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자신의 말에 반대하거나 토를 다는 임원에게 “당신, 해봤어?”라고 물었다고 한다. “해본 건 아닙니다”라는 답이 돌아오면 ‘왕 회장’의 질책이 떨어졌다고 한다. “해보지도 않고 뭘 알아!”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즐겨 하는데, 그것이 현대 시절 ‘왕 회장’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경험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간의 구설에 오를 것까지는 없을 듯도 싶다. 실용주의는 경험에 의한 유용성(有用性)을 중요시한다. 실제 해봐서 좋으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용주의에는 높은 도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험에 의한 유용성이 공공성(公共性)에 부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실용주의가 국가철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청교도적인 엄격한 도덕성이 바탕이 되었다.
문제는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효율성에 치우쳐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았느냐는 데 있다. 공공성을 잃은 실용주의는 무원칙한 편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절차의 정당성이 결여된 편의주의로는 도덕적 권위를 담보할 수 없다. 도덕적 권위를 잃은 국가리더십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이윤추구를 최대 목표로 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국가지도자가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정부는 2008년 미국발(發) 경제위기를 나름대로 선방(善防)했고 세계로부터 경제위기에서 빨리 벗어난 성공사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성공의 과실은 대부분 수출대기업과 소득상위 20%의 부자들에게 돌아갔다. 빈부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부자 감세와 고환율, 저금리의 친(親)대기업 정책이 낳은 결과라는 비판이다.
이 정부 출범 후 3년간 10대 재벌그룹 계열사는 212개(52.2%)나 늘어났고, 이들은 기업형 슈퍼마켓에서부터 외식업, 와인 판매, 문방구, 떡볶이 장사에까지 진출하면서 중소기업은 물론 자영업자와 골목상권을 몰락시켰다.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이 무색한 결과다. 이래 가지고서야 정부여당이 ‘부자를 위한 정부’ ‘부자를 위한 정당’이라는 비난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야 어찌 공정사회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민심은 돌아섰고 그 결과는 ‘천당 아래 분당’에서의 패배로 나타났다. 내년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화들짝 놀랐고, 소장파와 친박(親朴)계는 탈(脫)청와대를 외쳤다.
신임 황우여 원내대표는 그 기세를 타고 ‘반값 등록금’을 민심수습책으로 내놓았으나 ‘덜컥 수’였다. 그의 제안은 대번에 잊혔던 MB의 ‘반값 등록금’ 공약을 되살렸다. 내연(內燃)하고 있던 대학가의 등록금 투쟁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이 대통령은 반값 등록금을 공약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후보 당시 구성한 경제 살리기 특위 11개 분과위원회 중 하나가 ‘등록금 반값 인하위원회’였다. 직접 말하지 않았으니 공약한 게 아니라는 주장은 옹색하다.
당내 분란도 일었다. 친이(親李) 구주류 측은 ‘정치적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신주류 측은 반값이 아니라 등록금 부담 완화이고 체감할 만한 수준으로 인하하자는 뜻이라고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런 말장난은 ‘미친 등록금’으로 고통 받는 대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한 해 전체 대학등록금은 14조원. 그것을 반값으로 깎아주려면 단순계산으로는 7조원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장학금을 제하는 등 다른 여러 계산으로는 3조∼5조원이 든다고 한다. 문제는 재원인데 명목이 무엇이든 국민 세금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추가 감세할 돈(6조원)이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설령 추가감세방침을 철회한다고 해도 없던 6조원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기존의 국가재정에서 지출해야 한다.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 쓸 곳은 널려 있다. 민주당이 증세를 하지 않고 추진하겠다는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은 또 무슨 재원으로 마련할 것인가. 재원대책 없는 복지에 솔깃할 만큼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민주당이 지난 1월 내놓았던 반값 등록금의 추진 원칙은 저소득층 하위 50%를 대상으로 반값 등록금제를 실시하고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단계적 접근’이었다. 손학규 대표가 촛불집회에 참석해 이런 당의 방침을 설명하자 대학생들은 “도대체 한나라당과 다른 게 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당장 2학기 등록금이 발등의 불인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것이었다. 손 대표는 다음날 내년 신학기부터 반값 등록금 전면 시행으로 노선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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