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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나무 심는 마음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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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전남 장성 축령산 숲 길.

처음에는 광릉집 뒷산에 반송과 주목, 산수유 묘목을 심었다. 여름이 무르익기도 전에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배운 것말고는 덩굴 제거와 잡초 뽑는 일에 벌써 지치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나자 제법 혼자 힘으로 잡초를 이겨내며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너무 밀식(密植)된 묘목들을 3배 넓이로 옮겨 심어야 했다. 나무가 자라는 데는 햇빛과 바람과 물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무를 옮겨 심다 보니 땅속에 그렇게 많은 지렁이가 뿌리 주변에서 공생하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송홧가루 날리는 윤사월을 맞이하면 나는 모양을 다듬는다고 일일이 솔 새순을 중간 정도에서 잘라주느라 솔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다음해 봄에는 잡초전쟁에서 벗어나고 싶고 과실을 일찍 볼 욕심으로 큰돈을 들여 10년생 언저리의 매실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대추나무를 심었다. 열매를 얻자고 들면 매실나무라 부르고, 꽃을 감상할 목적이라면 매화나무라 부른다지만 나는 이 나무를 달리 좋아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잔설 속에서 피어나는 그 의지를 높이 사서 설중매(雪中梅)라고 상찬하지만 꽃망울을 터뜨리기 한두 주 전쯤의 매화나무 줄기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선홍빛이 감돌다가 차츰 짙은 핏빛으로 절정에 올라 토실토실한 꽃망울에 양수가 터지듯 꽃잎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버들강아지가 눈을 뜨려 하고 꽃샘추위라고 호들갑을 떨 무렵이면 가장 먼저 푸른 잎을 내미는 상사화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겨울공화국의 종언을 알리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자연의 작은 역사의 한순간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나무 동네를 한 10년 헤매다 보니 작은 변화가 생겼다. 추사 세한도(歲寒圖)의 영향이었는지 한겨울을 늠름하게 견뎌낸 송백(松柏)의 늘 푸른 기상에 흠뻑 빠져 눈에도 차지 않았던 활엽수를 이제는 더 좋아한다. 애면글면 세속 인연의 실타래를 놓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마음 상해하지도 않고 가을이면 찬연한 단풍의 오케스트라를 끝으로 한 해의 잎사귀를 훌훌 털어버리는 매몰찬 포기가 부럽고, 감출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이 한겨울 삭풍을 벌거숭이 온몸으로 받아내는 나목(裸木)의 용기는 어디서 연유하는지가 궁금하다. 출근길에 한강변 둔치에 자생하는 버드나무 줄기에 물이 오르면서 날마다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짙어지는 봄 색깔의 채색도를 잎이 날 때까지 지켜보는 기쁨도 크다. 그러다 한 주일 뒤에는 서울 북쪽에 심어둔 우리 나무에서 그것을 재확인해 본다. 연필화 같던 느티나무의 작은 가지에 청맥(靑脈)이 솟구치고, 얇은 한지의 껍질을 벗겨내던, 백설탕 같던 자작나무의 줄기에도 체로 거른 맑은 황토색이 돌기 시작한다.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그렇게 처음 맞는 봄이 온다. 봄은 푸름만 아니라 여러 색깔로 온다. 개나리와 산수유,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봄의 서장이라면, 이제 새싹의 연두색과 아우르는 진달래나 영산홍, 철쭉이 흐드러진 산벚나무의 꽃비 속에서 핏빛을 토해낸다. 달빛에도 하얀 배꽃이 산천을 뒤덮을 때면 연분홍빛의 모과 살구 매화 앵두꽃이 합창하고 목련꽃 그늘에서 친구에게 편지라도 쓸 일이다. 아카시나무와 밤나무의 오묘한 짙은 꽃향기를 맡고 입하 무렵에 이팝나무가 하얀 꽃을 쌀밥처럼 매달면서 그렇게 봄날은 간다.

3년 전부터 조성을 시작한 포천 신북의 나남수목원은 약 66만㎡(20만평)나 돼 5리가 넘는 맑은 실개천을 끼고 50년이 넘는 잣나무 산벚나무 참나무 숲과 백년이 넘는 산뽕나무 팥배나무 쪽동백이 있어 태고의 음향에 취하고 있다. 수목원 곳곳에 15년의 아마추어 경험을 바탕으로 헛개나무·밤나무·느티나무·자작나무 묘목장을 튼튼하게 가꾸고, 개미취 분홍바늘꽃이 광활하게 춤추는 야생화 꽃동산도 마련하고 있다. 허락된다면 귀천(歸天) 전까지 한 20~30년은 햇볕을 다툼하는 녀석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라도 간벌과 옮겨심기를 계속하면서 거목으로 성장하도록 자식 키우듯 정성을 다할 것이다. 그 숲에 묻히고 싶다. 행복한 죽음의 일환으로 수목장 실천운동이 일듯 꽃밭과 파란 잔디와 우리 나무들 밑에 묻히고 싶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많은 친구가 그곳에서 영생을 같이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신동아 201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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