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꼬레뜨 기부미’를 외치던 아이들
속에 담은 내용 중에는 안타깝고 슬픈 것이 많지만 그것이 되레 재미있게 표현된 부분도 없지 않다. 흑인 병사를 쫓아다니며 ‘쪼꼬레뜨 기부미’를 외치는 꼬맹이들을 보라. 요즘의 젊은이들은 이 아이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고 머리 모양새가 어떻고 어떤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지를 상상치 못하리라. 그렇지만 나는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이들의 ‘꼬라지’를 그릴 수 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기부미 쪼꼬레뜨!’를 외친 것이 한두 번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지도 여러 해 지났건만 그 무렵 우리 마을 앞으로는 해질녘이면 미군들을 태운 군용열차가 지나갔다. 차 시간이 되면 온 동네 아이들이 철둑에 올라서서 열차를 기다렸다. 마침내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열차의 머리가 보일라치면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길길이 뛰면서 ‘기부 미 쪼꼬레뜨!’를 외쳐댔다.
창가에 앉은 백인 흑인 병사들의 희죽 웃는 모습이 빠르게 스쳤다. 정말 ‘쪼꼬레뜨’가 날아오기도 했다. 시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통째로 던져주는 마음씨 좋은 병사도 있었고 쓰레기를 쏟아주는 군인도 있었다. 미군의 쓰레기, 그것마저 우리에게는 모두 ‘보물’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일회용 종이컵이며 플라스틱 스푼 하나만 주워도 횡재를 한 거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귤 껍질 하나라도 더 줍겠다고 아이들은 빠르게 철둑 비탈을 굴러 내렸고 종아리에 가시가 박히고 손등이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욕심을 부렸으며 좀전까지 어깨동무하고 놀던 친구와 코피 터지게 싸우기도 했다.
베옷처럼 헐었지만 돌아가야 할 곳
시에는, 이보다 훨씬 참혹한 ‘쪼꼬레뜨’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은 천둥산마저 두렵다. 그리하여 산은 ‘흐린 날이면 이마를 구름으로 가리고 비가 오면 비 뒤에 숨었다’. 아군과 적군의 싸움으로 산불이 나도 마을사람들은 아무도 산에 오르질 못했다. 흑인 병사들이 마을로 ‘여자 사냥’을 나와도 어른들은 밤늦도록 잎담배만 말아 피웠으며 부지깽이로 애꿎은 어린애나 두들겨 팰 수밖에 없었다.
천둥산은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서울의 어두운 술집 골목에서 문득 ‘천둥산 박달재-’를 흥얼거리다보면 그 혹독한 어린 날들이 단번에 망막에 펼쳐져 눈앞이 흐려진다. 그러나 이 늦은 나이, ‘천둥산이 나의 이마 높이로 와 닿아 있고 박달재의 긴 구렁 짧은 구렁이 내 가슴까지 와 있다는 것을’ 조금 눈치 채기는 하겠는데 역사가 뭔지 인간이 뭔지 그리고 내 삶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인이 정말 모른다면 누가 알겠냐마는 시의 말은 원래 이렇게 하는 법이다. 아무튼 가난과 고단 속에 보낸 유년의 고향일수록 훗날 더 모진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50~6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안다. 그 황막한 고향은 어머니의 베옷처럼 거칠면서도 한편 어머니의 속살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곳임을. 그래서 뿌리쳐 떠나온 곳이면서도 마침내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영원한 회귀의 땅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인 오탁번도 다를 바 없다. 제천시 백운면이 그의 고향이다. 고개를 쳐들면 천등산이 눈썹에 와서 걸리는 그 산간 오지. 밤이면 빨치산이 피우는 빨간 불빛이 보이고 낮이면 그들을 쫓는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 벼랑의 땅에서 그는 가난과 고단을 의복처럼 걸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그는 시인으로 소설가로 성장해 크게 활동했으며 한편으로 대학 교단에 서서 후진들을 키웠다.
평소에도 틈날 때마다 고향을 찾았던 그는 정년퇴직 후 온전히 고향에 묻혔다. 그곳에서 그는 계절마다 품격 있는 시 전문지를 펴내며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을 불러 모아 끊임없이 ‘시 잔치’ ‘시 놀이’를 벌인다. 예전의 원서초등학교 애련분교를 개조해 가꾸어놓은 ‘원서문학관’은 곧 천등산의 에너지를 끌어 모아 시로 꽃피우고자 하는 그의 천진한 놀이터인 동시에 심각한 마지막 일터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