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주말 근교농장 찾던 ‘도시 농민’들 옥상·베란다 활용한 텃밭으로 이동

‘도시 농사짓기’ 열풍

  • 박은경│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1-08-22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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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근교농장 찾던 ‘도시 농민’들 옥상·베란다 활용한 텃밭으로 이동
    대구지검 포항지청 김정환 검사는 일주일에 두 번씩 청사 내 텃밭을 가꾼다. 그는 검사 2명과 검찰공무원 17명이 함께 활동하는 포항지청 텃밭 동호회 회장이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시골 외가에 내려가 농사짓는 모습을 봤어요. 텃밭을 가꾸면 재밌겠다 싶어 모임을 시작했죠. 원래는 회원 열 명이 한 고랑씩 맡아 일구는 작은 동호회였는데 지난해 여름 부임한 송인택 지청장이 관심을 기울이시면서 규모가 커졌어요. 지금은 1320여㎡(약 400평)의 땅을 개간해 40여 종의 과일·채소를 재배합니다.”

    김 검사는 송 지청장이 “인내와 열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수사와 농사는 닮은 점이 많다. 속이 꽉 찬 열매를 거두기 위해 땀 흘리는 농부의 마음을 알면 수사도 더 잘할 수 있다”며 텃밭 회원들을 독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농사 경험도 풍부해 아침마다 밀짚모자 쓰고 장화 신은 채 텃밭에 나갈 뿐 아니라 사비를 털어 농기구를 마련할 정도로 관심을 쏟는다고 한다.

    도심에서 텃밭을 가꾸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26년째 세탁소를 운영하는 박달병씨는 8년차 ‘농부’다. 단독주택 마당을 텃밭으로 일군 뒤 아내와 번갈아가며 아침저녁으로 돌본다. 그는 “지난해 배추 20포기를 수확해 김치를 담갔다. 대문을 타고 올라가는 호박 넝쿨에서 자란 호박으로 호박즙을 만들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박씨의 동네는 오래된 단독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라 마당과 대문 앞, 옥상 등 자투리 공간에 텃밭을 만든 가정이 많다. 박씨네는 그중에서도 텃밭 잘 가꾸는 집으로 소문이 나 최근 강동구가 선정하는 ‘개인 텃밭 가꾸기 우수자’로 뽑혔다. 부상으로 텃밭상자 3개를 분양받기도 했다. 박씨는 “구청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상자, 흙, 퇴비 등을 공급해줘 고추, 상추, 부추 등을 길러 먹고 있다. 가끔 구청 직원들이 농사를 잘 짓나 점검 나오는데 정성들여 가꿔서 내년에는 더 많은 텃밭상자를 분양받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목표는 텃밭 상자 여러 개를 옥상에 올려, 옥상을 텃밭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자로 만드는 텃밭



    주말 근교농장 찾던 ‘도시 농민’들 옥상·베란다 활용한 텃밭으로 이동

    도심 텃밭에서 수확한 유기농 먹을거리들.

    땅이 있어야만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시대는 갔다. 이제는 건물 옥상과 아파트 베란다 등 상자를 놓을 수 있는 손바닥만한 자투리 공간만 있으면 각종 채소를 심고 기를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들도 텃밭상자 보급 등을 통해 도시 농업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서울시 등 46개 지자체가 주말 농장과 도시 텃밭 분양, 농사학교 개설 등을 지원하고 있다.

    강동구청은 지난해 민선 5기 이해식 구청장이 취임한 뒤부터 ‘1가구 1텃밭 갖기’ 프로젝트를 전개 중이다. 이후 관내 5개동에 총 15개의 텃밭이 조성됐고,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텃밭(주말 농장 포함)도 16개가 됐다. 강동구가 조성해 분양한 도시 텃밭을 가꾸는 가구는 현재 1600개에 달한다. 강동구는 관내 낙엽퇴비장에서 친환경 퇴비를 만들어 ‘로컬푸드 육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농가 305곳에 보급하고 있다. 또 구청이 운영하는 지렁이사육장에서 지렁이를 키워 구민들에게 퇴비 제작용으로 분양할 예정이다. 지렁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분해해 만드는 ‘분변토’는 식물의 생장에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동구청 지역경제과 친환경도시농업팀 주성호 주임은 “관내 동 주민센터, 경로당, 유치원, 개인주택 등에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자텃밭도 보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3200여 개가 전달됐다. 우리 청사 옥상에도 10여 개의 상자텃밭을 두고 직원들이 기르고 있다. 올해는 폭우가 많이 내려 상태가 좋지 않지만 다행히 고추와 피망은 싱싱하게 잘 자란다”고 했다. 강동구청 직원들은 과별로 창문 난간에 상자텃밭을 놓고 채소를 기르기도 한다.

    “30~40대 젊은 부부와 60대 이상 노년층이 텃밭에 가장 관심이 많아요. 주말이면 3대가 함께 나와 텃밭을 가꾸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주 주임의 말이다. 강동구에서 올해 도시 텃밭 4평을 분양받은 박영란씨는 텃밭 교육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평소 환경과 안전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았다. 채소를 직접 길러 먹으니 안심돼서 좋고, 대학생 아들이 일손을 도우며 농부와 농사일에 대해 점점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기쁘다”고 말했다.

    매년 도시 텃밭에서 ‘겉절이 담그기’ 등 체험 행사를 진행 중인 강동구청은 ‘2011 전국기초자치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공약이행 부문에서 ‘친환경 도시 농업’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잠깐 농부’로 사는 즐거움

    서울 서대문구 홍제2동 주민센터 옥상에는 주민들이 직접 가꾸는 대형 상자텃밭이 조성돼 있다. 김금란 주민자치위원장은 “모종을 심은 뒤 꽃피고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신기하고 예쁠 수가 없다. 센터 옥상 텃밭을 주민들과 함께 돌보고 가꾸면서 사는 재미를 느낀다”고 웃었다. 이정우 동장은 “지난해 이곳에서 수확한 고추, 상추, 열무 등을 관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보냈다. 올해는 노인정에 보냈는데 텃밭을 통해 나눔이 확산되는 것 같아 더 뿌듯하다”고 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는 사람은 약 70만명에 달한다. ‘주말 농장’에서 벗어나 내 집, 내 마당, 내가 사는 동네에서 텃밭을 가꾸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인터넷에는 텃밭 관련 쇼핑몰과 동호회, 개인 블로그와 카페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자신을 ‘랩 하는 프로그래머’로 소개한 경북 안동의 한 남성은 같은 제목의 블로그에 자신의 ‘옥상 텃밭’ 체험 일기를 사진과 함께 올려놓았다. “취미 삼아 또 가족 먹을거리용으로 옥상에서 자그마하게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오후 시간대나 주말에 저는 아주 잠깐 농부로 변신한답니다. 오늘은 꽃이 완전히 피었네요. 곧 고추가 열릴 듯합니다. 상추는 묵직하게 자랐어요. 집에서 삼겹살에 채소를 먹을 땐 걱정이 없답니다”라는 내용이다.

    주말 근교농장 찾던 ‘도시 농민’들 옥상·베란다 활용한 텃밭으로 이동

    서울 강동구청 옥상에 조성된 도심 텃밭에서 주민들이 채소를 키우고 있다.

    씨앗과 텃밭용 화분, 퇴비와 비료를 묶음으로 판매하는 인터넷의 크고 작은 쇼핑몰들도 인기몰이 중이다. ‘옥상 텃밭 전문’ ‘베란다 텃밭 전문’을 내세운 조경업체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텃밭 만드는 방법, 텃밭 작물재배법, 퇴비 만드는 법, 텃밭 영양·방제법 등 텃밭 관련 정보와 노하우를 알려주는 블로그와 카페도 관심을 끌고 있다. 고려대 재학생이 주축이 된 텃밭 모임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지난해 한 포털 사이트에 카페를 개설했다. 교내에서 텃밭을 경작 중인 이들은 지난해 9월 ‘텃밭학교’ 강좌를 마련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회원 수는 320명. 현재 김장용 무와 배추를 기르기 위해 ‘가을 농사를 함께 지을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도시 텃밭 가꾸기에 관심을 가진 이가 많아지면서 동호회 등 각종 모임도 확산 중이다. 지난해 6월 대전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전도시텃밭연대’는 현재 74가구 회원이 텃밭 5개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정천귀 대표는 “직장인 회원이 가장 많지만 대학생부터 성직자, 연구원, 자영업자, 시민단체 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다. 최소한 세 가구 이상이 뭉쳐 공동 텃밭을 가꾸는 경우에만 회원으로 받고 있다”고 했다. 연령대는 40~50대가 가장 많다.

    “신기하고 기특하다”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 민승규 농촌진흥청장, 김완배 서울대 교수,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등은 지난해 ‘도시농업포럼’을 결성하기도 했다. 300여 명이 참여한 이 포럼은 도심 속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농사를 지으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도시 농부들이 말하는 ‘텃밭 가꾸기’의 매력은 뭘까. 박달병씨는 “마당 가득 고추, 토마토, 피망 등이 올망졸망 열린 걸 보면 위안이 된다. 피곤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텃밭을 찾는다”고 했다. 홍제동에서 10년 넘게 옥상 텃밭을 가꿔온 정순병씨는 “채소 크는 모습이 아이들 자라는 모습만큼이나 신기하고 기특해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옥상부터 올라간다”고 했다.

    도심에서 텃밭을 가꾸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텃밭 농사’의 또 다른 매력은 신선한 채소를 원할 때 언제나 따 먹을 수 있다는 것, 또 사방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회색 도시에서 잠시나마 흙을 만지면서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부산시농업기술센터가 주최한 ‘제7회 부산도시농업박람회’에 전국적으로 3만명 이상이 몰린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박람회 기간 중 열린 ‘텃밭 채소 가꾸기 시민강좌’에도 240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이재중 부산시농업기술센터 지도사는 “텃밭을 가꾸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채소 심기 실습 등도 수업을 했다. 수강생은 주로 40~50대 분들이었고 남녀 비율이 절반 정도 됐다”고 했다.

    최근 전국 농업기술센터를 비롯해 도시 농업 관련 단체나 동호회, 지자체 등은 텃밭 농사 초보자들을 위한 ‘텃밭학교’‘도시농부학교’ 등 교육 프로그램을 속속 개설 중이다.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도심 텃밭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가 소개돼 있다. 50여 가지 채소와 과일의 품종별 재배조건, 육묘방법, 병충해 관리법 등이다.

    강원도 원주시는 지난해 11월 농사를 취미로 삼으려는 도시민을 위한 ‘텃밭교실’을 열었다. 도심에 거주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8개월에 걸쳐 텃밭 관리와 작물 기르기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농·화학약품과 비료, 비닐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환 농법을 통해 채소를 기르며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대전도시텃밭연대는 겨울철마다 텃밭 가꾸기에 필요한 이론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분기별로 실기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정천귀 대표는 “올봄과 여름에는 친환경 퇴비와 액체비료 만드는 법을 소개했다. 11월에는 우리 연대 5개 텃밭별로 활동보고회를 열어 친환경 텃밭 가꾸기 모범 사례를 발굴할 예정”이라고 했다.

    도시 농업 활성화

    SBS TV는 2년 전 도시 농업을 주제로 한 4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미국, 영국 등 도시 농업이 활성화된 해외 선진국을 찾아 공공 임대 텃밭, 주택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텃밭 등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 것. 지난 5월에는 영국 찰스 왕세자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도시형 농장(Commom Good City Farm)을 방문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송정섭 농촌진흥청 도시농업연구팀장은 “도시 농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는 건 우리 농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도시 농업이 주는 매력과 가치를 극대화해 더 많은 사람이 도시 농업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 6월 ‘도시 농업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2020년까지 전국의 도시 텃밭과 주말농장을 8000개로 확대하고 인구의 10%인 500만명을 도시 농업에 참여시키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도시 텃밭 확대, 도시 주말 농장 활성화, 도시 농업 공원 조성, 도시 빌딩 녹화, 식물 생산 공장 산업화, 도시 농업 육성법 제정 등을 단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현재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김학용 의원이 대표 발의한 ‘도시 농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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