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 키우고 싶어도 구할 수 없어요”
- 꿀벌에게 장뇌삼 달여 먹이는 이유
- 지리산에 머루·다래가 사라졌다
- 꿀벌 멸종은 곧 인류의 종말
벌의 수분작용이 없으면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다. 벌이 꿀을 따기 위해 꽃에 내려앉은 모습.
‘꿀벌 에이즈’라고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囊蟲蜂兒腐敗病)은 벌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기 전 말라죽게 만드는 질병. 토종벌(土蜂)과 서양종벌(洋蜂)로 구분되는 꿀벌 중에서 토종벌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강원도에서 발병이 공식 확인된 뒤 무서운 속도로 확산돼 현재 전국 토종벌의 93%가량을 폐사시켰다. 토종벌 최대 산지인 지리산 일대 경남 함양, 전북 남원, 전남 구례 등에서는 살아남은 벌이 전무할 정도. 이성희씨는 “기르던 벌이 지난해 모두 죽었다. 올해 다시 시작하려 했는데 전국적인 품귀현상 때문에 종자 벌을 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토종벌은 충북 등 중부 일부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곳 역시 감염이 확산돼가는 추세다.
문제는 바이러스 질환으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는 점. 예방조치에 실패해 벌통 하나가 감염되면 전체 벌이 폐사할 때까지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다. 벌통 하나당 3만~4만 마리씩 모여 사는 토종벌 생태에 비춰볼 때, 1000통 이상 벌을 키우는 농민은 최대 수천만 마리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양봉 농민한테 벌은 가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이름 붙여주고 기르는 건 아니지만 그놈들이 비실대다 죽어나가는 걸 보면 가슴이 무너져요.”
충북 옥천의 양봉 농민 오승환씨는 “벌을 70통쯤 길렀는데 지금은 다 죽고 20통 남았다. 그중 19통도 이미 감염돼 오늘내일 하는 상태”라고 했다. “마지막 남은 한 통에 기대를 걸었는데 요즘 농장에 열흘 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불안하다”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3대째 토종벌을 길러왔고, 토종벌 분야 농민으로는 유일하게 ‘신지식인’으로도 선정된 김대립씨의 충북 청원 농장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한때 1000통 넘게 벌을 기르던 그는 “지난해 9월 감염이 시작돼 이제 350통 남았다. 벌과 함께 자랐고 양봉 전문가라고 자신한 터라 무력감과 비애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있기만 하면 온 세계를 뒤져서라도 약을 구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그는 지난 5월, 중국에 효능 좋은 약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현지에 다녀오기도 했다. 낭충봉아부패병은 중국, 태국 등에서 오래전부터 유행한 질병으로 관련 분야 연구에서 중국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 김씨는 “유명하다는 약을 전부 구해 오는 데 1000만원쯤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약들을 희석해 벌통 안에 넣어주고 있다.
장뇌삼 먹는 벌
전국 토종벌 농가들이 지난해 경기도 과천 정부청사 운동장에서 토종벌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 이들은 낭충봉아부패병을 특별 농업재해로 인정하고 피해농가에 보상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충북 옥천의 양봉 농민 김미연씨는 “이 안내문을 보고 바로 6년근 홍삼진액을 사다 먹였다. 가짜를 줬다가 오히려 더 탈이 나면 어쩌나 싶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 제품을 구입했다”고 했다. 김씨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프랑스산 영양제가 좋다는 글을 보고 500g에 7만원 하는 약도 구입해 먹이고 있다고 했다. 농민 오승환씨도 “산에서 영지버섯을 따다가 달여 먹이기도 한다. 벌이 살기만 한다면 뭔들 못 하겠느냐”고 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벌을 살린 사례도 있다. 전남 구례 농민 고인상씨는 지난 6월 낭충봉아부패병 확산 이후 처음으로 종자벌 증식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그가 벌에게 먹인 것은 ‘장뇌삼, 더덕, 곰취, 헛개나무, 오가피, 질경이, 하얀민들레, 산마늘, 달래, 찔레, 복분자’ 등 18개 재료를 섞어 발효시킨 효소. 50년 이상 벌을 쳐온 선배 농민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꿀벌 에이즈’로 모든 벌을 잃은 고씨가 동료 농민들과 함께 다시 양봉에 도전한 건 지난 2월. 두 달간 전국을 돌며 감염되지 않은 토종벌 200통을 구한 고씨 등은 이것을 전남 광양시, 보성군, 고흥군 등 청정지역으로 옮긴 뒤 위의 보약을 먹이며 정성을 다해 키웠다.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이산화염소와 은나노복합제(colloid silver)를 사용해 소독하는 등 바이러스 퇴치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여왕벌이 일벌들을 끌고 나와 새 무리를 형성하는 ‘분봉’에 성공하면서 애초의 200통이 500통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들은 새로 생긴 300통 가운데 150통으로 육종사업을 계속하고 나머지 150통은 일반 농가에 분양했으나, 이 벌들은 현재 대부분 폐사했다. 전국적인 바이러스 창궐 속에서 벌을 살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사례다.
개량형 벌통
농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약’과 ‘소독’에 매달리고 있다. 역시 지난해 대량 감염 사태 때 벌을 잃은 뒤 최근 종자벌을 구해 양봉을 재개한 전북 남원의 농민 모춘재씨는 “농가에 방문해도 좋으냐”는 질문에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8월 열린 농촌진흥청 설명회에서 최용수 연구사가 가장 강조한 것도 ‘예방’이다. 꿀병질병관리센터 매뉴얼에는 “애벌레가 한두 마리씩 떨어질 때 주저하지 말고 애벌레 있는 방을 잘라내 소각하라. 소각할 수 없으면 땅에 묻어라. … 떨어진 애벌레는 반드시 소각해야 한다. 감염된 애벌레 한 마리가 성봉(큰벌) 10만 마리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최용수 연구사는 나아가 애벌레가 벌집 밖으로 떨어지기 전부터 감염을 확인할 수 있는 개량형 벌통을 사용하라고 권했다. 전통적인 형태의 벌통은 벌집이 고정돼 있다. 반면 개량형 벌통은 벌집을 움직일 수 있어 농민이 벌통 내부 상황, 즉 여왕벌의 산란과 애벌레 감염 등을 살펴볼 수 있게 돼 있다.
분업을 바탕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꿀벌 사회에서 일벌이 담당하는 역할 중 하나는 청소다. 이 임무를 맡은 벌들은 애벌레나 성충이 벌통에서 죽을 경우 냄새와 부패를 막기 위해 신속히 사체를 벌통 밖으로 내다버린다. 꿀벌은 질병에 감염되거나 노쇠하면 스스로 밖에 나가 죽음을 맞는 습성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낭충봉아부패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통은 성충이 나가고, 새로 태어난 애벌레는 밖으로 버려져 결국 텅 비게 된다.
최 연구사는 “새로운 형태의 벌통을 사용하면 병에 걸린 애벌레를 발견하는 즉시 여왕벌을 격리시킬 수 있다. 이렇게 열흘 정도 산란을 막아 새로운 애벌레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고, 이미 감염된 애벌레를 제거하면 벌통의 바이러스 밀도가 크게 감소해 추가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촌진흥청이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충북 충주에서 이런 방식으로 벌통을 관리한 결과,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6개 모두 추가 감염률이 0%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청이 “토종벌을 구할 획기적인 대책”이라고 밝히고 전국 농민들을 대상으로 설명회까지 연 이유다. 이에 대해 농민 김미연씨는 “전에도 벌통을 바꾸라는 말을 듣고 개량형 벌통을 구입해 벌들을 옮겨줬지만 다시 감염된 적이 있다. 이번엔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2007, 2008년부터 뭔가 이상한 병이 돈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벌은 죽어나가고, 원인은 알 수 없고…. 안 해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이 정부가 나서서 벌 기르는 법을 알려준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김미연씨의 말이다. 농민들은 바이러스 확인 2년 만에 국내 토종벌산업이 사실상 붕괴하다시피 한 데는 정부의 책임이 작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전국 토종벌의 90%가 사라진 뒤에야 낭충봉아부패병을 가축전염병으로 고시했다. 지난해 9월 240억원 규모의 저금리 융자, 기술교육비 지원, 방역체계 구축 등을 대책으로 내놓았을 때는 이미 상당수 농민에게 방역할 벌통조차 없는 상태였다.
2차 피해 확산
국내 토종벌 분야 유일의 신지식인인 김대립씨가 벌통을 들고 있는 모습. 그의 농가도 낭충봉아부패병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토종벌 농가에 큰 타격을 입힌 낭충봉아부패병은 과수·채소·화훼농가 등에 2차 피해도 주고 있다. 식물의 약 40%는 곤충의 수분(受粉)작용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 수분의 80%는 꿀벌이 담당한다. 세계 100대 농작물의 71%가 꿀벌을 통해 수정된다는 통계도 있다. 꿀벌이 줄어들면 당장 농업에 차질이 생기는 셈이다. 2008년 안동대 조사 결과 우리 농업에서 꿀벌이 수분 작용에 기여하는 경제적 가치는 약 6조원으로 평가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과일·채소류 가격이 폭등했을 때부터 농민들 사이에서는 “토종벌 집단폐사가 원인일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올해는 그 양상이 훨씬 뚜렷하다. 전국 배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전남 나주배 농가 중 상당수가 올해 꽃가루를 구입해 인공 수분을 실시했다. 중국산 가격이 1㎏당 200만원에 달할 만큼 추가 비용이 막대했지만 착과율은 자연 수분 때만 못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강원도 춘천의 사과 농가도 비상이다. 춘천시농업기술센터가 지난봄 사과 재배농가의 개화 상황을 표본 조사한 결과 1000㎡당 평균 꽃 수는 1만2800개로 전년의 60% 수준에 그쳤다. 전국 매실 생산량의 약 30%가 나오는 전남 광양 매실 농가도 과실 수가 예년보다 줄어들었다. 농민 김대립씨는 “대추를 기르는 농민에게서 올해 대추가 유난히 안 열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벌 때문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모든 과일이 안 되는 건 사실인 것 같다”고 했다.
토종벌을 구하라
낭충봉아부패병이 토종벌을 폐사시키고 있을 뿐, 서양종벌은 건재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농업진흥청 기술경영과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꿀벌을 기르는 가구는 2009년 현재 3만534가구다. 이 가운데 토종벌 농가는 1만7368가구로 서양종벌 농가 1만7956가구보다 다소 적다. 토종벌 농가 가운데 부업이나 취미로 벌을 기르는 가정이 많아 벌통의 개수는 서양종 쪽 4분의 1수준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서양종벌이 있다고 해서 우리 농업의 위기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이명렬 농촌진흥청 잠사양봉소재과장에 따르면 토종벌과 서양종벌은 전혀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토종벌의 경우 크기가 작고 꿀을 모으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반면 우리 환경에 잘 적응돼 있으며, 한 장소에서 여러 꽃과 풀을 옮겨 다니는 방식으로 꿀을 생산한다. 반면 서양종벌은 아카시아꽃 밤꽃 등을 좋아한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꽃의 개화시기에 맞춰 벌통을 해당 지역으로 옮겨가며 단일꽃 꿀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농민 김미연씨는 “토종꿀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벌들이 청정지역에서 갖가지 풀꽃, 약초를 돌아다니며 꿀을 만들기 때문”이라며 “이 과정에서 수분이 이뤄지고 머루·다래 등 산간지역의 자생 유실수도 열매를 맺는데, 토종벌이 사라지면 이런 생태계 순환 과정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토종벌 폐사가 대규모로 확산된 지리산 지역의 경우 이미 머루·다래 보기가 예년에 비해 크게 어려워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토종벌이 전멸하면 향후 서양종벌을 공격하는 질병이 생겼을 때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서 ‘중국 가시응애’라는 꿀병 질병이 건너온 적이 있다. 당시에는 서양종벌의 개체수가 크게 줄었고, 토종벌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이 때문에 두 벌이 함께 생태계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토종벌 산업을 되살릴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꿀벌의 감소와 이로 인한 생태계 위기는 현재 세계적인 문제다. 미국에서는 2005년 무렵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꿀벌 집단 폐사가 시작돼 1년 사이에 22개주의 꿀벌 수가 25~40% 감소했다. 이후 농업 수확량이 급감해 과일·채소 값이 치솟았고, 미국에서 주로 생산되는 아몬드 블루베리 등의 수확량 감소로 세계 아이스크림 가격까지 올랐다. 이외에도 타이완, 뉴질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군붕괴증상(colony collapse disorder)이 확산 중이다. 전문가들은 기생충과 바이러스 감염, 농약 중독, 면역 결핍 등을 이 현상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이명렬 박사는 “휴대전화 전자파 등을 문제로 지적하는 학자도 있으나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다. 분명한 건 꿀벌이 사라지면 작물과 목초의 재배 면적이 감소하고 식량과 가축 생산이 줄어 결과적으로 인류의 식량 수급에 큰 위기가 생긴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멸종하고 인류도 4년 이상 버틸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농민들은 정부가 이제라도 토종벌을 보존하고 확산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토종벌 분야 신지식인 김대립씨는 “낭충봉아부패병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토종벌 생태에 대한 연구 자료가 거의 없었다. 벌의 사육관리지침도 서양종벌을 표준으로 삼아 정해져 있었던 게 현실이다. 충북 등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벌들이 다 죽기 전에, 이제라도 산학연 협력 연구체제를 구축해 토종벌에 맞는 질병 예방법과 치료법 등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종벌 농가에서 벌에게 영양제를 주는 모습(왼쪽). 농민들은 ‘보약’을 먹여서라도 벌이 살아나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