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중동(靜中動)하던 그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대선 막바지인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의 BBK 설립을 입증하는 동영상 CD를 갖고 있다”며 한나라당에 30억원을 요구한, 이른바 ‘광운대 BBK 동영상’ 협박범들을 호텔로 유인해 경찰에 넘기면서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대선 이후 인수위 정무분과 자문위원으로 이름 올렸고, 언론은 그를 ‘대선 일등공신’ ‘MB 신권력의 사람들’로 소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인수위 이후 지금까지 야인(野人)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지인의 소개로 한 중견기업 상임자문역으로 들어간 게 전부다.
그런 그가 4·27 재·보선 한나라당 패배 이후 한나라당 소장파와 친이(친이명박계) 주류 간 당권을 향한 힘겨루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두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새로운 한나라’ 모임을 만들어 쇄신 화두를 선점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8년 3월 18대 총선에 앞서 한나라당 출마자 55명이 이상득(SD) 의원의 공천 반납을 요구한, 이른바 ‘친이 55인 친위쿠데타’의 진원지도 박 전 특보였다. 재·보선 패배로 불붙은 당내 권력투쟁 2라운드에서 박 전 특보의 움직임이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수위 시절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직접 만나 ‘X파일’을 추궁한 사람도 박 전 특보였다.
권력투쟁에서 졌다
4월 중순 만난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다”며 정중히 거절한 터였다. 현 정권을 만든 사람으로서 ‘역사의 기록’에도 책임지라는 그럴듯한 명분과 2006년 어느 날 우연히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나 함께 야구경기를 관람했던 소소한 인연까지 들먹이며 4월 초 그에게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결국 그는 ‘인터뷰를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했다’며 기자와 세 차례 마주 앉았다.
▼ 어떻게 지냈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운동도 하고 일도 하고….”
▼ 운동?
“스크린골프요. 홀인원도 두 번 했어요.”
▼ 일은 할 만한가요?
“네. 여기서도 할 일이 많네요. 어쩌면 인터뷰 후에 짐 쌀지도 몰라 회사에 미리 얘기했습니다(웃음). (권력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부담 없이 얘기하라고.”
▼ 그렇게까지….
“운명이죠. 권력투쟁에서 진 사람의 운명. 그래서 그동안 조용히 지냈습니다.”
▼ 권력투쟁이라면 SD계를 염두에 둔 말씀인가요?
“그 얘기는…처음부터 많이 (앞서)나가시네요.”
▼ ‘나간 김’에 바로 묻죠. ‘55인의 반란’은 ‘박재성 기획’ 아니었나요?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08년 3월 정국(政局)으로 되돌아가보자. 18대 총선을 앞두고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 후보 등 수도권 한나라당 출마자 55명은 이렇게 주장한다.
“서민을 외면한 정책 혼선과 잘못된 인사, 잘못된 공천에 대해 당 지도부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인사를 잘못한 청와대 관계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