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왼쪽)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담당 차관.
셔먼 차관이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일했던 시기에 진행된 한반도 정세와 미국의 해법을 조망해보면 이러한 분석이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그를 발탁한 오바마 행정부의 대(對)한반도 외교에서의 새로운 승부수라는 점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시간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당시 북한과 미국, 남한과 북한은 긍정적 함수관계를 가지면서,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향해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대북정책조정관에 취임한 1997년 7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소가 개설됐고, 9월에는 미국 국적 민항기가 최초로 북한에 착륙했다. 그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목표로 한 4자회담 본회담이 제네바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8년 8월31일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장거리 미사일 광명성 1호를 발사하고, 헌법을 개정하면서 ‘강성 대국론’을 체제목표로 제시했다. 장거리 미사일 도발에도 미국은 북한과 미사일 협상, 북미 고위급회담을 진행시켰고 1999년 9월에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했다.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전후해 북한은 북미회담 기간에는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엄(미사일 발사 유예)을 천명했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유보하겠다는 대미 유화조치를 발표한 북한은 1999년 6월15일 서해에서 한국 함대를 공격하는 군사도발을 감행했다. 서해도발이라는 도전에도, 남북은 2000년 6월 1차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했고, 2000년 6월19일 대북한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효시켰다. 같은 해 9월27일 뉴욕에서는 북미 차관급회담이 열렸고, 북한의 조명록은 2000년 10월9일부터 12일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겸 인민군 최고사령관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기간 중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핵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로부터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기술을 도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1997년 1월부터 2001년 1월까지 진행된 북미관계의 총지휘는 당연히 클린턴 대통령-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었다. 대사급이던 셔먼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에 대한 셔먼의 기여와 신뢰,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의 법률담당차관보로 근무한 경력을 고려할 때, 북미공동코뮤니케 내용과 방향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웬디 셔먼이 북미관계를 조율할 당시 북한에서는 김계관이 그의 카운터파트였다.
김정일의 북미관계 승부수, 김계관
2010년 9월 김계관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으로 승진했다. 시기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목은 북한체제가 김정은을 후계자로 대내외에 공표한 시기에 승진했다는 점이다. 김계관은 2009년 8월 북한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공항에서 영접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 주최 만찬에 참석했으며,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평양공항에서 전송한 인물이다. 김계관은 향후 김정일-김정은 과도체제 하에서 북미관계를 조율할 연출자 역할을 할 것이다.
2011년 7월 김계관은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28일과 29일 열린 뉴욕회담에 참가했다. 그는 분명하게 “뉴욕회담에 만족하고, 앞으로도 대화를 계속할 것이며, 다자회담 전에 쌍무적 만남이 계속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외무성도 8월1일 문답형식을 거쳐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미관계 개선과 한반도 정세 안정,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한 문제들이 진지하고 건설적인 분위기 속에서 논의됐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북측은 북미회담의 주요 의제로 △북미관계 개선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 △전제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 △동시행동의 원칙 하 9·19 공동성명이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