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시인이다”

전교조 기관지에 비판 글 실은 김용택 시인

  • 이소리│시인, ‘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입력2011-07-20 1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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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교조 비판? “가족에게 비판도 못하나?”
    • 펜은 강하지 않아…정치가 세상 바꾼다
    • 서정주는 문학과 친일을 떼어놓고 봐야
    • 김용택문학관은 반대…“내 시가 몇 년 갈지 몰라”
    • “나는 겸손이 아주 싫다, 거짓말이고 사기다”
    • “요즘 시인들, 시인도 모르는 시를 쓴다”
    “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시인이다”
    시인 김용택을 두고 말이 많다. 시인이 지난 5월9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펴내는 주간신문 ‘교육희망’에 전교조 활동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는 까닭이다. 그는 이 글에서 전교조를 향해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찬 불편한 얼굴을 거두어 들여라. 반성하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부드럽고 착하고 선량하고 정답고 선하고 따사로운 사랑으로 빛나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달라. 그것이 교사로서의 긍지와 그 권위와 위엄을 지키는 일이다. 이 너절한 세상 속에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고 썼다.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되자 그 권력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교사들이 늘었다. 곤혹스럽다”고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 글을 인용해 6월20일자 사설에서 전교조를 비판했고, 이어 한 고교 교사는 ‘오마이뉴스’에 “(김용택 시인 글은) 편협하고 오만하고 무지한 글”이라며 김 시인과 조선일보를 싸잡아 비난했다. 일부에서는 김 시인의 ‘고언’을 받아들이자는 의견도 나왔다.

    7월 초, 필자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 하운암리 옥정호 옆 운암댐을 끼고 있는 찻집 ‘하루’에서 김용택 시인을 만났다. 이곳은 김용택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고향집이 있는 덕치면을 코앞에 두고 있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나 1982년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21인 신작시집’에 연작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순창농림고교를 졸업한 뒤 1970년 덕치초교 교사를 맡아 2008년까지 38년 동안 교직생활을 했다.

    인터뷰는 김용택 시인의 고향집에서 하려 했으나,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는데다 한동안 집을 비워두었다는 탓에 부득이 장소를 바꿨다.

    전교조 질문에 고개 절레절레



    시인 김용택은 이날 ‘희망칼럼’과 이후 논쟁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르고 하는 소리. 전교조는 내게 평생 편안한 가족이여”라는 짤막한 말로, 글쓴이가 던진 물음표를 한순간에 내팽개쳤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해 이맘때 전북 전주시에서 김 시인을 만나 막걸리를 한잔하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당시 전교조에 대해 그는 이렇게 툭 내뱉었다.

    “나는 언제나 전교조가 나아가고자 하는 이념에 동의했다. 전교조는 지금도 편안한 가족이라 여긴다. 편안한 가족이라면 언제든지 애정 어린 비판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답을 얘기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인은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나는 정치를 하는 시인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 인격에 대해서도 “나는 겸손이 아주 싫다, 거짓말이고 사기니까”라고 못 박았다. 필자는 이 말이 희망칼럼에서 ‘겸손이 싫기 때문에 사기가 아닌 참말 그대로 애정 어린 마음을 내비쳤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 시인은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고은을,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리영희 선생을 꼽았다. 인터뷰는 어린 시절 기억으로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가 없었어요. 6·25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교실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 초등학교 다니기 전에는 책이라는 걸 몰랐어요. 동네도 다 불탔고, 학교도 전소됐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책이라면 교과서를 처음 봤나? 기억나는 건 6학년 때, 그때는 뭐 시골이기 때문에 시험공부 이런 거 안 했고, 성경책을 봤어요.”

    ▼ 성경책을요?

    “선생 막 하면서도 그 책, 도스토예프스키 사보기 전에 성경책을 봤어요. 걸어 다니면서도 마구 읽었는데, 이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지금은 뭐 성경책은 안 읽지만 성경책은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어요. 어느 날 집에 책이 없어져 찾아보니 가마니 밑에 고여져 있었어요. 이게 좀 두꺼웠지. 가마니 밑에 받쳐놓았더라고. 나는 그걸 줄을 치면서 읽었어요. 똑같은 구절도 어제 읽는 것하고 오늘 읽는 것하고 다르더라고요. 내 삶의 변화에 따라 책의 내용, 느낌, 감동이 달라지잖아요? 성경은 깊었던 거지.”

    처음 읽은 책은 성경책

    “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시인이다”

    김용택 시인은 “시를 쓰며 정치를 하고 싶지만 시골에 오래 살아 정치적 역량을 키울 수 없었다”며 웃었다.

    ▼ 성경책 말고 다른 책은 읽지 않았나요.

    “그때 중학교는 시험을 봐서 갔는데 시험공부는 안 했어요. 그래서 시험을 보러가기 전에 이순신 장군이라는 전기가 있어 그걸 읽었어요, 우연히. 그런데 기억나는 건 별로 없고 ‘골목대장을 했다’ 뭐 이런 얘기들….”

    ▼ 중·고교 다닐 때는 전북 순창에서 자취하지 않았나요.

    “중학교 1학년 들어가서 김내성의 ‘검은 별’과 ‘사상계’를 봤어요. 1학년2학기 때쯤 됐을 겁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사촌형님이 무슨 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사상계’라는 글자, 이게 딱 박혀 있더라고요. 고등학교 다닐 땐 옆집 친구 아버지가 국어선생님이었는데, 그 집 놀러 가면 이광수 전집, 손창섭 전집 이런 책들을 읽었어요.”

    ▼ 이광수와 손창섭, 그 느낌이 꽤 달랐을 텐데요?

    “손창섭은 그때 우리나라에 없었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을 거예요. 그의 책 중에는 굉장히 좋은 책이 많았어요. 전쟁 후에 황폐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상처 받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그런 이야기들이었어요. 이광수 책은 손창섭 거하고 전혀 달라요. 이광수는 굉장히 계몽주의적이고, 이 양반은 굉장히 ‘리얼’했으니까. 리얼리즘이지. 손창섭 선생은 가난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라든지,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전쟁 후의 삶을 정말 적나라하게 썼죠.”

    ▼ 서울에서도 생활하셨죠?

    “졸업하고 나서 집에서 오리를 키우다 쫄딱 망해 서울로 도망을 갔었는데 그때 청계천을 갔어요. 청계천 헌책방. 옛날에는 헌책방 거리가 한 4㎞쯤 됐어요. 거기서 놀면서 책을 두 권 샀는데, 하여튼 백철의 문학평론집과 장수철 선생님 시집이었어요. 그 책은 지금도 집에 있어요. 그때부터 왔다갔다하면서 청계천에서 놀았지. 너무 책이 많으니까. 그런데 내가 뭐 문학을 한다든지 책을 좋아한다든지 이런 건 없었어요.”

    ▼ 서울에 오래 계셨나요?

    “딱 한 달 있었어요.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한국사상강좌’라는 다섯 권짜리 책을 열심히 봤어요. 우리 한국사상 전체를 다루는 책이었는데,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때 철학이라는 게 자연에서 나온다는 걸 안 거지. 거기에 나와 있었어요. ‘철학이라는 게 자연의 이치 속에서 나온다’고.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자연에서 가져온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우리 인간의 삶, 삶의 모든 양식, 형식, 내용은 자연에서 왔다는 걸….”

    ▼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갔나요. 자연을 찾아서….

    “그건 아니고요(웃음). 그런데 시골로 돌아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여섯 권짜리를, 너무도 황당하게 내가 책을 샀어요. 내가 있었던 학교는, 여기서 가까운 산골로 들어가서, 도로에서 도랑을 한 세 개, 네 개쯤 건너야 했어요. 양말을 벗고 건너서 가는 학교였죠. 그런데 장사하는 분이 ‘월부책’을 팔러 그 학교에 온 거예요. 선생이 딱 세 명 있었는데 월부책 장사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지금도 신기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어요. 월부책을 다 샀지 뭐. 박목월, 서정주,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니체 전집까지 다 샀어요. 그 뒤에 ‘한국문학전집’ 50권짜리를 샀는데,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어요. 그 전집은 (영화배우) 송강호가 마스크 쓰고 나오는 영화….”

    ▼ 영화 ‘반칙왕’ 말인가요.

    “맞아요. 반칙왕. 그 반칙왕을 보는데 송강호 아버지가 신구였어요. 베개를 베고 이렇게 누워 파리채를 놓고 그 책을 딱 보고 있더라고. 너무 놀라버렸지. ‘50권짜리다’하고 혼자 소리쳤지요.”

    복잡한 생각 정리하다보니 어느새 시인

    “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시인이다”

    전북 임실군 운암초교 마암분교 제자들과 함께 한 김용택 시인.

    ▼ ‘한국문학전집’을 읽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나요.

    “아뇨.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책을 보는 것만 재미있었지 ‘글을 써야겠다’, 뭐 이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러다가 한 7년쯤 넘어가니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어요. 나도 고민한 거죠. ‘나는 누굴까. 나는 뭘까’하는 생각에 나를 찾기 시작했어요. 우리 아버지 삶은 뭐냐? 저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 삶은 뭐냐? 그런 생각이 났어요. 그러니까 생각을 주체하지 못한 거죠. 일기장에다 막 썼어요. 나는 일기를 많이 썼는데, 스물 한 다섯 여섯부터, 여섯 일곱 그때까지. 머리가 복잡하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보니까 글 쓴다는 게 참 재미있더라고요. 쓰다보면 내 생각이 스스로 깊어졌어요. 글쎄, 어느 날 보니까 내가 시를 쓰고 있더라고. 나 스스로도 놀랐어요. 그때쯤 되었을 때 시 잡지도 많이 봤어요.”

    ▼ 시 잡지라고 하면?

    “현대시학, 심상, 현대문학이 그때는 주류였으니까 그런 잡지를 많이 봤어요. 박목월 선생은 심상, 현대시학은 전봉건, 그 양반들이 만든 거죠. 그때는 전봉건이 누군지도 몰랐고. 1980년대 전까지는 아무, 이념적이라든지 이데올로기적인 걸 전혀 몰랐어요. 그냥 글을 썼죠. 시도 써보고, 소설도 썼는데, 소설은 또 어렵더라고. 문학평론도, 사회평론도 써보고. 하여튼 생각나는 건 다시 쓰기 시작한 거지, 일기장에다가.”

    ▼ 시를 쓰는 데 어떤 책이 큰 도움이 되었나요. 세상을 보는 눈도 넓히는 책 말입니다.

    “그런 책은 없어요. 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관심을 종합해서 시라는 형식을 통해 형상화해내는 게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떤 한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건 나는 이해를 잘 못해요.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어떤 한 가지, 예를 들어 문학적인 장르가 됐든, 예술적인 장르가 됐든, 역사가 됐든, 정치가 됐든 한 가지 것만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고 봐요. 종합해야 된다는 거지. 나는 시를 쓸 때 소재를 가지고 쓴 적이 없어요. 내 시는 자세히 보면 소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그 사회에, 당대 사회에 나에게 직면한 그 시대의 문제를 종합하려고 노력했어요.”

    ▼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때는 언제인가요.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시인이라고 생각하면 겁나게 쑥스러운 사람입니다. 시라는 게 내가 만족해야 되는데, 나는 그런 게 별로 없고 또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무엇이 돼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해봤어요. 지금도 ‘시인이다’ 그러면 이상해요. 한때 박목월 같은, 우리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순수문학 한다는 사람들의 그 표현 속에 빠져 있었어요. 그 사람들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어느 날 그것을 벗어나서 ‘섬진강 1’을 써놓고 나니까 이게 시 같은 거지, 내가 봐도. ‘이거 시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섬진강 1’은. 그러니까 너무 신이 나더라고. 그게 1980년이에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했죠. 나는 나이에 비해 정신이 일찍 들었던 거 같아요.”

    어머니 말씀 받아쓰면 시가 됐다

    ▼ 그렇군요. 어머니 말씀을 그대로 베낀 시가 많다고 들었는데요.

    “어머니께서 그냥 말씀하시면 이게 시가 되더라고요. 나는 어머니 말을 베낀 시, 완벽하게 베낀 시가 많아요. ‘이 바쁜 때 웬 설사’라는 시가 있는데, 그게 새로 만든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바쁜 농사철에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깔짐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오는데 갑자기 똥이 마려웠다, 설사가 난 거지. 소를 받치고, 지게를 받쳐야 하는데, 지게를 받치자 깔짐이 넘어갔어요. 풀이 허물어진 거지. 그때 소가 펄떡펄떡 뛰었다. 깔짐은 넘어가지, 소는 뛰지, 받치기는 힘들지. 그래도 똥을 싸러 갔어요. 옛날에는 허리띠가 삼베였잖아요? 이번에는 또 이게 안 풀어지는 거지. 들판에 사람들은 너무 많고, 어따 대고 싸지를 못하고. 어머니께서 이 상황을 말했는데, 나는 말한 걸 그대로 베껴 썼어요.”

    ▼ 그렇군요.

    “하루는 어머니하고 콩밭을 매다가 감나무 밑에서 쉬었어요. 그때 구름이 지나갔는데, 어머니께서는 ‘구름은 둥실 비 실러 가고 바람은 살랑 꽃 따러 가고’ 이렇게 말하시더라고. 너무 멋있더라고요. 받아썼죠. 느티나무 밑에 앉아서 가만히 어른들이 얘기하는 거 들으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걸 잘 들었죠.”

    ▼ 시 ‘마당은 비뚤어져도…’와 동시 ‘콩, 너는 죽었다’도 그랬나요.

    “‘마당은 비뚤어져도 장구는 바로 치자’는 느티나무 밑에서 어른들이 한 걸 그대로 받아쓴 겁니다. 내 생각도 좀 집어넣었고. ‘콩, 너는 죽었다’도 어머니가 콩 타작할 때 나온 말이에요. 어머니가 콩 타작을 하는데 콩이 톡톡 튀어 올라 마당에도 떨어지고, 도랑에도 떨어지고, ‘또르륵’ 굴러가기도 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걸 내가 잡으러 구멍까지 따라갔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용택아, 콩 이제 저건 죽었다’고 했어요. 얼른 방에 들어가서 ‘콩, 너는 죽었다’를 썼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건 잘 듣고 있으면 다 시가 된 거죠.”

    ▼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

    “김수영 전집과 김수영 산문집이요. 놀라운 책입니다. 신동엽 산문도 굉장히 빼어나요. 또 하나 좋은 책은 장욱진 선생님 책이죠. 그 책은 선생님이 최초로 쓴 에세이집이에요. 민음사에서 나왔는데, ‘강가에 아틀리에’라고. 나는 그 책을 참 좋아해요.”

    ▼ 왜 그 책을 그렇게 좋아했나요?

    “그 책의 구절 중에 겸손에 대해서 나옵니다. 장욱진 선생은 겸손을 아주 싫어했어요. 내가 겸손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겸손한 건 거짓말이 너무 많은 거죠. 사기입니다. 자기를 너무 감추는 거죠. 장욱진 선생은 그걸 쓴 거예요. 나는 그 구절을 너무 좋아해요. 내가 하도 장욱진 선생을 좋아하니까 장욱진 선생님 딸이 나를 좋아했어요(웃음).”

    ▼ 시집은 어떻습니까?

    “제일 많이 읽은 책은 고은의 ‘부활’입니다. 그 다음에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정도…. 시를 쓰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사실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시대는 어느 시대든지 유구한 세월 동안 늘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문제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시인은 어떤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 속에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느 시대든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보듬어 안고 고민하는 겁니다. 그게, 말하자면 글입니다.”

    무슨 시를 쓰겠다는 사람들 이해 못해

    ▼ 시인은 시대의 문제 속에 있다?

    “나는 무슨 시를 쓰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 못해요. 또 자기 자신이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냥 글을 쓰는 게 재밌고 좋을 뿐이죠. 좋고, 재밌고, 행복하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어쨌든 내가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난 여기에 정직하고 싶어요. 자다가도 불쑥 생각나면 그냥 써놓죠.”

    ▼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정말로 존경할 만한 사람은, 함께 사는 사람 중엔 별로 없어요.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그랬으니까. 나는 요즈음 고은 선생을 좋아해요. 2,3년 전에 강의를 처음 들어봤어요. 술을 마시고 김소월에 대해서 강의했는데, 시인인 것 같았어요. 그 삶이 어떻든 정말 시인인 것 같아요. 내가 정말 존경하고 싶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은 리영희 선생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으니까. 일생 동안.”

    ▼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될 건가요.

    “그 질문을 딱 듣고 생각하니 난 정치를 하고 싶어요. 시를 쓰면서 정치를 하고 싶어요. 내 삶이 정치적이지 않았어요. 정치적일 수가 없었죠. 정치적인 역량을 키울 수도 없었어요. 시골에 오래 있었거든요. 초등학교 교사라는 아주 작은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어요. 내 인간적인 폭을 폭발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죠. 늘 억압되어 있는 상태를 나는 글을 통해 해방시켰어요. 내 삶이,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정치를 하는 시인….”

    ▼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요.

    “옛날에는 펜이 강했다고 봐야 하는데, 펜이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펜은 별로…. 펜이 무엇이 강합니까? 물론 옛날에는 그럴 수도 있었겠죠. 전체적으로 봤을 때 펜은 별로 강하지 않은 거 같아요.”

    ▼ 정말 좋은 시를 꼽으라면….

    “정말 좋은 시는 서정주 시라고 봐요. 김수영 시를 좋아하지만, 서정주, 김소월 시도 좋아요. 우리나라 글이라는 게, 시라는 게, 거기서 완벽하게 떨어져 완벽하게 독립된 한 세계를 이룬, 냉정하게 세계를 이룬 시는 사실은 극히 드물어요. 그런 유에서 보면 김수영에게 가장 완성된 시가 많죠. 김수영 시는 한 편도 그냥 넘길 시가 없어요. 거의 다 완성도가 아주 높은 시예요.”

    ▼ 서정주를 놓고 친일과 문학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말도 많은데요.

    “그게 복잡해요. 사실은 우리가 100년 후를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지금 보면 우리 사회는 체제가 정리 안 된 사회예요. 과거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거죠. 정리를 하고 넘어갔으면 이 사람은 친일이지만 시는 또 시 그대로 인정할 수가 있지 않나요? 우리가 문학작품으로 놓고 봤을 때 좋은 시들이 있는 겁니다. 나는 서정주 쪽에서도, 친일문학을 반대하는 쪽에서도 그냥 ‘서정주는 친일문학자다’ 이렇게 얘기하면 된다고 봐요. 그런데 우리 시대가 아직 정리가 안 됐기 때문에, 이 사람 시가 교과서에 실린다든지, 이런 건 상당히 문제가 있죠. 그런데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서정주 시를 봐야죠. 공부는 해야 하니까.”

    문학은 관광 대상이 아니다

    ▼ 고향인 임실에서 김용택문학관을 지으려고 하는데요.

    “한 3년 됐나요? 문학관 짓는다는 그 얘기. 문학관을 지으면 문학관을 운영해야 해요. 짓는 돈도 많이 들어가고. 최소한 50억~60억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문학관을 지으려고 난리를 치느냐.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지으려고 해요. 왜? 관광 때문이지. 나는 그게 싫어요. 문학관을 운영하려면 적어도 2억원은 들어가야 되고, 다 국민 세금이죠.”

    ▼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문학관 건립을 반대하는 건 드문 일인데요.

    “우리 어머니가 시인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시골에 농사짓는 사람들도 시인입니다. 나는 벌어서 그들에게 나눠줘야 해요. 국민에게 나눠줘야 돼. 이건 아니죠. 나는 문학관을 짓는다는 걸 끊임없이 반대했어요. 문학관을 짓자면 내 문학이 10년을 갈지, 20년을 갈지, 내가 죽으면 끝날지, 100년을 갈지 모르잖아요? 문학관은 한번 지어놓으면 몇 백 년 넘게 갑니다.”

    ▼ 그럼 김 시인이 좋아하는 자작시는 무엇인가요?

    “내가 그 글을 처음 발표하고 신작 시집이 나한테 왔을 때, 내가 내 시를 보고 진짜 감동했어요. 나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죠. 시는 내가 써놓고 내가 감동해야 된다는 거지. 정치도 선생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일은 자기감동이 첫째입니다. 내가 정말 좋다는 시는 ‘섬진강 1’, 그 다음에 ‘맑은 날’이라는 시가 있어요. ‘맑은 날’이라는 시, 그건 그림책으로도 만들었죠. ‘강 같은 세월’이라는 아주 짧은 시도 있고, ‘나무’라는 시집에도 좋은 시가 몇 편 있어요. 동시 ‘콩, 너는 죽었다’도 괜찮은 거 같아요.”

    ▼ 시 쓰는 사람들에게 한마디해주시죠.

    “그거야 자기네들이 다 알아서 하겠죠.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시를 이해 못한다는. 내가 시인인데, 시인이라고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시를 공부해왔고, 나도 여태까지 시를 써왔지만 젊은 사람들이 쓴 시를 이해 못하겠어요. 나는 요즘 잡지를, 계간지는 거의 다 봐요. 그런데 그곳에 실린 시를 이해 못하겠어요. 이게 내가 잘못된 건가, 그 사람들이 잘못된 건가? 그래서 ‘내가 공부가 모자랐나 보다’하고 생각해요. 요즘은 시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시인들도 시인들만 아는 시를 쓰는 것 같아요. 1980년대는 시가 대중에게서 사랑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알아듣는 시를 썼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에는 시인들만 아는 시를 쓰고 있으니…. 그래서 점점 시가 한쪽 구석으로 몰리는 겁니다. 요즘 시는 시인도 모르는 시를 쓰고 있다. 그게 답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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