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가을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정현상 기자│doppelg@donga.com

    입력2011-09-21 13: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가을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9월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고 있다.

    9월11일 방송된 MBC ‘나가수(우리들의 일밤-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를 보다가 숨어 있는 클래식 곡을 우연히 발견했다. 가수 윤민수가 류재현과 편곡해 부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중간에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제1주제가 삽입돼 있었다. 윤민수의 노래는 절창이었지만 양희은의 원곡과 브람스 교향곡의 만남은 그다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양희은의 곡은 그 곡대로, 브람스의 곡은 또 그대로 맛과 향이 전혀 다른데, 그것을 중간에 변형 없이 덜컥 이어놓은 것이다.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은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곡이다. 포코 알레그레토(Poco allegretto·조금씩 조금 빠르게)가 지시하고 있듯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첼로 선율이 곡을 이끌어가면 바이올린, 플루트가 그 주제를 이어받고 전체 오케스트라가 끝간 데 없는 깊이로 휘몰아간다. 이 곡을 들으면 낙엽 지는 숲 속의 호수,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 개울을 흐르는 맑은 물, 산을 휘감아 도는 강, 서해의 석양, 천년이 넘은 함양 상림, 굽이치는 언덕과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잉글랜드 요크셔데일이 떠오른다.

    회의하고 고뇌하는 영웅

    3악장은 오래전 개봉된 영화 ‘이수(離愁·1961년 제작)’의 주제곡으로도 쓰였다. 잉그리드 버그만, 이브 몽탕, 앤터니 퍼킨스가 주연한 이 영화의 원제는 ‘Goodbye Again’. 프랑스의 천재적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를 영화화한 것이다. 서른아홉 살의 성공한 실내장식가 폴(버그만 역)과 그녀를 사랑하는 스물다섯 살 청년 시몽(퍼킨스), 폴과 연인관계이면서도 다른 여자에 관심이 많은 로제(몽탕)가 엮어가는 사랑 이야기다. 영화에선 시몽의 열정과 고독이 잘 그려져 있다. 시몽은 브람스 같다. 스승인 슈만의 부인이자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피아니스트 클라라를 평생 흠모하며 지켜준 브람스. 시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이 담긴 편지를 폴에게 보내며 데이트를 신청한다.

    영화 속에서 3악장은 피아노곡으로 편곡돼 영화 분위기를 이끈다. 이브 몽탕이 여기에 ‘그대 내 곁에서 잠들 때(Quand tu dors pres de moi)’라는 가사를 붙여 부른 곡은 큰 인기를 얻었다. 이브 몽탕의 중후한 목소리가 상념에 젖게 하는 가을 느낌이다. 몽탕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가수 달리다(Dalida)는 이 곡을 좀 더 흥겨우면서도 허무한 느낌으로 불러 묘한 매력을 안겨준다. 윤민수도 원곡의 주제를 살리면서도 독창적인 편곡 실력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클래식 연주회를 찾아다닌 지 스물 몇 해. 브람스 교향곡 3번을 오케스트라의 실황연주로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의 다른 교향곡들과 달리 유난히 이 곡은 잘 연주되지 않았다. 드물게 이 곡이 공연돼도 어떤 날은 일에 쫓겨서, 또 어떤 날은 표를 구하지 못해 가지 못했다. 그러다 9월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처음 실황을 접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최은규씨는 이번 연주회 팸플릿에 ‘브람스의 교향곡 4곡 가운데 유일하게 (이 곡의) 4악장이 고요하게 마무리되는데, 그런 까닭인지 가장 덜 연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하, 그게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공연장에서도 고요하고 아름답고, 가슴을 후벼 파듯 잔잔하게 마무리되는 곡들은 관객의 호응이 적다. 마무리가 화려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강렬한 곡일수록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조금 비약해본다. 교향곡 한 곡을 사람의 일생이라고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일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를테면 브람스 교향곡 3번)보다 죽는 날까지 화려하게 살다(브람스 교향곡 1,2,4번) 가고 싶은 것 아닐까.

    브람스가 살아 있던 당대엔 교향곡 3번이 그의 다른 교향곡들보다 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음악평론가 한슬리크의 평을 요약하면 이렇다.

    “많은 음악애호가는 거대한 교향곡 제1번의 힘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향곡 제3번은 예술적인 완벽함으로 내게 충격을 주었다. 오케스트레이션은 더 풍부하며 새롭고 매혹적이다. 브람스가 매우 능숙하게 구사했던 상반된 리듬의 조합은 자유롭게 구사되었다.”

    위대한 3B 시리즈

    가을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예술의전당이 기획한 3개년 프로젝트 ‘위대한 3B 작곡가 시리즈’ 포스터.

    상반된 리듬의 자유로운 조합뿐 아니다. 브람스는 이 곡에서 장조와 단조를 끊임없이 교차시켜 회의하고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 듯하다. 이 곡을 빈에서 초연한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이 곡을 베토벤의 교향곡 3번(영웅)에 비교했다. 베토벤의 당당한 ‘영웅’에 비하면 브람스의 ‘영웅’은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고 최은규씨는 적고 있다.

    이번 부천필하모닉의 공연은 서울 예술의전당이 3년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위대한 3B 작곡가 시리즈(The Great 3B Series)’의 일환이다.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이니셜을 딴 ‘3B’의 작품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데, 올해는 부천필하모닉이 브람스 교향곡 4곡과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고 있다. 지난 3월 첼리스트 송영훈과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5월 피아니스트 손열음, 그리고 9월엔 클라라 주미 강이 협연에 나섰다.

    이번 연주회에선 아쉽게도 상임지휘자 임헌정이 건강상의 이유로 객원지휘자인 정치용(창원시향 상임)에게 바통을 넘겼다. 정치용이 이끈 부천필은 브람스 교향곡 3번을 들뜨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격조 있게 연주했다.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래틀 등이 이끄는 명연주에 비하면 음색이나 깊이에서 부족한 것들이 있었지만, 난생처음 듣는 교향곡 3번의 실황 연주는 한없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연주회에 많은 사람이 몰린 건 클라라 주미 강 덕분이기도 하다. 2010년 한국인 최초로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와 일본 센다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찬사를 받은 클라라는‘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77번’을 연주했다.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의 클라라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와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며 관객과 교감했다. 그의 표정은 브람스 음악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 당당했고, 자유롭고 다채로운 해석을 선보였다.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우승 특전으로 사용하게 된 스트라디바리우스(1683년 제작)가 주인을 잘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천필의 관악이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2악장 아다지오 초입의 오보에 독주는 도발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음악의 힘은 비브라토(vibrato)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음정 차이로 떨리게 하는 기교인 비브라토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니 마음을 떨리게 한다. 정해진 틀을 깨고 벗어나려는 갈망을 표현한다. 클라라의 비브라토는 브람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았을까.

    브람스 시리즈 마지막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11월10일 펼쳐진다. 브람스 교향곡 4번 e단조와 피아니스트 피터 야블론스키의 협연으로 피아노협주곡 제1번 d단조가 연주된다. 10월5, 6일 야노프스키가 이끄는 베를린방송교향악단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하는 브람스 교향곡 3번도 비교 감상해보기 바란다.

    ‘제발 더 들려줘!’

    나는 연주회장에 들어가서 출입구 문이 닫히면 연주회장 전체가 우주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것을 상상한다. 바깥 세상을 잊는다는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을 연상해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문이 닫히면 그처럼 새로운 세계로 여행이 시작된다. 2시간 공연의 기억은 오래도록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 같다. 연주회가 끝나고 시끄럽고 이기적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도, 복잡한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다음날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얼마간은 행복감에 젖어 지낼 것 같다.

    가을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런데… 다시 연주회장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아니, 벌써 끝났어? 제발 더 들려줘! 난 지금 아주 기분이 좋단 말이야. 내 정신은 맑고 난 내 인생을 바꾸고 싶어. 여기서 경험하는 게 이렇게 많은데, 난 집에 가고 싶지 않아. 그리고 부탁인데, 문 앞에 세워놓은 아이스크림 가판대 좀 치워요.”(크리스티아네 테빙켈 지음, ‘음악회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열대림)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