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중세 암흑시기에 이슬람은 문명을 밝혔다

대수학, 눈 해부, 세계지도, 과학서적 번역 운동

  • 김능우│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아랍문학 aminkim@hanmail.net

    입력2011-08-19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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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라비아반도 주변 지역을 정복한 후 아랍인이 처음 세운 이슬람 우마이야 제국은 최초의 아랍 도서관 문을 열었다. 연금술, 의학 등 과학 분야 관련 그리스어 기독교 서적을 수집, 보관하면서 서서히 문명의 디딤돌을 놓았다. 우마이야조(朝)의 뒤를 이어 집권한 압바스조 시대(750~1258년)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 유례가 드문 ‘과학 황금시대’를 이룩했고, 8세기 후반부터 15세기까지 지속된 중세 아라비아 과학 발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문명의 주인공이 바뀌는 가운데 인류는 과학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고, 이슬람 문명은 중세 문명을 담당한 주역이었다. 아라비아 숫자나 세계 지도, 알칼리 등의 화학용어 등은 이슬람 문명이 전해준 과학문명의 결실이었다.
    중세 암흑시기에 이슬람은 문명을 밝혔다

    압바스 왕조 한때 수도였던 사마라(이라크 북부지역)의 대형 미나레트.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지은 모스크 부속건물이다. 높이 36m.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인류는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앞서 창출된 지식의 가치를 고려해 그것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수하는 과정을 통해 과학지식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인류 과학의 출발은 보통 기원전 4000년경 발생한 중동지역의 고대 오리엔트 문명(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과 인더스 문명, 중국 황하 문명 등 강을 낀 고대 문명에 두고 있다. 특히 이집트인과 수메르인은 수학, 자연과학, 의학 등 과학지식을 탄생시킨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중동과 가까운 그리스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적인 문명을 창출해 이후 서양 문명의 모체가 되는 그리스 문명을 이룩해 냈다.

    민주적 제도와 자유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는 고대 오리엔트의 언어를 이용해 개발한 알파벳 문자를 통해 지식을 넓혔고 문학, 철학, 예술 외에 자연과학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거두었다. 그렇게 축적된 그리스의 과학지식은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의 동방 정복을 통해 오리엔트의 건축술, 의술 같은 실증적 지식과 결합해 세계화된 헬레니즘 과학으로 발전했다. 당시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수학, 역학, 천문학 등을 포함하는 헬레니즘 과학의 중심지였다. 로마 시대에는 주로 그리스의 과학과 기술이 응용됐으며, 여전히 활동하던 그리스 과학자들에 의해 고대 과학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후 중세에 들어와서 유럽은 봉건제도와 기독교 교의의 지배하에 과학기술을 포함하는 그리스 고대 문명의 지적 성과가 빛을 잃는 암흑시대(400~ 1000년경)를 맞이했다. ‘천상의 왕국’을 꿈꾸는 기독교 신학의 영향으로 중세 과학은 ‘비참한 모양’을 면치 못했으며, 그리스 사상과 과학지식은 학문에서 배제됐다. 인류가 4000년 이상 쌓아왔고 그리스가 종합하고 발전시킨 엄청난 과학지식이 자칫 역사에서 매몰될 뻔한 시기가 바로 중세였다. 소중한 그리스 과학 유산이 사라질 위기의 시기에 고전 문명 지식의 파수꾼을 자처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이슬람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 국가의 터전을 다지기 시작한 아랍인들은 우마이야조, 압바스조가 통치하는 두 제국을 연이어 세웠다. 그들은 종교를 세계관의 중심으로 삼으면서도 학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바그다드에 수도를 정한 압바스조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그리스를 비롯해 페르시아, 인도의 고대 과학 지식을 모으고 보완해 최고 수준의 학문을 이룩했다. 이 글은 이러한 압바스조가 지녔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살펴봄으로써, 고대 문명의 계승과 통합 및 인류 과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슬람 문명이 수행한 역할과 그 위상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400~1000년 기간이 중세 유럽에서 학문의 암흑기라고 한다면, 750~900년의 기간은 이슬람 문명권의 핵심 세력인 압바스조가 이끄는 학문의 전성기였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인류가 쌓은 학문의 성과를 유럽이 방치하던 기간에 아랍인들은 그것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고 열의를 다해 그것을 수집, 보관, 보충, 심화하는 학술 작업에 몰두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일신 종교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중세 동안 서구 유럽에서 과학은 기독교 신학에 억눌려 퇴보한 데 반해, 동쪽의 바그다드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지식을 생산했다. 그러한 차이는 이슬람의 관용적 특성과 이슬람 영토의 확대, 이슬람 제국 통치자들의 개방적 태도 등에서 생겨났다.

    무함마드 “지식을 구하라”

    우선 이슬람은 지식 탐구를 공개적으로 권장하는 입장을 취하는 종교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서는 그러한 취지로 “지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같을 수 있느냐?”(39: 9)라는 구절이 있으며, 예언자 무함마드도 자신의 언행록 ‘하디스(Hadith)’에서 “지식을 구하라. 중국에 가서라도”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다”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값지다” “학자는 예언자들의 진정한 후계자”라며 지식탐구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 세계 각지에서 온 무슬림들이 성지 메카에서 모이는 ‘핫즈(Hajj·순례)’ 또한 다양한 사고와 학문, 문화를 교류하는 세계적 시장으로 여겨졌다. 물론 이슬람 교의에 대한 지식을 우선시하지만 이슬람교는 전반적인 학문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향후 무슬림들이 이슬람 국가 발전에 필요한 지식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이는 과학 지식은 단지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며 학문을 등한시한 중세 기독교의 태도와는 대조되는 진취적인 태도였다.

    아랍인의 광대한 지역에 걸친 정복 사업의 성공적인 결과 또한 학문 진작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632년)하고 나서 30년도 안돼 아랍 군대는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점령했으며, 당시 그 지역에서 동로마와 더불어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 사산조 제국(224~651년)을 멸망시켰다. 이후 계속된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의 정복사업으로 이슬람 제국의 영토는 732년 무렵 역사상 최대인 중앙아시아, 인도에서 스페인과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대됐다. 아랍인이 정복한 영토는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차지했던 영토이며, 이후 로마인들과 비잔틴인들이 지배했던 곳이었다.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유프라테스 강 동부의 페르시아와 ‘비옥한 초승달 지역’, 그리고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의 통합으로 고도의 헬레니즘 문명이 만개했던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고대 이집트 문명, 고대 페르시아 문명, 헬레니즘 문명, 인도 문명 등 앞서 나타난 고대 문명들이 융합된 지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게 된 이슬람 제국은 이미 축적된 지식에 힘입어 제국을 발전시킬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슬람이 등장해 오늘날의 중동 일대를 통합하기 이전에 이 지역에는 동양을 대표하는 페르시아와 서양을 대표하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간에 여러 시대를 거쳐 늘 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비잔틴과 페르시아 간의 오랜 전쟁(570~630년)은 동서 문물의 교류와 교역을 막았고 이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이슬람의 광범위한 영토 점령으로 이집트-페르시아-인도를 잇는 길이 열리자 다시 ‘문명의 강’은 그 흐름을 되찾았고, 이를 통해 동서 간에 농산물, 원자재, 제조 물품, 용역, 기술, 사고와 사상 등의 문물이 자유로이 만나게 됐다.

    이러한 ‘팍스 이슬라미카’(pax Islamica·이슬람 평화시대)에 이슬람 제국 안에서는 무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더욱이 농업 분야는 최대의 혜택을 받게 됐다. 이슬람권에 들어간 인도와 동부 지중해 지역 간 교류가 원활해지면서 서남아시아와 지중해권으로 많은 농산물이 수입되었고, 또한 농업 기술과 지식이 도입됐다. 활발한 무역을 통한 이익이 일부 상인 계급에 국한된 것에 반해 농업의 발전은 모든 계층 사람들에게 부와 식생활의 향상을 가져다주었고, 이는 이슬람 제국의 경제적 안정에 기여했다.

    탈라스 전투 승리로 제지술 전파

    아랍인의 정복사업이 인류문명 도약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 예는 바로 종이의 도입이었다. 751년 압바스조의 이슬람 군대와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맞붙은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는 이슬람 측에 돌아갔다. 이때 포로로 잡힌 약 2만명의 당나라 병사 중에는 제지술을 알고 있던 자들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에 처음으로 제지술이 도입됐다. 이후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다마스쿠스까지 전파됐다. 압바스 시대 첫 수십 년간 종이는 파피루스 등과 같은 이전의 기록용 재료를 급속도로 대체했으며, 통치부 지도자들은 종이의 사용을 후원하라고 지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개발된 여러 종류의 종이에 압바스조 당시 외국문헌 번역 사업을 후원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자으파리, 딸히, 따히리 등의 명칭이 붙여졌다는 것. 이를 보더라도 종이의 전파는 8세기 중엽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동서 문헌의 번역운동을 통한 지식의 확산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랍인의 중동지역 정복으로 알렉산더 대왕 이래 1000년간 헬레니즘 영향권 하에 있던 지역과 그 안의 민족들이 통합됐던 반면, 비잔틴 로마(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존속하면서 이슬람 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 내 기독교 교회의 분열은 역설적으로 이슬람 제국의 학문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311년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뒤 신학상 교리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승인한 칼케도니아 공의회 결정을 정통파 교리로 채택하고, 거기에서 벗어난 네스토리우스 신학파(그리스도 양성론)나 알렉산드리아 신학파(그리스도 단성론-그리스도는 신성만 갖는다는 이론) 등을 배척했다.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이 정통파 교리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다른 기독교 분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로 인해 옛 시리아어를 말하는 네스토리아파 사람들이 페르시아 지역으로 옮겨가는 등, 비잔틴 제국 내에서 탄압받던 기독교도들은 종교 탄압이 없는 이슬람 제국으로 옮겨가 살면서 자신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나 옛 시리아어를 통해 이슬람 문명 발전의 협력자가 됐다. 비잔틴 제국이 7, 8세기에 헬레니즘에 반감을 갖게 되면서 기존 헬레니즘 사상을 접했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제국으로 옮겨가 칼리프(Khali-fah·이슬람 제국의 통치자)의 보호를 받으며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다.

    번역활동 통한 눈부신 과학의 발전

    중세 암흑시기에 이슬람은 문명을 밝혔다

    1571~72년 제작된 이슬람 세계지도.

    7, 8세기 아랍의 정복 후 이슬람권에 들어온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북부 메소포타미아, 서부 페르시아 등 동방 기독교 지역의 주요 도시들에서 옛 시리아어를 말하는 기독교도들은 이미 세속적인 그리스 학문을 철저히 익힌 상태였다. 이제 그들은 정통파 기독교도들의 교리 논쟁과는 무관하게 문화적으로 다른 계열인 그리스 학문을 마음껏 추구했다. 그리스 학문 연구가 이루어지던 주요 도시로는 에뎃사(Edessa), 모술(Mosul), 준디사부르(Jundisabur), 알히라(al-Hira), 하란(Harran), 마르우(Marw) 등이 있으며, 특히 하란은 10세기까지 다신교를 믿으면서 많은 그리스 사상과 신앙, 관행을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도시들에서 그리스 학문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대해 당대 유명한 기독교도 의사였던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Hunayn ibn Ishaq·809~877)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수업과 비교해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생들은 매일 모여 텍스트를 읽는다. 이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도 동료들이 매일 모여 고대인들이 지은 텍스트를 읽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이 모든 도시는 정치적, 행정적으로 통합됐고, 그곳에서 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지속할 수 있었다. 7, 8세기에 이슬람 제국의 전역에서는 다양한 민족의 학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여러 언어로 활동한 것이다.

    아랍 정복으로 인해 정치적, 종교적 장애물이 제거된 새로운 환경에서 활동한 이 학자들의 특징은 전통적 학문 분야의 살아 있는 대표주자들로서 각 분야의 전문가였다는 점이다. 다국어를 구사했던 그들은 그리스어 외에 옛 시리아어나 페르시아어 같은 다른 언어들로 쓰인 과학 문헌들을 볼 수 있었으며, 서로 만나 교류할 수 있었다. 압바스조가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번역 사업을 지원하는 결정을 하면 궁정에는 이러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아라비아반도 주변 지역을 정복한 후 아랍인이 첫 번째로 세운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조는 일정 범위에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수도 다마스쿠스에는 최초의 아랍 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연금술, 의학 등 과학 분야 관련 그리스어 기독교 서적들이 수집, 보관됐다. 초기 우마이야조는 과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이슬람법과 의학 실습에 집중됐으며, 특히 의학 분야에서 우마이야조는 시리아와 페르시아 출신의 기독교도 의사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다만 그리스어나 페르시아어 자료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활동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시대의 필요에 의해 임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그리스어나 페르시아어를 말하는 피지배층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에서 행정, 관료, 정치, 상업상의 문서를 번역하는 일에 국한됐다. 우마이야조에서는 다른 언어로 쓰인 과학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마이야조의 뒤를 이어 집권한 압바스조 시대(750~1258년)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 유례가 드문 ‘과학 황금시대’를 이룩함으로써 8세기 후반부터 15세기까지 지속된 중세 아라비아 과학 발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 세계 문명의 한 축을 이루는 주요 문명권으로서 이슬람 세계에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 공학, 화학, 의학, 철학 등 여러 과학 이론과 실용적 발명이 동과 서에서 유입된 뒤 다시 발전된 형태로 주변에 전해졌다. 과학이 가장 번성했던 8세기 후반부터 9세기(750~900년) 기간은 바로 압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제국 전역에서 왕성한 번역활동이 전개된 기간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앞서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인도인들이 이룩한 상당량의 과학 지식을 담은 문헌에 대한 활발한 번역 작업을 통해 압바스조는 이전의 지식을 종합하고 발전시켜 이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8세기 중엽에 시작된, 주로 그리스어 문헌의 번역을 목표로 하는 번역 운동은 압바스조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 운동은 그리스어·아랍어 문헌학과 철학, 과학사 분야에서의 중요성을 차치하더라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사회적 현상이었다는 것 말고는 설명될 수 없다. 다만 후원자들이 자금을 투자해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재정, 농업, 공학 사업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져올 이익을 고려했거나, 또한 그러한 문화 사업 후원을 통해 그들이 사회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마도 그 운동은 압바스조가 초기에 과학 지식의 확산을 통해 사회의 공공 이익을 실현하고 보편 문화를 지향하려 했던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압바스조 치하에서 그리스어-아랍어 번역 운동은 2세기 이상 원만하게 지속되었던 것으로, 단기간에 그친 현상이 아니었다. 그 운동은 압바스 시대에 사회 전반의 엘리트층, 즉 칼리프, 왕자, 문관, 군 지도자, 상인, 금융인, 학자, 과학자들의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제한된 분야의 연구를 위해 특정 그룹이 수행하는 특정의 연구계획은 아니었다. 그 운동은 엄격한 학문상의 방법론과 철저한 문헌학적 정확성을 지키며 이루어졌고,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되는 지속적인 일정과 계획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압바스조 시대에 과학 발전의 불을 붙인 주인공은 수도 바그다드를 창건한 2대 칼리프 알 만수르(Abu Ja′far al-Mansur·재위기간 754~775년)였다. 아랍 역사가 사이드 알 안달루시(Said al-Andalusi)는 “이 왕조에서 과학을 개발한 최초의 사람은 2대 칼리프 알 만수르였다. 그는 논리학과 법학에 심오한 지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철학과 관측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 두 분야와 그 방면의 학자들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리프 알 만수르는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학자들의 고전 저작들을 포함하는 다수의 외국 저작물을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으며, 향후의 연구를 위한 지침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만수르는 외국 서적의 번역과 복사, 연구, 보관을 위해서 페르시아 군주들의 업적을 모방해 왕립 도서관을 건립했다. 이 도서관은 학술 업무를 수행하는 학자들을 위해 작업 공간 제공, 행정 지원, 재정 보조 업무를 관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 7대 칼리프 알 마으문(al-Ma′mun·재위기간 813~ 833년)이 세운 과학연구소인 ‘바이트 알히크마(Bayt al-Hikmah·지혜의 전당)’의 기원이다.

    7대 칼리프 알 마으문의 활약

    칼리프 알 마으문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것은 집권 전에 알 마으문이 꿈에서 의자에 앉은 붉고 흰 피부의 한 남자를 본 것이다. 알 마으문이 그자에게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답했다. 알 마으문은 기뻐하며 “오, 철학자시여. 선(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고, 철학자는 “선한 것이란 지성(知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라고 했다. 다시 알 마으문이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선한 것이란 대중(大衆)의 의견 속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칼리프 알 마으문의 지적 성향을 암시하는 한편, 그가 국가 정책에 학문을 어떻게 반영했을지 충분히 추측 가능하게 한다. 즉 그는 스스로 학문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강했던 통치자로서, 진정으로 학문을 중시했고 이슬람 세계의 발전은 물론 향후 인류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기록된다.

    칼리프 알 마으문 이전에 이슬람 제국에서 과학적 관심은 주로 실용적인 면에 국한되었다. 일례로 우마이야조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기독교도나 유대교도 의사를 고용했다. 또한 궁정 내 학자들은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시간 정하기, 기도를 위한 메카 방향 찾기, 이슬람 명절 시기를 파악하기 위한 달(月)의 모양 추적 등 이슬람교에 관련된 실용적인 목적으로 고용됐다. 그런데 알 마으문의 치세 기간 중 학문 풍토는 급변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문화 환경이 생겨났다. 알 마으문은 학자들의 말을 경청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쓴 고대 문헌의 중요성을 알기에 먼 곳으로 사신들을 보내 자료들을 구해오도록 했다. 또한 전쟁에서 적국 통치자가 패색이 짙을 경우 알 마으문은 그 자의 항복 조건으로 금 대신 적 진영 도서관의 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알 마으문은 세상의 책들을 끌어 모아 학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연구하게 하는 일에 거의 광신적으로 열정을 쏟았다. 그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창안한 연구기관이 학문의 황금시대를 축약한 ‘지혜의 전당’이었다. ‘지혜의 전당’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초기의 아카데미(고등 교육·연구기관)처럼 도서관 이상의 기관으로 한 지붕 아래 우수 학자들을 유치하고 세상의 지식을 집성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종이가 도입되고, 번역 출간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9세기 중엽 ‘지혜의 전당’은 당시 세계 최다 서적을 보유한 도서관이 됐다. 열정적인 칼리프와 압바스조 사회의 관용적인 후원으로 번역 사업은 속도를 내면서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역사에서 학문의 혜성 같은 명사가 몰려들었다. 바그다드는 학문 활동의 허브가 되어 향후 몇 세기간 아랍과 페르시아의 최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을 끌어들였다.

    안과학 최초 교재와 대수학의 탄생

    알 마으문 통치시기에 번역운동은 무르익어, 페르시아의 천문학 텍스트나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유명 텍스트 번역을 넘어서게 되었다. 일부 중요한 그리스 문헌들은 2차, 3차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텍스트의 주제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각 문헌의 번역도 더욱 주의 깊고 세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럼 단순한 번역가를 넘어선 몇몇 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의사인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877년 사망)는 자신의 아들, 조카와 함께 번역팀을 만들어 종합적인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팀이 번역한 서적들 중에는 플라톤의 철학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서들,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수학 관련 연구서 등이 있다. 특히 그는 고대 그리스 의학자 갈레노스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정맥과 동맥의 해부에 관하여’ ‘신경의 해부에 관하여’ 등과 같은 갈레노스의 중요한 저작들을 번역했다. 후나인은 번역에 자신이 독창적으로 발견한 연구결과를 추가하기도 했는데, 그중에 860년경 쓰인 ‘눈(目)에 관한 10편의 논문’은 인간의 눈에 대한 최초의 해부도가 있는 책으로, 안과학에서 최초의 체계적인 교재로 간주된다. 후나인의 번역을 통해 당대와 이후 이슬람 세계와 유럽 기독교 지역에서는 갈레노스 의학이 지배적인 추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대수학(代數學)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알 크와리즈미(Muhammad ibn Musa al-Khwarizmi·850년경 사망)는 ‘지혜의 전당’에서 번역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로 근무했다. 페르시아인인 그는 아랍인들에게 인도 숫자를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지리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그의 최대 업적은 대수학(algebra)에 관한 탁월한 저서였다. 용어 algebra(엘저브러)도 그의 저서 ‘키탑 알 자브르(Kitab al-Jabr·등식 계산에 관한 책)’의 아랍어 제목에서 유래한다. 이 책에서 그는 대수 방정식을 푸는 법칙과 단계를 최초로 설정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algorithm(알고리듬, 연산)으로 알려져 있다. 계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알고리듬은 알 크와리즈미의 라틴어식 이름 알고리트무스(Algorithmus)에서 유래한다.

    다방면에 박학한 철학자 알킨디(al-Kindi·800~873년)는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번역, 주해해 아랍인에게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 크와리즈미와 함께 인도의 10진법을 이슬람 세계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칼리프 알 마으문은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로 바그다드에 천문관측소를 세웠으며, 이 분야 학자들의 공동연구를 개인적으로 재정 지원하고 연구진행 상황을 관심 있게 주시했다. 이와 관련해 과학 분야에서 그의 진정한 치적을 든다면 그것은 그가 국가적 규모의 재정 뒷받침을 요하는 ‘거대과학(big science)’에 재정지원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지혜의 전당’에서는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150년경 사망)의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탁월한 저작 ‘수학적 집성(Syntaxis mathematica)’이 ‘알마게스트(Almagest·위대한 책)’라는 아랍어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알 마으문은 천동설을 중심으로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학자들에게 천문 관측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단의 연구팀이 조직되어 천문관측소에서 태양과 달 관측이 진행됐고, 24개 항성의 경도와 위도를 포함하는 천체표가 작성되었는데, 그 결과물이 ‘실증된 천체표(al-Zij al-Mumtahan)’로 알려져 있다.

    압바스조는 중세 문명 발전사의 주역

    또한 알 마으문의 학자들이 번역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위대한 저서 ‘지리학’도 이슬람 지리학 연구의 발판이 됐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 지도는 메카, 바그다드 같은 중요한 이슬람 도시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대서양, 인도양을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로 그리고 있는 등 불충분하거나 부정확했다. 알 마으문은 학자들에게 천문 관측과 수학에서 이룩한 성과에 비추어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도록 명했고, 그 결과 500개가 넘는 도시의 위도와 경도 및 강, 바다, 산 등의 위치가 표시된, 정확한 새로운 세계 지도가 제작됐다. 이외에도 알 마으문의 지시에 따라 과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에서 인용된 거리 측정 이론을 활용해 지구의 원주를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알 마으문의 통치 기간 중 절정에 달했던 과학 연구는 이후 후대 칼리프들에 의해 지속되어 중요한 연구물들이 산출됐다.

    압바스조의 바그다드에서 불붙기 시작한 학문의 열기는 당대와 이후 이슬람권에 있던 카이로, 안달루스(스페인 중남부)의 코르도바, 사마르칸트 등의 도시로 확산됐다. 바그다드에서 번역·연구는 750~900년경 절정에 달한 뒤, 이후 몽골의 바그다드 침략(1258년)으로 압바스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한편 안달루스 등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 과학 연구는 15세기까지 지속됐고, 그 성과는 중세 기독교 시대의 긴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는 서구 유럽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12세기에 들어와 유럽은 중세 이슬람 학자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과학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해 그 안에 고스란히 보전된 고도의 지식을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이로써 유럽은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의 물결을 타고 과학 기술 분야에서, 그리고 그 지식을 이용한 산업 발전을 통해 근대에 세계의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었다.

    이렇듯 인류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주도적인 문명의 주인공이 바뀌는 가운데 인류는 과학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켜왔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 문명은 중세 문명을 담당한 주역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늘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나 가끔 참고하는 세계 지도, 자주 접하는 알코올, 알칼리 등의 화학 용어 등 과학과 관련된 일상의 여러 부문에서 압바스조 시대에 ‘지혜의 전당’에서 학자들이 과학 연구에 힘쓴 결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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