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곡 바위틈에서 자라는 석창포.
요사채의 불빛도 꺼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가 수를 놓는다. 이 산의 계곡 바위틈과 그늘진 돌무더기 위에 석창포(石菖蒲)가 도 닦는 은자처럼 숨어산다. 노자는 “곡신(谷神)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玄牝)이라 한다. 이 암컷의 문을 천지의 뿌리라 한다”고 했다. 천태산의 조그만 계곡들엔 ‘곡신’이 살아 있다. 멸종 위기의 반딧불이가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계곡과 하천에서 반딧불이가 살고, 그 계곡엔 반딧불이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가 살고, 바위와 돌에는 이들이 먹고살 만한 이끼류가 붙어산다. ‘현묘한 암컷의 문’으로부터 나온 계곡의 물은 이들을 키우며 쉼 없이 흐른다.
천태산 골짜기는 생명을 키우는 순환의 고리가 끊기지 않아 스스로 그러하고(自然), 억지로 하지 않아도 다 하는(無爲而無不爲) 본연의 상태를 간직하고 있다. 곡신이 죽지 않고 현묘한 암컷의 문이 살아 있는 곳이라야 맑은 물과 이슬로 몸을 씻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며 석창포가 산다. 청신한 창포향이 계곡 주위에 은은히 퍼지게 하는 일은 인위(人爲)로서는 어렵다.
머리 감는 데 쓰는 창포와는 달라
필자가 이곳에서 석창포를 처음 본 것은 수년 전의 일이다. 우연히 겨울등산을 왔다가 발견한 석창포는 한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줄기를 자랑했다. 잎사귀를 뒤척이면 은은한 향기가 손에 뱄다. 한의사가 약초의 실물을 직접 보고 그것이 자라는 곳을 살피는 순간의 기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마치 숨은 보물을 찾은 듯하다고나 할까. 두어 뿌리를 캐 뿌리의 생김새를 보고 돌아와 부리나케 자료를 뒤졌다.
흔히 창포 하면 보라색이나 노란색 꽃이 피는 붓꽃과의 꽃창포를 떠올리기 쉽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꽃창포는 오월 단오에 잎과 뿌리를 우려내 머리 감는데 쓰는 창포속의 식물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약재로도 쓰지 못한다. 약재로 쓰는 것은 천남성과의 창포인데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창포(菖蒲)와 석창포다. 둘 다 물을 좋아하지만 창포는 주로 호수나 연못가의 습지에서, 석창포는 냇가나 산간 계곡의 흐르는 물가 바위틈이나 돌무더기 사이에서 자란다.
약용이라하지만 창포는 기미와 약성이 달라 약재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단오에 머리감는 데 쓰는 정도다. 뿌리를 캐서 씹어보면 비린내가 난다. 맵고 알싸한 맛의 석창포와 확연히 다르다. 민간에선 비린내 나는 이 창포를 백창(白菖) 또는 수창(水菖)이라고 한다. 한때 약재상들이 이 창포을 썰어다가 석창포라고 유통시키는 일이 많았다. 서울 경동시장에서도 그런 사례가 흔했는데 요즘은 그렇게까지 지각 없지는 않다.
석창포의 잎줄기는 마치 양날이 선 칼, 검(劍)처럼 매끈하게 생겼다. 그 때문에 ‘수검초(水劍草)’라고 불린다. 옛날 도인들이 석창포를 가리키며 속인들이 잘 모르게 쓰던 은어라고 한다. 무더기로 자라는 모습이 흡사 부추와 같다고 하여 ‘요구’라고도 하는데 ‘곡술(曲術)’에 “요임금 시대에 하늘의 정기는 밭으로 내려와 부추가 되고, 음기는 감응해 창포가 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또 구절창포(九節菖蒲)라고도 한다. 석창포의 뿌리는 언뜻 지네처럼 보일 만큼 마디가 많은데, 한 치 길이에 아홉 마디(一寸九節)는 되어야 약효가 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