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박병재 전 부회장이 밝힌 현대차 ‘쾌속 질주’ 비화

캐나다에서 덤핑 제소당했을 때 딜러 동원해 당국에 편지공세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입력2011-08-19 1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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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업 초기 정상영 회장과 함께 채권 회수 해결사 노릇
    • 수시로 날아온 정주영 회장의 재떨이
    • 위기 느낀 GM, 포드의 덤핑 제소
    • 1만명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 벗어나
    • 제대로 된 현대차는 ‘아토즈’ 이후
    • 베이징시 택시를 현대차로 바꿔라
    박병재  전 부회장이 밝힌 현대차 ‘쾌속 질주’ 비화

    ● 1941년 경북 문경 출생<br>● 문경고, 연세대 졸<br> ● 1968년 현대자동차 입사<br>● 1985년 현대자동차 전무이사<br>● 1996년 현대자동차 사장<br>● 1998~2003년 현대자동차 부회장<br>● 2006~2009년 영창악기 대표이사 부회장

    성취한 남자에게서만 풍기는 향기가 난다. 1941년 10월9일생(음력). 1968년 7월~2003년 1월 현대자동차에서 일했다. 고(故) 정주영(1915~2001) 회장, 고 정세영 (1928~2005) 회장, 정몽구(73) 회장을 도왔다. 현대차에서 잔뼈가 굵은 김방신(52) 효성기전PU 대표는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은 분”이라고 그를 기억한다. 2002년 12월 정몽구 회장이 그를 불렀다. 부회장으로서 현대차 중국 진출을 총괄한 직후다.

    정몽구 회장이 “수고했어요”라고 말한 후 이렇게 덧붙였다.

    “이젠 다 이뤘잖아.”

    그는 서운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떠나겠습니다.”



    정몽구 회장이 고문직을 제의했다.

    “맡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몽구 회장이 되받았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박병재(70) 전 현대차 부회장은 경기 동두천시에서 소나무를 키우면서 산다. 매년 100그루씩 나무를 심는다.

    “채마밭도 해요. 고추, 상추, 토마토를 키워 먹어요.”

    그는 개발연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한국 자동차 산업 개척자다.

    “현대차, 삼성전자 같은 회사도 긴장해야 해요. 수성을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동안 이룬 걸 한 방에 잃을 수도 있어요.”

    그는 ‘우리 회사’라는 말로 현대차를 표현했다. 8월 초 현대차가 도요타를 제치고 올 상반기 세계 자동차 글로벌 톱4에 ‘일시적으로’ 올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하던 곳이 날로 좋아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대리 행복을 느낀다고나 할까. 정몽구 회장이 경영을 잘해요. 사람 사는 게 운칠기삼(運七技三)이거든요. 최선을 다해야만, 기삼을 이뤄내야만 운칠이 와요. 전적으로 좋아지는 건 운이지만, 운을 맞으려면 기를 써야 해요. 도요타가 미국에서 그 꼴 당할지 누가 알았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 내가 찾아”

    1968년 봄 청년 박병재는 삼호무역에서 밥을 벌었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

    “무역회사 가운데 삼호가 가장 컸어요. 비서실에서 일했는데, 직원 뒷조사를 시키더군요. 뭐 이런 회사가 있나 싶었어요. 그래서 정세영 현대차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현대차는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앞 현대건설 사옥을 빌려 썼다. 그가 이력서를 내밀면서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세영 회장이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 내가 찾아.”

    정식 발령을 받아 10명 남짓한 사람이 일하는 현대차로 첫 출근한 때가 1968년 7월1일. 현대차에서 2003년 1월까지 일했으니 ‘자동차 밥’을 35년간 먹은 것이다.

    “연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어요. 경영학 경제학 상학이 서로 구분이 없을 때예요. 학교에서 배운 게 포드 시스템이거든요.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대량생산하는 건데, 이 분야는 우리가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동차 회사에 취직한 겁니다.”

    1910년께 헨리 포드(1863~1947)는 모터 조립을 84개 부분으로 나누고 컨베이어를 도입해 조립시간을 10분의 1로 줄였다. 대당 1000달러 넘던 자동차 가격은 300달러로 떨어졌다. 판매량이 폭증했고, 노동자 임금도 두 배로 뛰었다. 포드 시스템은 다품종 동시생산을 내건 도요타 시스템에 자리를 내준다. 대학에서 포드 시스템을 배운 그에게 정세영 회장이 물었다.

    “말단도 괜찮지?”

    그는 말단이지만 중요한 일을 맡았다.

    “부품업체를 선정하는 일을 했어요. 정세영 회장이 돈, 시설이 아닌 사람을 보고 정하라고 하더군요. 부엌, 안방에서 창업한 부품업체가 지금은 내로라하는 부품업체가 돼 있어요.”

    현대차는 창업 초부터 위기를 겪었다. .

    “망할 뻔한 적이 여러 차례예요. 위기는 벼락처럼 와요. 포니 만들기 전에 코티나를 조립했습니다. 은행에 적금이나 상호부금을 가입한 사람을 대상으로 차를 할부로 넘겼어요. 24개월, 36개월 할부인데, 돈이 안 들어오는 겁니다. 90%가 연체인데, 이걸 어떡해요. 그냥 놔두면 회사가 망하는 겁니다. 정주영 회장이 1969년에 ‘직원들이 직접 받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차를 빼앗든지, 돈을 받든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회수하라는 겁니다. 정세영 회장이 저를 보고 ‘너 할부과로 가’ 하더군요.”

    창업 초기 망할 뻔한 현대차

    ▼ 추심한 거네요, 조폭이 하는….

    “총책임을 KCC 정상영 회장이 맡았어요. 당시 금강스래트 사장이었는데, ‘나는 월급을 금강에서 받으니 급여 받지 않고 현대차를 위해 노력하겠다, 1년 만에 회수하겠다’고 하더군요. 정상영 회장이 주먹이 야물어요. 깡도 있고, 기운도 셉니다. 험한 일 할 때는 깡이 중요하거든요.”

    ▼ 돈 받는 일이 험하죠.

    “그렇죠.”

    ▼ 실제로 주먹도 썼나요.

    “주먹은 안 썼지.”

    ▼ 정상영 회장과 함께 해결사 노릇 한 거네요.

    “해결사 했죠. 정상영 회장이 우두머리, 내가 실무. 서울대 법대 출신 2명이 법적인 거 검토하고.”

    그는 “정상영 회장이 해결사 노릇을 제대로 못했으면 지금의 현대차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장 근로자 중에 몸 좋고, 말발 센 사람을 뽑아 지역별로 나눠 보냈습니다. 당시 돈으로 100억원을 회수했어요. 1년 매출이 70억, 80억원 할 때거든요. 정주영 회장이 신동아 회장, 그러니까 최순영 회장 아버지를 만나서 보험금 3억원까지 받아냈어요. 채권을 회수하지 못했으면 현대차는 망했습니다. 현대건설에 손 내밀어야 했는데, 그곳도 현금이 많은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 현대차는 정세영 회장 작품인가요, 정주영 회장 작품인가요.

    “실무는 정세영 회장이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은 오너십이 중요해요. 자동차 산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큰 방향을 정한 건 정주영 회장이죠.”

    ▼ 포니 나온 게 언제죠?

    “1975년.”

    ▼ 포니 나올 때 직급이….

    “차장. 우리가 만든 첫 고유 모델이 포니예요. 여의도 기계공업회관에서 발표회를 했는데, 정말로 눈물이 났다고. 굉장히 고생했거든.”

    ▼ 정세영 회장도 울었나요.

    “펑펑 울었지.”

    현대차는 포니가 나오기 전까지 포드 모델을 조립해 팔았다.

    “덤프트럭도 조립했어요. 서빙고 현대건설 중기공장에서 만들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거기 책임자였어요.”

    ▼ 신동아아파트 자리쯤 되나요.

    “맞아요. 그쯤이에요.”

    ▼ 독자모델은 왜 만든 건가요? 합작하면 편했을 텐데….

    “평생 ‘을’로만 살 수는 없지 않아요? 어떤 일이건 ‘갑’에 서려고 노력해야 해. 포드가 얼마나 까칠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합작하려면 은행잔고를 보여 달라는 둥. 그때 한국이 돈이 어디 있어요. 기업은 호적이 중요해요. 한국GM, 르노삼성, 마힌드라쌍용이 우리나라 위해 일 안 해요. 글로벌 경제위기 때 미국이 도요타 밟는 거 봤죠. GM, 포드, 크라이슬러가 망하게 되니까 막 공격한 거 아닙니까. 국가가 독립하려면 산업이 독립해야 해요. 포드와 갈라설 때 우리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단독 북진하자!”

    박병재  전 부회장이 밝힌 현대차 ‘쾌속 질주’ 비화

    1 박병재 전 부회장이 현대차 울산공장을 찾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안내하고 있다. 2 2002년 합작을 위해 중국을 찾은 정몽구 회장(가운데) 일행. 왼쪽이 박 전 부회장. 3 1996년 터키 공장 부지를 결정하고자 현장을 찾은 박 전 부회장(가운데).



    박병재  전 부회장이 밝힌 현대차 ‘쾌속 질주’ 비화

    1995년 11월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한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왼쪽). 맨 오른쪽이 박 전 부회장.

    ▼ 단독 북진이 뭔가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북한으로 홀로 쳐들어가자는 구호인데, 이런 얘기는 쓰지 마세요.”

    ▼ 합작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미국 회사가 한국 기업 자립 안 시킵니다. GM 기술연구소가 미국에 있잖아요. 한국에서 사람 키우겠어요? 합리적인 경영자가 그렇게 판단할까요? 엔진, 트랜스미션은 한국에서 연구 안 해요. 보디 바꾸는 것 정도 주는 거지. 산업의 국적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포니가 나오기 전,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까지 현대차는 당시 한국 회사가 대부분 그랬듯 한심했다.

    “자재 관리가 엉망이었습니다. 얼마짜리 부품이 얼마나 있는지도 통계가 없었어요. 국세청에 보고할 때도 대충 하는 겁니다. 돈을 버는 건지, 아닌 건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았어요. 내가 전국을 돌면서 상고 출신 인재를 스카우트했어요. 주산 3단이면 암산을 다 하거든요. 그 사람들 뽑아서 자재 관리를 시켰어요. 그때 뽑은 친구가 지금 임원도 하고 있습니다.”

    “너, 뭐하는 놈이야!”

    자동차 산업은 기계공업의 총아이자, 종합이다. 자동차를 만들면 거의 모든 기계를 제작할 수 있다. 그는 “현대차의 성취는 한국 산업의 성취”라고 말했다. 1980년, 현대차는 또 한 번 쓰러질 위기를 겪는다. 오일쇼크로 국가 경제가 흔들렸다. -6.2% 경제성장률. 정세영 회장이 불황 타개 태스크포스 팀장을 맡으라고 했다. 정주영 회장은 매일 아침 6시, 불황 극복 계획과 실천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아침 6시, 6시 반에 일을 시작하지 않은 역사가 없어요.”

    ▼ 부지런해야 성공한다는 현대에서도 부지런했군요.

    “이명박 대통령도 똑같아요. 아침 일찍 출근하면 장점이 많아요. 근무시간 전까지 간섭 없이 일할 수 있거든요.”

    ▼ 오너와 독대한 건 기회였겠군요.

    “기회 맞아요. 그런데 고되잖아. 정주영 회장이 해외출장 가면 얼마나 좋던지.”

    불황 타개 팀이 가동할 때 정주영 회장이 그에게 말했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자재비 내려야지.”

    그가 답했다.

    “노력하겠습니다. 5%가량 내려보겠습니다.”

    재떨이가 날아왔다.

    “너, 뭐하는 놈이야! 그따위로 일해. 내일 일본 가. 가서 10% 깎아와.”

    그는 다음날 미쓰비시 회장실에 앉았다. 미쓰비시 회장이 말했다.

    “왜 왔어요?”

    “자재비 내리는 게 급합니다. 2년 내로 사정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10%를 내려주십시오.”

    미쓰비시 회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정주영 회장 전화 받았어요. 특별히 부탁하더군요. 당신 뜻대로는 안 되지만,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가 웃으면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를 그렇게 두드려 패더니 당신이 해결해놓고 받아먹으러 다녀오라고 한 거였어요. 한국 돌아와서 ‘회장님께서 전화하신 덕분에 해결했습니다’라고 했더니 또 화를 내요. ‘내가 전화한 거 나한테 뭣 하러 얘기해!’라면서요.”

    ▼ 조인트 까인 적은 없습니까.

    “재떨이는 엄청 집어던지셨지.”

    ▼ 재떨이 날아오면 어떻게 해요.

    “피해야지. 맞을 순 없잖아. 그 양반은 최선을 다하면 절대로 뭐라 안 해. 그것만 봐. 최선을 다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 최선을 다해도 이루지 못할 일이 있잖아요.

    “그렇지. 안 되는 게 있어요. 운칠기삼이야. 최선을 다해야 운도 따른다고, 아까 말한 것처럼.”

    ▼ 이명박 대통령이랑 동갑이죠? 경쟁심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분이랑 일로 부딪친 적이 없어요. 무지하게 똑똑한 사람이에요. 정주영 회장이랑 호흡도 잘 맞았고. 나중에 어긋나지만. 하루는 정세영 회장이 나한테 이렇게 말해요. ‘야! 왜 고대 출신보다 연대 출신이 못해. 나이도 똑같은 놈이. 이명박이만큼 못해!’ ‘나한테 그런 자리 준 적 있느냐’고 대답했어요. 내가 버릇이 없어요. 현대차는 현대그룹 안에서 분위기가 달랐어요. 정세영 회장이랑 농담도 하고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지금 현대차는 분위기가 또 다르지만….”

    “가난한 사람에겐 현대차가 필요하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8월20일 자동차산업 재편안을 내놓았다. 현대차는 승용차·버스를 만들고, 대우차는 승용차, 기아차는 트럭만 만들라는 것이었다.

    “정부로 쫓아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따위로 일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부품 재고가 쌓여 있는데 상용차 못 만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항의했어요.”

    1986년 1월1일자로 정부는 이 같은 규제를 해제했다. 1985년 정주영 회장이 그를 불러 올해부터 상용차를 팔라고 지시했다. 그가 처음으로 정주영 회장에게 입 바른 소리를 했다.

    “회장님. 법을 위반하면서 뒤의 이익을 앞으로 당기는 게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정주영 회장이 재떨이를 던지면서 말했다.

    “불가능이 어디 있어. 나가! 정세영이 불러.”

    정세영 회장이 심하게 터지고 와서 그를 불렀다.

    “너, 회장실에 올라가지 마라.”

    ▼ 그래서 캐나다 지사로 간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는 1987년 4월~1989년 3월 캐나다 법인 사장으로 일했다. 현대차는 캐나다에 공장을 짓고 있었다. 수출이 내수보다 더 많을 때다. 현대차가 망할 뻔한 위기가 또 찾아온다. GM, 포드가 현대차를 견제했다. 두 회사가 현대차가 덤핑을 했다면서 캐나다 법원에 제소했고, 캐나다는 현대차에 35% 덤핑 관세를 부과한다.

    “덤핑 제소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어요. 캐나다 국세청이 우리를 조사하는데, 덤핑을 안 했다는 증거로 내놓을 자료가 없는 겁니다. 과장이 책임자였는데 내가 귓방망이를 때렸습니다. 기합을 줘야겠다 싶어 사표도 받았어요. 2차 판정 때 17.5%로 덤핑 관세가 내려갔는데, 그 수준으로도 캐나다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어요. 캐나다가 덤핑 판정을 내리면 미국도 그대로 따라가는 구조예요. GM, 포드가 노린 것도 그것이고요. 전략을 바꿨습니다. 설사 덤핑을 했더라도 캐나다 자동차 공업에 피해를 준 바가 없다, 포니 같은 차는 미국, 캐나다에서 만든 역사가 없다, 우리는 저소득층을 위한 차를 판다, 시장 자체가 다르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 세그먼트가 다르다고 주장한 거군요.

    “현대차는 일본 소형차와 경쟁하는 것이지 북미에서 제작한 큰 차와 시장에서 다투는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현대차는 캐나다 딜러를 동원해 당국에 편지를 보내게 했다. 큰 딜러에겐 1000통, 작은 딜러에겐 100통씩 할당했다. 소비자들은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에겐 현대차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회사가 돈이 없어 TV 광고는 못하고, 라디오 광고를 했어요. ‘캐나다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싶습니다. 저소득층 생활을 편리하게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을 담았어요. 덤핑 판정을 받으면 회사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캐나다 유력 일간지에 광고를 냈습니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판사들 읽으라는 거였죠. 광고 효과인지 유력지가 사설을 쓰더군요. ‘공장을 지어 일자리 창출하는 회사를 쫓아내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느냐’는 식으로요.”

    그는 1988년 1월 중순~2월 말까지 진행된, 덤핑 시비를 가리는 청문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방청석 맨 끝자리에 앉았어요. 흰둥이만 있는데 노랑둥이가 매일 나오면 눈에 띌 거 아닙니까. 어떤 직원은 ‘비굴하게 왜 그러십니까’라고 하더군요.”

    그는 마지막으로 증언대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현지 CEO입니다. GM, 포드는 청문회 기간 내내 변호사만 보내고 디렉터(부장) 한 명 안 왔습니다. GM, 포드가 캐나다를 위해 일합니까? 미국을 위해 일합니까?”

    현대차가 결국 이겼다. 무혐의 판정이 나왔다. 언론은 ‘골리앗이 다윗에게 졌다’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현대차 역사에서 당시보다 큰 위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어요.”

    ▼ 글로벌 경제위기 때 도요타가 겪은 것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더 커요. 회사가 뿌리째 없어질 뻔했거든요.”

    ▼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겠네요.

    “1등을 하면 잡아 내리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현대차, 삼성전자가 특허·덤핑과 관련해 곤욕을 치를 수 있어요. 잘 대비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더욱 신경 써야 해요. 별의별 압력으로 괴롭힐 수 있거든요.”

    ▼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면 도움이 되겠군요.

    “그렇죠. 아주 편하죠. FTA를 맺더라도 덤핑·특허 문제를 조심해야 해요. 기업도 국적·호적이 중요하고, 무서운 겁니다.”

    1990년대 중반 대도약

    그는 현대차가 1990년대 중반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중반 세상이 바뀝니다. 전자의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전자공학과 출신은 삼성, LG가 싹쓸이했어요. 기계공학과 인재는 우리한테 다 와 있었고요. 자동차에도 전자가 엄청나게 들어가는 시절이 왔는데, 큰일 난 거죠. 궁하면 통합니다. 인사고과가 좋은 기계공학 전공자 수백 명을 서울대, 울산대 전자공학과에 보내 6개월 동안 학사과정을 마스터하게 했어요. 하루에 10시간씩 6개월 공부하면 4년 배운 것과 비슷합니다. 그 친구들이 지금 임원 하고 있어요. 그런 식의 직원 재교육은 전세계에서 우리 회사만 했을 거예요.”

    그가 물었다.

    “미국에서 10만마일 보증을 언제 시작한 줄 알아요?”

    ▼ 정몽구 회장 작품 아닌가요.(정몽구 회장은 1999년 현대차 경영권을 확보했다)

    “1994년, 95년 일이에요. 품질에 자신이 있었죠.”

    ▼ 자동차가 자주 고장 나면 회사가 손실을 보는 구조니 믿는 구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겠군요.

    “그렇죠.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엄청나게 했어요. 일본 은퇴 기술자를 높은 연봉 주고 데려와 공정을 개선했어요.”

    ▼ 미국에서는 ‘현대차가 미쳤다’고 했잖아요.

    “소비자는 좋아했죠. 무섭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 포니부터 시작해 현대차가 만든 차 중 어떤 것부터 품질에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까?

    “아토즈.”

    아토즈라는 답을 듣고 다소 놀랐다.

    ▼ 아토즈요? EF쏘나타보다 늦게 나온 소형차 말인가요?

    “맞아요. 아토즈 이후에 나온 차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아요. 지금 현대차가 만드는 차는 모두가 세계가 반할 만한 차고요.”

    1990년대 초 현대차는 2000년까지 글로벌 톱 10에 오르겠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그는 현대차로서 벅찬 목표였다고 회고했다.

    “외환위기 전후로 도저히 이루지 못할 목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기아차를 인수하면서 목표를 달성합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듬해 1만명을 구조조정합니다. 대우차 삼성차 기아차 쌍용차는 적기에 인원을 줄이지 못했어요. 1만명의 월 평균 임금을 낮게 잡아서 300만원이라고 칩시다. 300만원 곱하기 1만명이면 월 300억원이에요. 근로자 1인당 부가비용이 임금만큼 더 듭니다. 임금 300만원에 2를 곱해야 해요. 600만원에 1만명을 곱하면 월 600억원, 연 7200억원입니다. 구조조정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회사가 망합니다. 대우차 삼성차 기아차가 무너진 게 적기에 구조조정을 못해서예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기업은 도약합니다. 공황이 올 때 도약해야 해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도 현대차가 공격적으로 위기관리를 잘했습니다. 캐나다 덤핑 제소 사건도 종국엔 약이 됐어요. 회사 이미지가 엄청나게 좋아졌거든요. GM, 포드에 맞서 이긴 회사가 된 겁니다. 이렇듯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야 해요.”

    ▼ 현대차 근로자를 해고하면서 생긴 여유 자금으로 기아차를 인수했다는 건가요?

    “1998년 기아차 인수 계약을 맺었어요. 돈이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건 1999년부터였고요. 구조조정을 통해 생긴 여유가 큰 도움이 됐어요. 1만명 해고한 뒤 회사 이미지가 나빠졌지만, 기아차 인수를 마무리할 즈음엔 사람들이 과거 일을 다 잊더군요.”

    “중국은 언제쯤 자본주의 하나?”

    그가 현대차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중국 진출 프로젝트다.

    “장쩌민(江澤民·85) 전 중국 국가주석이 울산공장을 두 차례 방문했어요. 장쩌민 주석을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이 회사에서 나였어요. 기아차는 옌청(鹽城)시와 합작했는데, 현대는 대도시와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몽구 회장이 “맡아서 해보라”고 지시했다. 정몽구 회장과 함께 방중해 장쩌민 당시 주석을 만났다. 장쩌민 당시 주석은 “당신이 여기 책임자로 왔느냐? 잘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대차는 지금과 달리 부회장이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맡아서 일할 최적임자였던 거죠. 공장 부지는 아주 좋더군요. 판매 대책부터 짰어요. 베이징시 택시를 현대차로 바꾸겠다고 약속해야 도장을 찍겠다고 중국 당국에 말했습니다. 지금 베이징택시의 대부분이 현대차예요. 쏘나타로 시작해서 아반떼로 바뀌었죠.”

    그가 전한 장쩌민 전 주석의 자본주의와 관련한 언급이 흥미롭다.

    “장쩌민 전 주석이 영어를 상당히 잘해요. 하얼빈자동차 공장장을 한 경험도 있고요. 현대차를 방문했을 때 ‘세계 각국 자동차 공장을 둘러봤는데 울산공장은 장점만 다 가져다놓은 것 같다. 현대차를 벤치마킹하면 우수한 자동차 공장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장쩌민 주석에게 중국이 언제 자본주의가 될 것 같으냐고 물은 적도 있어요.”

    ▼ 뭐라 하던가요.

    “당신은 중국이 러시아처럼 되길 바랍니까?라고 되묻더군요. 자본주의 하면 스트라이크가 일어나고, 소련처럼 영토가 분할된다는 거예요.‘우리는 천천히 한다. 100년을 두고 할 것이다’라고 답하더군요.”

    ▼ 배포가 대단합니다. 공산당 총서기 만나서 자본주의 언제 할 거냐고 묻다니.

    “하루 종일 함께 다니면 이런 말 저런 말 다 하게 돼요. 그분이 영어를 잘해서 통역도 필요 없었고요.”

    ▼ 중국 프로젝트를 끝으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서운하진 않던가요.

    “유감? 전혀 없었어요.”

    그는 2006~2009년 영창악기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낸 것을 끝으로 현직에서 은퇴했다.

    ▼ 더 일할 수 있는데, 아쉽지 않습니까.

    “70세 넘어서 경영하면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오래전 65세 넘으면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는데, 고희가 넘어서 복귀했습니다.

    “65세도 그렇지만 70세 넘으면 기억력이 떨어져요. 숫자고 뭐고 정확했는데, 지금은 기록 안 하면 잘 몰라요.”

    ▼ 자리 욕심이라는 게 버리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월급쟁이하고 오너는 처지가 달라요. 오너는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해요. 이건희 회장 같은 분이 오너로서 경영하는 게 한국에 다행입니다. 경영계에 이건희 회장처럼 칭송받아야 할 오너가 많아요. 요즘 분위기가 포퓰리즘으로 흘러가면서 대기업 오너를 공격하는 분위기인데 그런 태도는 옳지 않아요.”

    ▼ 정세영 회장은 현대차 떠나면서 서운해하지 않았습니까.

    “그분도 인간이잖아.”

    ▼ 정세영 회장도 욕심이 있었군요.

    “자동차 떠난 후환이 병으로 바뀐 게 아닌가 싶어요.”

    ▼ 정세영 회장 아들인 정몽규(49) 현대산업개발 회장은요?

    “아파트로 기업을 키우겠다는 의지가 강해요. 그런데 자동차 하던 사람이 다른 거 하면 만족을 못 느껴요. 자동차는 기계공학, 전자공학의 집합체인데다 전세계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물건을 파는 비즈니스 아닙니까.”

    “정말로 사랑한 차는 포니”

    ▼ 포니 정(정세영 회장)은 어떤 분이었나요? 한국식 대기업을 옹호하면서도 신자유주의에는 반대하는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가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정세영 회장을 꼽더군요.

    “그분은 오너 행세를 하지 않고 민주적으로 회사를 경영한 분이에요. 자동차 산업을 키워낸 주역이죠.”

    ▼ 정몽구 회장은요?

    “경영자로서 결심한 일을 추진해 이뤄내는 건 세계에서 1등이라고 봐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지향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성취해요. 경영자로서 아주 필요한 자질이죠.”

    ▼ 언론 보도를 보면 현대차 인사가 지나치게 변화무쌍하다는 지적도 있던데요.

    “그건 아니에요. 잘못 본 거야. 인사가 만사입니다. 인사를 잘했기에 오늘의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목표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정몽구 회장이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았어요. 사안을 판단할 때 본인이 완벽히 이해해야 결심을 해요. 사실 판단을 적당히 하는 적이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결정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그분을 모르고 하는 얘기예요.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데, 무서운 사람이죠.”

    ▼ 1999년 이전 역사는 현대차에서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던데요.

    “방법이 없잖아”

    ▼ 서운하진 않습니까?

    “역사는 그대로 있어요. 옛날 돌아보지 않아도.”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차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포니예요. 정말로 사랑했어요.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포니가 몇 대 다니는지 세는 게 일이었어요. 생산한 제품을 사랑해야 좋은 제품이 나와요. 그래야 기업이 잘되고요.”

    ▼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보면 못마땅하지 않습니까.

    “작은 회사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우리 세대는 만끽했어요. 요즘 젊은이를 옛날 잣대로 평가하면 잘못이죠. 세상이 달라졌어요. 옛날 방식으로 경영하는 것도 모순이고요.”

    그의 아내가 승용차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종은 에쿠스다. 첫 차는 코티나, 사랑하는 차는 포니. 그가 걸어온 길이 부러웠다. 그는 용퇴를 바라는 오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운한 감정 전혀 없습니다. 행복한 순간에 떠납니다. 고문직도 맡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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