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낭만적인 요소와 선율적인 요소,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가진 가장 연극적인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나비부인’ ‘토스카’ ‘라보엠’ 등 그의 주옥같은 오페라 12작품은 우리 귀에 친숙하다. 비록 이탈리아어를 못해도 그가 보여주는 음악의 입체적인 영상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것은 그가 창조한 주인공들이 바로 대중이 열광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악으로 대비되는 양면적인 여인들이 아닌, 성격은 다를지라도 모두들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결정하고 대처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들이 주인공이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
자코모 푸치니(1858~1924)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로 생전에 주옥같은 오페라 12작품을 남겼다. 주요 레퍼토리인 ‘나비부인’ ‘토스카’ ‘라보엠’ 등은 우리 귀에 친숙하다. 낭만적인 요소와 선율적인 요소,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가진 가장 연극적인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비록 이탈리아어를 한 마디 못해도 푸치니가 보여주는 음악의 입체적인 영상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푸치니가 태어난 1858년은 이탈리아가 1차 통일이 되기 3년 전으로,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격변의 시기였다. 고대 로마 제국이 붕괴된 476년부터 이탈리아반도는 하나의 단일국가가 아닌 조각조각 나뉜 도시국가 형태로, 혹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신세로 1000년이 넘도록 지속됐다. 중세시대에는 종교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었기에, 마키아벨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국가관을 내세우면서 대의를 위한 전국 통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도시국가 간, 혹은 가문 간 세력다툼이 난무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이룬 르네상스의 인간중심사상이 유럽의 판도를 바꾸어놓았을 때에도, 이탈리아반도 사람들은 자국의 사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메디치 가문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도시국가 이탈리아
그러던 중 이탈리아는 프랑스혁명으로 전파된 자유와 평등사상에 무한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타난다. 나폴레옹이 태어난 1769년의 코르시카 섬은 원래 이탈리아령(領)이었다. 이탈리아인에게 이탈리아식 이름인 보나파르테로 친근하게 다가온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침공해 이탈리아반도 전체와 시칠리아 섬을 프랑스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상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초창기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략할 때, 수많은 지성인은 그가 혁명의 이름으로 조국을 해방시키러 오는 자유주의자라고 믿고 구체제에 항거했다. 푸치니는 그의 5번째 작품 ‘토스카’에 이 혁명사상으로 불타는 시기를 담았다. 1800년 6월 어느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주인공 토스카의 애인인 화가 카바라도시는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로 나온다. 로마를 다스리는 나폴리왕(당시 왕비는 프랑스혁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동생이었다)에 대한 반역죄와 경찰서장의 질투가 실타래처럼 뒤엉켜, 화가 카바라도시는 로마 천사의 성에서 총살당하고 토스카는 자살하는 비극적 내용이다.
독일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도 그의 교향곡 3번 영웅(Symphony No.3 in E flat Major, ‘Eroica’ op.55)을 자유주의자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다가 그의 정복 야심에서 비롯된 무자비한 전쟁을 겪고는 나폴레옹 이름이 나오는 앞장을 찢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듯 1900년에 오페라 ‘토스카’가 초연됐을 때, 많은 사람에게 오페라에 내재된 100년 전의 나폴레옹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였지만 현재와 연결돼 더욱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혁명사상으로 위장한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그를 따르던 지성인들은 그 속내를 알아차린다. 이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참패해 유배되고, 이탈리아의 운명은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등의 전승국이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빈회의(1814년 9월∼1815년 6월)에서 결정된다. 모든 것을 혁명 전의 시대로 되돌리기 위해 전쟁 전 왕정복구를 결정한 빈회의에 따라 이탈리아 남부는 전쟁 전처럼 프랑스 부르봉왕조에서 파생된 나폴리왕가로 넘겨진다. 북부의 도시국가들은 모두 해체되고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다. 지배자들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이념의 확산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탈리아인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통일에 대한 강렬한 희망의 등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왕권을 유지하고 있던 사보이왕가는 나폴레옹의 침략에서 살아남아 이탈리아 영토인 사르데냐섬과 빈회의에서 할당받은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방을 손에 넣는다. 예로부터 탁월한 외교술로 영토를 확장했던 사보이왕가는 사보이지방 귀족가문에서 1713년 스페인의 왕위전쟁의 공로로 시칠리아를 불하받으면서 본격적인 왕가의 위엄을 가질 수 있었다. 사보이왕가는 오스트리아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이탈리아반도 통일을 위해 비밀스럽게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리발디(1807~1882)라는 역사의 풍운아가 이탈리아 독립운동(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사에 등장한다. ‘청년 이탈리아’라는 당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통일운동을 하던 주세페 마치니(1805~1872)와 함께 활동하던 군인 주세페 가리발디는 29세에 프랑스 망명길에 오르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된다.
이탈리아의 영웅 가리발디
오페라 ‘나비부인’의 한 장면. 푸치니에게 ‘나비부인’은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리발디에 대한 시민의 열렬한 환영과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보이왕가와 통합해 이탈리아를 통일하자는 국민투표 결과에 가리발디는 즉시 승복하고,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1861년 사보이가의 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자신이 통일한 남쪽 영토를 바친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정직하고 청렴한 가리발디의 이름이 세계적인 위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반도는 로마 지역과 베네치아가 있는 베네토 지역을 제외하고는 1차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가리발디는 항상 빨간 셔츠를 입었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붉은 셔츠단’이라 불렸다. 특이한 이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돈키호테적인 기질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항상 신비감과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입던 칼라가 없는 풍성한 긴소매 옷은 일명 ‘가리발디 셔츠’라 이름 지어져, 여성을 위한 블라우스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한다.
한 비평가는 푸치니에게 “당신 같은 대가는 여성들만 주인공으로 하는 신파조의 작품 말고, 가리발디 같은 국민적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롱하듯 묻자, 푸치니는 “좋지요. 그런데 그는 전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 남미, 미국까지 너무 많은 일을 해 그걸 모두 담으려면 10시간짜리 공연이 돼야 하는데 거기에 따른 제작비를 대실 건지요?”하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푸치니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이탈리아반도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중서부의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은 연금으로 살아야 했다. 그의 집안은 150년 동안 도시를 대표하는 음악가 집안이어서, 시에서는 5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푸치니를 위해 오르간 연주 자리를 공석으로 두는 배려를 했다. 하지만 어린 푸치니는 마르고 병약했고, 매사에 관심이 없어 작곡가로 대성할 기미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79년 사보이가의 움베르토 1세(1844~1900)가 취임한 지 2년이 되는 해에 전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많은 장학금이 주어졌다. 이미 20세가 넘은 푸치니는 대상이 아니었다. 성년이 지났어도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하는 아들에게 더 좋은 음악 환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어머니는 출생 일자를 고쳐서 아들을 장학금 수혜 대상자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궁핍했던 밀라노국립음악원 시절
우여곡절 끝에 밀라노국립음악원에 입학한 푸치니는 오페라 작곡가 퐁키엘리(1834~1886)를 비롯한 최고의 교수진을 만나면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됐고 서서히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삶은 고향에서보다 더 궁핍했다. 후에 푸치니는 “밀라노 유학생활은 인생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으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푸치니는 가난을 비관하거나 가난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젊음이 주는 권리를 마음껏 누렸다. 이 시기 푸치니의 자유분방한 여성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코모 푸치니와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 이 두 자코모는 이탈리아 남성이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인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며 이탈리아 남성들에게 오명을 씌우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기도 하다.
3년간의 밀라노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첫 기회가 찾아온다. 훗날 그의 평생 지인이 되는 리코르디 출판사의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와의 만남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1884년 5월에 자신의 첫 오페라 ‘빌리’를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동시에 훗날 애증으로 점철되는 인생의 반려자 엘비라 본투리(1860~1930)를 만난다. 그녀와 열정적인 교제 끝에 유일한 혈육인 아들 안토니오(1886~1946)를 낳자 조용한 도시 루카는 발칵 뒤집힌다. 엘비라는 아이가 둘 있는 유부녀였고, 그녀의 부유한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푸치니와 함께 몰려다니던 소꿉친구였기 때문이다.
몇몇 위정자를 제외하면, 예로부터 이탈리아는 바티칸 교황청의 영향을 받아 일반 국민은 엄격한 보수 성향이 강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며 대도시에서는 상대적으로 성문화가 개방적이었지만 지방 소도시는 반대였다. 대도시에서 공부한 푸치니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결국 이 둘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향 루카를 떠나 20㎞ 떨어진,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인 토레 델 라고로 이사를 간다. 푸치니는 말년에 건강악화로 비아레조로 이사 가기 전까지 40여 년을 이 마을에서 살면서 그의 모든 작품을 작곡한다.
토레 델 라고의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들과 말조차 섞지 않고 무시했지만, 푸치니가 세계적인 작곡가로 입지가 굳어진 뒤 이 작은 마을이 주목받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1935년부터 이어져오는, 작곡자 푸치니를 기념하고 그의 작품만 공연하는 ‘푸치니 페스티벌’은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생가가 있는 호수 옆 야외극장에서 열린다. 페스티벌 기간 중인 7, 8월에는 5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니, 작은 마을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의 경제를 푸치니가 살린 셈이다.
푸치니와 엘비라는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나도 결혼을 못하다가 엘비라의 전 남편이 사망한 이후인 1904년에야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다. 당시 푸치니는 이미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기에 혼인을 안 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혼인한 것을 두고 호사가들은 “남자다운 책임 있는 결단”이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아내 엘비라에 대한 책임이라기보다는 아들 안토니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무한 책임이자 사랑이라고 보는 게 맞다.
위대한 작곡가 푸치니라는 이름으로 그는 수많은 여인을 탐했지만, 그 외의 어떤 여성에게도 책임의식은 갖지 않았다. 엘비라 역시 남편을 내조하는 여인은 아니었다. 가진 것도 없는 푸치니에 대한 사랑 하나만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린 엘비라는 자신의 인생이 파란만장해진 것에 대한 보상으로 모든 것이 본인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렸다. 동시에 남편의 바람기로 병적인 집착과 감시를 하는 상태에 이른다.
애증의 아내 엘비라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명예에 큰 타격을 입은 푸치니는 엘비라를 떠나려고 하지만 어머니를 구치소에 내버려두면 군대에 입대하겠다는 아들 안토니오의 호소를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죽은 도리아 가족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주고 합의를 봤다.
후에 많은 사람은 푸치니의 유작인 ‘투란도트’의 매정한 얼음공주 투란도트는 부인 엘비라이며,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칼라프 왕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순결한 여인 류는 도리아라는, 다소 억지인 비유를 하면서 이야기를 기억하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토레 델 라고 푸치니 페스티벌 홍보 책임자로 근무하는 마리안나 만프레디는 도리아 사촌의 손녀라고 한다.
그렇다고 푸치니가 작곡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1889년 그의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는 참패했다. 1894년 오페라 ‘마농 레스코’가 성공을 거둘 때까지, 푸치니는 인고의 시기를 지나야만 했다. 사실상 첫 성공작이었던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준비하면서 푸치니는 프랑스의 선배 작곡가 마스네의 동명 오페라 ‘마농’의 장면이 겹치지 않도록 했고, 특유의 가슴 저미는 선율과 서정적 멜로디를 이용한 극적인 묘사를 살려냈다.
그러고 보면 푸치니는 때를 잘 타고난 작곡가였다. 이탈리아반도 통일 이전에는 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제로 인해 관객은 주로 애국심을 북돋울 수 있는 선이 굵은 남성적인 주제를 선호했다. 다행스럽게도(?) 푸치니는 이러한 논란이 예술에서 정치로 완전히 넘어간 시점에 등장한 것이다. 관객은 편하게 쉬면서 인간의 감성이 극적으로 표출되는 공연을 요구했고, 푸치니는 항상 음악계의 변화하는 흐름이나 기법을 본인의 방식대로 바꾸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창조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특징인 아름다운 선율의 멜로드라마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바그너의 독일 오페라적인 오케스트라 작곡기법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적용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하는 주인공들은 바로 대중이 열광하는 인물이었다. 선악으로 대비되는 양면적인 여인들이 아닌, 성격은 다를지라도 모두들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결정하고 대처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동안 잔인하고 무자비한 세월을 살아온 국민에게 푸치니 오페라의 로맨티스트적인 분위기는 환상 그 자체였다.
푸치니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들을 오페라에 불어넣었다. 아름다우며 요염하고 허영기도 있는, 세 번째 오페라의 여주인공 ‘마농’은 부유한 남작의 정부(情婦)가 돼 그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죄수가 되어 그녀의 사랑과 함께 미국으로 보내지고, 그 삭막한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푸치니의 이상적 여인 ‘나비부인’
네 번째 오페라인 ‘라보엠’은 본인의 밀라노 유학생활을 기억하면서 작곡했다. 가난과 굶주림의 현실 앞에서 희망과 사랑으로 웃을 수 있는 청순한 ‘미미’를 그리고 있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본인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정열적인 여인상은 다섯 번째 오페라 ‘토스카’에서 잘 나타난다. 가수인 주인공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이 의미는 일에 살고, 사랑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에 열중해 살고 죽을 만큼 열정적으로 생에 임했다는, 진실되고 적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자신의 사랑을 위협하는 경찰서장 스카르피아의 심장을 문구용 칼로 있는 힘껏 찌른다. 애인과의 도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성에서 뛰어내리면서 자살하는 것으로 오페라 ‘토스카’는 막을 내린다.
푸치니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러한 성격은 푸치니의 우아한 선율과 우수에 젖은 듯 애틋하게, 그리고 고도의 긴장감을 주며 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예리하고 본능적인 직감으로 등장인물의 연기와 동작, 소품까지 음악으로 표현했다. 배우는 음악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다.
30대 초반에 홀로 되어서 4명의 딸과 아들을 기른 푸치니의 어머니는 매사에 철저하며 엄격하고 강한 어머니였다. 앞에서 말한 아내인 엘비라도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푸치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지고지순한 여인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었다.
벨라스코가 대본을 쓴 연극 ‘나비부인’을 영국에서 관람한 푸치니는 상대의 행복을 위해 자결까지 감행하는 희생정신에 감동받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또 울었다. 이상적인 여성상을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벨라스코와 담판을 벌여 판권을 획득하고 작곡에 착수했다. 일본적인 색채를 불어넣으려고 일본 음악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 조사하면서 그가 그토록 찾아다닌 나비부인을 탄생시켰다. 그의 많은 요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트에 나비부인의 이름인 ‘초초상’이라고 이름 지을 정도로 나비부인을 사랑했다.
완벽한 여성상을 발견해서인지 이후에 그가 창조하는 여성상은 대중의 진정한 감동을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했다. 1910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초연한 ‘서부의 아가씨’에서는 1850년대 서부개척 시대에 용감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미니’라는 인물을 내놓았으나 관객은 푸치니라는 대가의 이름 때문에 열광했을 뿐 지속적으로 공연되지는 못했다.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를 제외하면, 이후에 나오는 다른 여성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다. 푸치니의 여인들이 진정성이 없어지자 더 이상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오페라 신작은 나오지 않았다.
어떤 비평가는 파시스트당에서 합창을 강요하던 ‘로마 찬가’라는 곡을 푸치니가 작곡했다고 해서 그를 무솔리니(1883~1845) 정권에 협력한 음악가라고 본다. 하지만 푸치니는 로마를 위해서 작곡했고, 무솔리니가 이 곡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푸치니의 장례식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거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총리 자격으로 무솔리니가 조사를 읽었을 뿐이다. 푸치니는 정치적으로 그 어떠한 이념적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력을 인정받은 예술가일수록 정치에 개입하면 대중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술에 현혹당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세속화된 중산층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관객이 원하는 인물상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오페라도 서서히 그 입지가 좁아진다. 카루소, 탈리아비니, 칼라스, 파바로티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성악가들의 출현으로 오페라는 계속 무대에 오르지만 이 오페라들은 푸치니와 그 이전의 작품들이지 새로운 작품은 아니다. 이러한 성악가들의 활약도 오페라의 입지가 축소되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자코모 푸치니가 아날로그적인 음악적 선율에 시대가 원하는 인물을 창조한 마지막 오페라 작곡가가 된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