을 피해 살아남는다. 그렇다고 이 나무는 서까래나 대들보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쓸모없는 나무라고 자책하지도 않으며, 오랫동안 거목으로 살아남아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처럼 또 다른 의미의 큰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한 셈은 사람들의 셈법일 뿐 나무는 그 푸름 외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