뤽 베송 감독의 영화 ‘제5원소’ .
한 국내 영화사는 ‘제5원소’ 수입을 위해 무려 550만달러를 들였다. 이 덕에 ‘제5원소’가 한국에서 개봉됐고, 국내 개봉 전 뤽 베송 감독이 한국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뤽 베송이 기자회견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작품 ‘제5원소’ 한국 상영판이 사전 허락도 받지 않은 채 8분가량 잘렸다는 소식을 그제야 들은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의 문화적 수준을 전세계에 홍보한 아주 낯 뜨거운 사건이다. 8분이면 원작을 훼손할 수 있는 긴 시간이다. 게다가 감독은 어느 장면의 어느 컷이 잘려 나갔는지도 모른다. 당시 감독은 눈이 감긴 채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상영횟수 늘리려 장면 삭제?
잘려 나간 8분. 당시 영화 수입 담당자들은 공연윤리위원회 등급심사에서 ‘중학생 관람’을 받기 위해 상징적인 성(性) 묘사 장면을 삭제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들이 긴 러닝타임의 압박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고 추측했다. 즉 러닝타임을 줄여 상영횟수를 한 회라도 더 늘리겠다는 의도라는 것.
더 놀라운 것은 당시 영화 수입업체가 ‘숨기고 싶은 일’을 저질러놓고도 버젓이 감독을 초청해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무식해서 용감한 건지 용감해서 무식한 건지, 아무튼 상식을 벗어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나온 뤽 베송 감독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1년 후, 뤽 베송 감독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 ‘택시’에서 한국을 향해 복수의 펀치를 날렸다. 아니, 조준사격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영화 ‘택시’에는 택시를 운전하는 쌍둥이 한국인 기사가 등장한다. 형제는 너무 가난하고 돈이 필요해 둘이 번갈아가며 택시를 몬다. 한 명이 운전할 때 나머지 한 명은 트렁크에서 잔다. 트렁크 안의 꼬질꼬질한 이불과 생활 도구들은 처절하다.
영화 속 한 배우는 돈에 혈안이 된 쌍둥이 형제 중 하나를 보며 “궁상맞은 한국인들은 너무 가난해서 24시간 동안 운전을 한다”고 핀잔을 준다. 제작자 뤽 베송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짧고 명료하게 드러냈다. 우리를 이따위로 표현하다니 부르르 화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는 뤽 베송 감독의 날카로운 유머에 심장을 명중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유머인지 비난인지 입장을 정리할 틈도 없이 즉사해버렸다.
부끄럽지만 한국을 비난하는 해외 영화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자신의 작품 ‘옳은 일을 해라’와 ‘크루클린’ 등에서 한국인을 ‘악착같이 돈을 수탈해가는 수전노’ ‘동양에서 온 노랭이’로 표현했다. 그리고 존 세일즈 감독은 영화 ‘다른 혹성에서 온 친구’를 통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만 하는 일 중독자’나 ‘돈의 노예’로 한국인을 보여줬다. 그리고 조엘 슈마허 감독의 ‘폴링다운’에서 주인공 마이클 더글러스는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국인에게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분노한다.
“너희 한국 놈들은 미국에서 돈을 벌면서 조금도 아량을 베풀지 않아!”
‘아톰’ 때문에 삭제된 장면
나 역시 ‘필름에 대한 부당한 가위질’을 당한 적이 있다. 문제의 작품은 2005년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리메이크한 ‘파랑주의보’다. 국내 흥행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배우 송혜교와 차태현이 출연했고 일본에 사전 판매돼 다행히 손익분기점에는 도달했다. 하지만 ‘상업 영화감독’으로서 국내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많이 위축됐다.
영화 ‘파랑주의보’.
“넌 장난감이야! 다 조립하면 지루해서 버릴 거라고!”
그날 밤 차태현은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곰곰이 생각한다. ‘천사같이 예쁜 그 애가 왜 나랑 사귀자는 거지?’ 그 순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조립식 장난감이 산산 조각난다. 시기에 찬 남학생들의 말처럼 실제 조립식 장난감이 분해되자 차태현은 왠지 불안해진다. ‘애들 말처럼 그 애는 날 장난감으로 생각하나? 갖고 놀다가 버리면 어떡하지?’
감독으로서 나는 이 장면에 쓸 소품용 장난감이 필요했다. 소품팀에게 ‘툭 건드리면 분해 되는 검지손가락 크기의 조립식 장난감’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소품팀은 후보 몇 개를 가져왔고 나는 비교적 분해가 용이한 장난감 하나를 골랐다.
그것은 아톰 인형이었다. 꽤 귀여운 모양이라 영화 속 차태현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아 주저 없이 그 인형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수출 과정에서 이 장면이 문제가 됐다. 이유는 아톰, 즉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에 흠집을 냈다는 것이다. 아톰은 일본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있는 일본에서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 문화의 상징적 존재를 산산조각 낸 한국 감독이 됐다. 결국 일본 수출을 위해 내 영화는 가위질당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다. 일본 영화 속 주인공이 로보트 태권V 피겨를 만지작거리다가 실수로 부러뜨린다. 한국의 수입업자는 일본 영화 제작자에게 해당 장면의 편집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한다면?
“한국 만화영화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님의 태권V에 흠집을 냈군요. 태권V는 희망 한국의 상징입니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합니다. 태권V 인형이 분해되는 장면을 반드시 삭제해주세요.”
우리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까? 글쎄. 영화는 영화다. ‘파랑주의보’는 그저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일 뿐이고, 감독으로서 ‘식민지로 핍박받았던 우리의 울분을 은밀하게 복수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맹세한다. 단지 분해 잘되는 소품 하나 잘못 골랐을 뿐이다.
결국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문제의 아톰 장면은 삭제된 채 일본에서 상영됐고 DVD로도 출시됐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국내 출시된 DVD에도 아톰 장면은 발견할 수 없었다.
창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아톰 장면이 삭제됐다고 해서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불필요한 장면의 삭제로 영화의 리듬이 더 경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작품 연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모든 저작권이 투자사에 귀속되는 것은 대중 상업 영화감독의 숙명이다. 그래도 산고 끝에 만들어낸 창작물이 수정되고 변형될 때는 그것을 만들어낸 창작자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이 불필요하다면, 세상에 던져진 그 창작물은 창작자의 영혼이 담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창작자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창작물이 수용자에게 제공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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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데뷔작을 찍을 때 상영시간의 압박 때문에 스스로 삭제한 몇 개의 장면은 늘 미련으로 남는다. 그런데 한국의 대중 영화감독으로 또다시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지면을 빌려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뤽 베송 감독에게 꼭 사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