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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⑦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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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요한 문제는 말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해결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보수정치가 비스마르크. 강한 이미지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측면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비스마르크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칵테일이 존재할 정도로 술과의 인연이 결코 만만치 않다.
  • 비스마르크는 젊은 시절부터 샴페인과 같은 발포주에 독일식 흑맥주를 머그잔이나 스타인(뚜껑이 있는 독일식 큰 맥주잔)에 섞어 넣어 즐겨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비스마르크는 이 칵테일을 워낙 좋아해 한번 입에 댔다 하면 갤런 단위(수천 cc)로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에서는 이 칵테일에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비스마르크 칵테일’은 사실 독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블랙 벨벳(Black Velvet)’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블랙 벨벳’으로 널리 알려진 ‘칵테일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1815~1898)는 프로이센(Prussia·1701~1918년 사이에 존재한 독일 북부의 옛 왕국) 내 쇤하우젠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군 출신인 아버지는 전형적 융커(프러시아 귀족)였고, 어머니도 고위 정부관료 집안 출신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여자였다.

비스마르크는 1832년 괴팅겐대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방탕한 생활로 이듬해인 1833년 제적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베를린 홈볼트대(1833~1835)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게 된 뒤에는 비교적 충실히 생활했다. 대학 졸업 후 비스마르크는 법관시보 시험에 합격하고 아헨과 포츠담에서 변호사 연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변호사로서의 길을 그만두고 한동안 두 여인과의 염문으로 젊은 시절의 일탈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1838년부터 당시 프로이센 융커계층의 의무인 1년간의 군대 복무를 마치고 예비군 장교가 된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쇤하우젠으로 돌아온다.

1847년 그가 32세가 되던 해에 평생의 반려가 되는 여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결혼하고, 바로 그해 새롭게 결성된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의 권위를 적극 옹호하는 왕당파였던 비스마르크는 강한 보수 성향과 날카로운 언변을 통해 주목받는 정치가로 입지를 다진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진보 혁명의 여파로 혁명적 소요 사태인 베를린 3월 혁명이 발생한다. 혁명세력은 자유주의 개혁을 통한 민족주의를 추구했으며 왕으로부터 헌법 개정의 승인을 받고, 신내각을 구성하는 등 한동안 위세를 떨친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반혁명파 측에 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던 혁명파는 내분과 함께 봉건 제후들의 군사력에 의해 그해 말을 기점으로 쇠퇴해 힘을 잃고 만다.

1849년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하원의원에 선출된다. 당시 독일에서는 여러 지역으로 분리된 소국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의 통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전체 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위상 및 독립을 제한할 수 있는 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회의에 참가해서도 그런 방향으로 활동했다. 결국 회의에서의 통일 논의는 독일 내에서 가장 중요한 두 주축 세력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해 실패로 끝나고 만다.



비스마르크 후원자 빌헬름 1세 등극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1851년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여해 1858년까지 활약했다. 이곳에서 그는 극우적인 색채를 점차 벗으면서 보다 실용적이고 유연한 자세의 정치인으로 변한다. 그는 독일 통일 논의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영향력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프로이센의 역량 강화와 독일 내 기타 주들과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그의 독일 통일에 대한 생각도 점차 긍정적인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러시아와 프랑스 등 인근 유력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도 힘을 쏟는다.

185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재위 1840~1861)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정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동생 빌헬름이 섭정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 비스마르크를 러시아대사로 임명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의 가장 중요한 외교 대상국이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러시아대사 임명은 표면적으로는 승진이었지만 실상은 그 기간 프로이센의 내부 정치에서 멀어져 그로서는 손실이 더 컸다. 실제 1859년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급박한 정세 변화에서도 그는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군의 일시적 약세를 프로이센이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 역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섭정으로 일하던 빌헬름은 병석에 있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61년 사망하자 왕위에 오른다. 그가 훗날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프로이센의 군국화를 바탕으로 독일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 빌헬름 1세(1797~1888·재위 1861~1888)다. 빌헬름 1세의 취임 이듬해인 1862년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에서 파리대사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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