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는 이 글을 인용해 6월20일자 사설에서 전교조를 비판했고, 이어 한 고교 교사는 ‘오마이뉴스’에 “(김용택 시인 글은) 편협하고 오만하고 무지한 글”이라며 김 시인과 조선일보를 싸잡아 비난했다. 일부에서는 김 시인의 ‘고언’을 받아들이자는 의견도 나왔다.
7월 초, 필자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 하운암리 옥정호 옆 운암댐을 끼고 있는 찻집 ‘하루’에서 김용택 시인을 만났다. 이곳은 김용택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고향집이 있는 덕치면을 코앞에 두고 있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나 1982년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21인 신작시집’에 연작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순창농림고교를 졸업한 뒤 1970년 덕치초교 교사를 맡아 2008년까지 38년 동안 교직생활을 했다.
인터뷰는 김용택 시인의 고향집에서 하려 했으나,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는데다 한동안 집을 비워두었다는 탓에 부득이 장소를 바꿨다.
전교조 질문에 고개 절레절레
시인 김용택은 이날 ‘희망칼럼’과 이후 논쟁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르고 하는 소리. 전교조는 내게 평생 편안한 가족이여”라는 짤막한 말로, 글쓴이가 던진 물음표를 한순간에 내팽개쳤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해 이맘때 전북 전주시에서 김 시인을 만나 막걸리를 한잔하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당시 전교조에 대해 그는 이렇게 툭 내뱉었다.
“나는 언제나 전교조가 나아가고자 하는 이념에 동의했다. 전교조는 지금도 편안한 가족이라 여긴다. 편안한 가족이라면 언제든지 애정 어린 비판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답을 얘기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인은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나는 정치를 하는 시인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 인격에 대해서도 “나는 겸손이 아주 싫다, 거짓말이고 사기니까”라고 못 박았다. 필자는 이 말이 희망칼럼에서 ‘겸손이 싫기 때문에 사기가 아닌 참말 그대로 애정 어린 마음을 내비쳤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 시인은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고은을,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리영희 선생을 꼽았다. 인터뷰는 어린 시절 기억으로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가 없었어요. 6·25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교실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 초등학교 다니기 전에는 책이라는 걸 몰랐어요. 동네도 다 불탔고, 학교도 전소됐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책이라면 교과서를 처음 봤나? 기억나는 건 6학년 때, 그때는 뭐 시골이기 때문에 시험공부 이런 거 안 했고, 성경책을 봤어요.”
▼ 성경책을요?
“선생 막 하면서도 그 책, 도스토예프스키 사보기 전에 성경책을 봤어요. 걸어 다니면서도 마구 읽었는데, 이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지금은 뭐 성경책은 안 읽지만 성경책은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어요. 어느 날 집에 책이 없어져 찾아보니 가마니 밑에 고여져 있었어요. 이게 좀 두꺼웠지. 가마니 밑에 받쳐놓았더라고. 나는 그걸 줄을 치면서 읽었어요. 똑같은 구절도 어제 읽는 것하고 오늘 읽는 것하고 다르더라고요. 내 삶의 변화에 따라 책의 내용, 느낌, 감동이 달라지잖아요? 성경은 깊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