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교수가 학교(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로 돌아갔다. 옳은 선택이다. 그가 폭발적인 지지여론을 내세워 덥수룩한 수염을 달고 백두대간에서 돌아온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압박했다면 어렵잖게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관계’라 할지라도 여론지지율 50%가 5%를 누르는 것은 모양 사납지 않다. 한쪽이 야박할 일도, 다른 한쪽이 섭섭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안 교수는 가볍게(?) 양보했다. “박원순 변호사가 우리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 서울시장직을 누구보다 잘 수행할 분”이라는 이유였다.
안 교수가 양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안-박(安-朴) 단일화 합의 이틀 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 변호사는 한국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산입니다. 결심을 신중하게 하는 분인데 만일 그분이 결심을 했다고 하면 그분으로서는 이번이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을 활용할 유일한 시기라고 봅니다. 저와 충돌해서 다시는 그분에게 기회가 없게 되는 것보다 당선이 아슬아슬할 수는 있지만, 정말로 그분이 원하시면 그쪽으로 밀어드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안 교수는 이틀 뒤 박 변호사를 만났고, 그의 말을 들어보고 흔쾌히 물러났다. 불과 20분 만이었다. 아무 조건도 없었다. 박 변호사가 답했다. “시장 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세상,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애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이 아름다운 관계를 계속 유지해가며 우리 시대를 새로운 시대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제 눈’은 각자의 가치판단과 이념, 이해관계 등을 반영하고 제게 유리하고 익숙한 잣대로 현상을 해석하고 재단한다. 그것의 집단적 표출이 정치의 언어다. 예컨대 안-박 단일화를 ‘좌파 단일화 정치 쇼’로 매도한 한나라당 대변인의 공식논평은 현 보수여당의 기본 시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당 원희룡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자꾸 그런 식으로 공격해서 상대를 흠집 내려고 하니까 국민으로부터 한나라당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당리당략에 빠져 있다고 비난받기 딱 알맞은 것이다. 기득권에 골몰하는 낡은 정치에 대한 분노를 강남좌파의 쇼라고 매도하는 한 앞으로 한나라당은 어떤 선거에서고 어렵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그 속내야 어떠하든 “안철수 교수가 제자리로 돌아가 우리 사회에 더욱 기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환영한다”는 정도의 품격 있는 논평을 할 수는 없었을까. 지역·이념·계파의 구(舊)정치질서를 초월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갈구하는 안철수 신드롬의 의미를 제대로 보고 읽었다면, 자기 당 최고위원까지 분노하는 저급한 논평을 버젓이 내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안-박 단일화를 ‘박원순 서울시장―안철수 대통령’의 역할분담에 따른 정교한 시나리오로 보는 ‘정치 쇼’ 주장 또한 저급하기는 매한가지다. 안 교수는 “사전에 각본이 있었다면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지만, 공작정치와 음모론에 익숙한 자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존경한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서울시장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노릇일 것이다. 공직을 권력을 누리는 자리로 여겨온 지가 누천년(累千年)의 일일진대 어찌 그들만을 탓하겠는가. 하지만 이제 국민은 사익(私益)을 위해 공직을 탐하는 자가 아니라 공익(公益)을 위해 헌신(獻身)할 수 있는 인물을 원한다. 안철수 신드롬이야말로 그 결집된 원망(願望)의 소산일 것이다.
여기에 보수―진보, 우파―좌파의 진영논리, 내 편 네 편이 우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안철수 신드롬에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구태의연한 잣대를 들이댔을 뿐이다. 안철수는 우파인가, 좌파인가? 우리 편인가, 아닌가? 한나라당은 안철수가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현재의 집권세력이며, 현 집권세력이 한국사회에서 그 어떤 확장성을 가지는 것에도 반대한다”고 하자 대뜸 좌파 공격 모드로 돌아섰다. 정체성이 무엇이냐며 안철수를 의심하던 민주당은 그의 반(反)한나라에 안도하고,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촉발은 한나라당이 했지만 그 혜택을 민주당이 받을 자격은 없다”는 비(非)민주에 당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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